"엄마, 나 골치 너무 아파. 진짜 장난 아니게 아파요." "그거 백수병이야. 온종일 잠만 자고 있으니까 그렇지. 나가서 걸어 다녀봐." "인정 못 해. 꽃차남 유치원 갔다 오면 누가 봐요? 저녁밥은 누가 하고요? 엄마 점심은 누가 차려줬냐고요? 그거 다 내가 한 거잖아요."억울하다. 나는 '고딩' 아들이 차려주는 저녁밥을 먹고산다. 하지만 낮밥까지 몽땅 얻어먹는 건 아니다. 겨울방학, 제굴은 아빠가 차린 아침밥을 먹고 나서는 제 침대로 갔다. 음식 만화책 <오므라이스 잼잼>이나 <고독한 미식가 맛집 순례 가이드>를 펴고는 침대에 엎드렸다. 그 자세로 30분도 못 버티고 잠이 들었다. 오후 3시까지 내리 잤다.
여름방학 때는 급식소 봉사도 꽤 다녔다. 겨울방학 때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급식소 가야지"라고 하면, 제굴은 삭발한 머리를 감싸고는 "아악, 나 아닌 것 같아"라고 절망한 척했다. 그러나 토요일에는 일찍 일어나서 잽싸게 씻었다. 친구들 만나서 놀고 저녁에 들어왔다. 온라인게임 '하스스톤'에는 정성과 시간을 쏟아서 상위 2%가 됐다.
"제굴아, 엄마 늦잠 잤어. 아침밥 못 먹고 일하러 간다. 잠자느라고 바쁜 건 아는데, 이따가 엄마 낮밥 좀 차려줄 수 있어?" "엄마는 풀 뜯어먹는 소가 아니에요, 고기반찬 좀 할게요"1월 27일 화요일, 나는 제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요"라고 한 제굴은 흐느적거리며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서는 한숨과 짜증을 섞어서 "뭐냐고!"라고 했다. 유치원 다니는 동생 꽃차남이 깔아놓은 레고와 색종이가 널려있는 거실. 제굴은 그걸 치우고는 컵을 모아서 부엌으로 갔다. 설거지를 하고 부엌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장 보러 갔다.
"엄마는 자주 '나는 소하고 거의 같은 수준으로 풀을 먹을 수가 있다니까' 라고 하잖아요. 근데 엄마 식생활을 딱 보잖아요. 동물성 단백질이 너무 부족해. 과학 잡지에서 읽었는데요. 단백질이 부족하면, 인체에 치명적일 수도 있대요." 제굴은 엄마가 좋아하는 채소를 샀다. 1kg에 8000원 주고 닭 가슴살을 사고 쌈무도 샀다. 집에 오자마자 새싹 채소는 깨끗하게 씻었다. 닭 가슴살에 후추와 소금을 뿌려서 밑간을 했다가 프라이팬에 구웠다. 김치를 썰어서 접시에 가지런하게 올렸다. 엄마가 좋아하는 거니까, 냄비에 물을 붓고 두부를 넣어서 팔팔 끓여 데웠다.
점심시간에 집에 온 나는 "꺄아!" 열광했다. 먼저 새싹 채소를 먹었다. 흰 밥에 두부와 김치를 올려서도 먹었다. 쌈무에 닭가슴살을 싸서도 먹었다. 제굴은 "맛있어요?" 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하면서도 고기는 덥석덥석 먹지 못 했다. 닭 가슴살에서 핏기를 봤기 때문이다. 제굴은 "다 익은 거예요. 그건 그냥 핏줄(힘줄)이라고요"라고 했다.
"강제굴, 닭가슴살 네가 좋아하는 거라 샀지?""으하하! 누가 '닭다리 두 개랑 닭 가슴살 한 개 중에서 뭐 먹을래?' 물으면, 나는 닭 가슴살 먹을 거예요.""그럼 너는 도민준씨(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나온)랑 치킨 먹으면 안 되겠다. 도민준씨도 퍽퍽한 거 좋아하는데."제굴은 "나는 진짜로 그 형이랑 먹으면 안 되겠네" 하면서 웃었다. 나는 고맙게 잘 먹었다고 말했다. 제굴은 밥상 차리는 건 쉽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쌈무가 많이 남았다면서 인터넷으로 활용법을 검색했다. 앞으로는 담가먹어야 될 것 같다면서 "엄마 의견은 어때요?"라고 물었다. 내가 아는 게 있나. 말을 돌렸다.
"어떻게 밤에도 자고, 아침에도 자고, 낮잠까지 자냐? 하루 20시간은 자는 것 같어." "엄마, 아들은 겨울방학에는 사람 아니고 곰이야. 겨울잠 자는 곰이라고요. 그래서 내 동생 이름도 강제곰(제굴이가 어릴 때 끼고 다니던 곰 인형)이었잖아요."1월 29일 목요일, 나는 아침부터 일이 많았다. 점심시간에도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건너뛰었다. 오후 2시쯤에 제굴은 "엄마, 밥 먹을 시간 조금이라도 나요? 그때에 딱 맞춰서 밥상 차려 놓을게요"라고 카톡을 보내왔다. 나는 30분쯤 시간이 난다고 했다. 제굴은 따로 장 보러 가지 않았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만으로 상을 차리기로 했다.
나중에 커서 백수는 못 하겠다는 아들, 그 이유가...닭 가슴살에서 핏기를 봤다고 못 먹는 엄마를 위해서 일일이 그걸 제거했다. 이번에는 굽지 않고 수비드 조리법을 쓰기로 했다. 수비드는 단백질이 응고되는 60℃의 물에서 조리하는 거다. 온도를 재는 방법은 단순하다. 음식하면서 물에 손을 담가보면 안다. "앗, 뜨거워" 하는 정도는 70℃쯤 된다고 한다. "아, 뜻뜨" 정도가 60℃라고 한다.
"닭가슴살 살 때 쌈무도 샀잖아요. 이걸 어떻게 할까 검색을 했어요. 어떤 블로그를 갔더니 쌈무에다가 무 순, 닭 가슴살, 파프리카 빨간색하고 노란색, 겨자소스 해서 감싼 게 있어요. 예쁘더라고요. 사실, 엄마 밥상 고민만 없으면 저녁까지도 잘 수 있었어요. 근데 일어나길 잘했어. 커서도 나는 백수는 못 하겠어요. 계속 누워있으니까 머리 아파요."
햐! 점심 먹고 나니까 살 것 같았다. 나는 밥 맛있게 먹었다고 문상(문화상품권, 제굴이가 몹시 좋아함)이라도 줘야 할 판에 배은망덕해지고 말았다. "백수 생활도 나흘 뒤면 끝이야. 니네 학교 개학이야"라고 약 올렸다. 제굴은 요리책과 웹툰을 보고, 게임 하고, 잠을 잔 거 말고는 한 게 없다면서 봄 방학 때는 다를 거라고 했다. 나는 기대가 됐다.
"근데 엄마, 2월 1일부터 5일까지만 학교 가면 종업식하고 또 방학이에요. 그때는 좀 더 활기차게 놀면서 지낼 거예요.""아빠가 너보고 광주나 부산에 있는 맛집 탐방하고 오래. 버스 타고, 기차 타고 혼자서.""싫어요. 머리 짧다고 안 갔는데 급식소 봉사 가야지. 거기에 박소담(영화 <검은 사제>에 나온 배우) 닮은 누나도 있거든요." 1월 31일 일요일, 제굴은 내일부터 학교 가는 걸 믿을 수 없다고 투덜댔다.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면서는 괴성을 질렀다. 꽃차남은 이해불가. "형형, 들뜬 마음으로 학교를 가야지, 친구들 안 보고 싶어?"라고 물었다. 3주 전에 개학한 '선배'답게 "가면 재밌어"라고 격려를 해줬다. 동생의 말에 정신을 차린 제굴은 나보고 카풀비 냈느냐고 확인했다.
자러 들어간 제굴은 한참 있다가 거실로 나왔다. 느닷없이 삼색 슬리퍼(실내화)를 챙겨서 책가방에 집어넣었다. 2월 1일 오전 6시, 제굴은 알람이 울리자마자 일어났다. 혼자서 밥을 차려먹고, 똥을 누고, 샤워를 했다. 교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심슨 게임을 하다가 "다녀올게요" 하고 나갔다. 오전 7시 30분, 카풀버스 오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