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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최우혁의 묘를 마석 모란공원에 이장하고 27주기 추모식을 준비하는 모습.
아들 최우혁의 묘를 마석 모란공원에 이장하고 27주기 추모식을 준비하는 모습. ⓒ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2016년 설날 연휴가 끝나가는 10일 이른 아침, 문자 한 통이 아침 단잠을 깨웠다. 순간 "도대체 누가 연휴 아침에 문자를 보낼까" 싶어 궁금한 마음에 반쯤 눈을 뜨고 문자함을 클릭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글자.

'오늘 새벽, 최우혁 열사의 아버님 최봉규 님이 영면하셨습니다. 빈소는 보라매 병원 장례식장 8호실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달 전 쯤, 전화로 최봉규 아버님에게 안부를 여쭌 적이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이라니. 모든 죽음이 뜻밖이지만 최봉규 아버님의 소식은 정말 방심 끝에 뺨 한 대 얻어 맞는 것처럼 얼얼했다. 그러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처음 아버님을 만났던 23년 전의 기억이었다.

1993년 4월, 나는 전국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약칭 '유가협')의 간사로 일하고 있었다. 유가협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의문의 죽임을 당한 분들의 유족이 모인 시민단체였다. 그리고 내가 간사로 일하던 그 당시, 최봉규 아버님은 유가협 총무로 일하고 계셨다.

고 최우혁 열사의 아버지, 최봉규 님

처음 최봉규 아버님을 만났을 때 나 역시 아버님의 이름이 낯설었다. 그래서 사연이 궁금해서 알아보니 아버님 역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아들을 잃은 유족이셨다. 많은 분에게는 낯선 이름이겠으나 1987년 9월 군 복무중 사망한 고 최우혁 열사(이하 '최우혁')가 이 분의 아들이었다.

최우혁은 1966년 아버지 최봉규 님과 어머니 강연임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84년 3월 서울대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입학했던 수재였다. 이후 서울대 '경제 법학회'에 가입한 최우혁은 1987년 입대까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헌신하는 모범적인 학생 운동가였다.

'항상 활달하고 정의감이 높았던 최우혁'. 이것이 최우혁을 기억하는 동료들의 증언이다. 특히 1986년, 최우혁이 3학년이 되던 그 해 5월은 정말 뜨거웠다고 한다. 독재자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로 군부독재를 연장하려 하자 최우혁은 이를 반대하는 5.3 인천 시위에 참여하는 한편, 같은 달 20일에는 서울대 이동수 열사가 분신 항거하자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과 맞서다 전치 10주의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최우혁의 뜻은 확고했다. 학생 운동을 넘어 노동자와의 연대를 위해 노동 운동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1987년 4월 28일, 이날 최우혁은 또다시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힌다. 불행은 거기서 본격적으로 비롯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 최우혁을 덮친 것이다.

이번엔 부모님이었다. 학생 운동을 하는 자식과 이를 말리려는 부모 사이에서 어쩌면 갈등은 당연한 일이었다. 공부 잘하고 착했던 아들이 서울대 입학 후 매일 데모를 하더니 이젠 잦은 유치장 신세를 지니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고심 끝에 부모님은 최우혁을 군에 강제 입대 시키기로 결단한다.

이에 어머니는 아들의 입대일을 당겨달라며 병무청을 찾아가는 한편, 아버지는 친척까지 동원하여 입대일까지 최우혁을 집에 붙잡아 뒀다고 한다. 그러자 최우혁은 어머니에게 저항했다고 한다. "엄마, 저는 군대 끌려가면 죽어요. 지금 못 보면 다신 저를 못 보실 거예요"라며 입대를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부모의 귀에는 아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부모에게 반항하는 아들의 투정으로 여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최우혁의 입대일. 이제 그만 모든 것이 다 제 자리를 찾아오리라 기대하며 최우혁의 부모님은 훈련소 연병장으로 아들의 등을 내밀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날이 훗날, 지독한 비극의 출발이 될 줄은 그때까지 누구도 몰랐다.

입대 133일 만에 죽은 아들, 그 어머니의 아픈 사연

1987년 9월 8일 오전 7시. 최봉규 아버님은 생전, 이 시각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아들이 입대 133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군 부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들려온 말, "아들이 죽었다"는 연락이었다. 사인은 '자살'. 아버지가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아들은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놓여 있었다고 한다.

군 헌병대는 수사 결과, 부대 내 쓰레기 소각장에서 최우혁이 분신 자살을 했다고 밝혔다. 시각은 1987년 9월 8일 밤 12시 50분경. 사유는 '단순한 개인적 고민' 이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추후 밝혀진 새로운 진실에 의하면 최우혁은 '단순한 개인적 이유로' 자살한 것이 아니었다.

드러난 사실에 의하면 최우혁은 입대 전부터 보안사령부의 관찰과 감시 대상이었다. 최우혁이 사망하고 3년이 지난 1990년,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양심선언에 의하면 최우혁은 보안사령부가 감시했던 '서울대 운동권 동행파악 대상자'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런 최우혁이 군에 입대했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어머니 강연임 님의 비보였다. 막내 아들이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갈까봐, 그래서 그 파국을 막겠다며 싫다는 아들을 군에 강제 입대시켰는데 133일 만에 죽자 어머니의 자책은 깊었다. 결국 아들 사고후 두달 만에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는 한쪽 눈마저 실명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강했다. 그렇게 무너질 것 같았던 어머니는 다시 일어나 '비관 자살로 그냥 죽었다는' 군 당국에 맞서 '내 아들의 진짜 사인을 밝히라'며 싸웠다고 한다. 아들 대신 머리띠를 묶고 거리에서, 집회장에서, 그리고 군 부대 앞에서 사인 규명을 외치며 어머니는 싸웠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차라리 아들이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다면 그래도 살아는 있었을 텐데, 결국 내가 막둥이를 죽인 것"이라며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는 어머니. 그러던 1991년 2월 19일. 비극의 종착역은 참으로 끔찍했다.

며칠 전부터 최우혁의 어머니가 실종되어 사람들은 어머니의 행방을 찾아 분주했다고 한다. 혹시나 하는 불길함을 떨치며 정신없이 그 행방을 쫓던 그때, 한강에서 시신 한 구가 물에 떠올랐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확인 결과 최우혁의 어머니, 강연임 님이었다. "내가 아들을 군에 입대시켜 죽였다"며 한강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비극적인 시대에 비극적인 종말.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들 명예회복 반드시'... 아버지 최봉규 님의 투쟁

하지만 남은 아버지, 최봉규 님은 아내가 목숨을 던지며 남긴 한을 잊지 않았다. 막내 아들의 사인 규명과 명예회복이 먼저 간 아내를 다시 살리고 아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아내와 막내 아들을 잃은 그 큰 심적 고통속에서도 유가협에서의 활동을 더욱 열심히 이어 나갔다고 한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이 최봉규 아버지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내가 유가협의 간사로 일하던 1993년 당시, 사람들은 아버지를 '총무 아버지'라고 불렀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총무 아버지'라 부른다. 유가협에서 '총무' 직위로 오래 일하신 이유도 있었지만 총무로서 매우 큰 공적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유가협은 사실 경제적 후원이 넉넉지 못했다. 들어오는 회비나 후원이 속된 말로 '빤했다.' 이렇게 들어오는 돈도 별로 없으니, 돈 쓰는 일도 꼼꼼할 리 없었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마는 것이 그때까지 유가협 회계 구조였다. 그런데 이를 혁신적으로 바꾼 분이 명실공히 최봉규 '총무 아버지의 힘'이었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10원짜리 하나까지도 철저히 계산했고 따졌다. 87년 숨진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전 유가협 회장은 "총무 아버지의 장보기는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고 회상했다. 같은 돈으로도 더 좋은 물건을 샀고, 허투루 나가는 돈을 잡으니 점점 유가협의 재정이 자리를 잡아 갔다.

당연히 단체의 재정과 살림이 안정화되니 유가협의 민주화 운동도 더욱 활성화 되어 갔다. 회원들의 참여가 늘어나고 학생과 노동자가 찾아오는 유가협으로 힘이 더욱 실리게 된 것이다. 이러니 아버지 외엔 다른 누구도 유가협 총무를 대신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고 자연스레 사람들은 최봉규 아버지 대신 '총무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십 수년을 유가협 총무로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아버지 노력 덕분에 세상은 점점 바뀌었다. 마침내 정권 교체를 통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이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한 2004년 6월 14일, 제2기 의문사위는 '보안대의 관찰, 공작 및 군 내 가혹행위 등으로 최우혁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라는 조사 결론을 내린다. 

또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는 2006년 7월 31일, 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한 최우혁이 그로 인해 군에서 고통을 당한 끝에 목숨을 잃었다'며 최우혁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한다. 1987년 9월, 아들이 죽고 근 19년 만에 이뤄진 명예회복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이뤄낸 결과였다.

29년만에 아들 곁으로 떠난 아버지, 편히 잠드세요

 국회 과거사 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1인 시위중인 최봉규 아버님. 피켓을 목에 걸고 있는 분이 최봉규 아버님이시다.
국회 과거사 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1인 시위중인 최봉규 아버님. 피켓을 목에 걸고 있는 분이 최봉규 아버님이시다. ⓒ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그런 아버지가 2016년 2월 10일 새벽, 영면하였다. 지금쯤 아버지는 29년 전 세상을 떠난 막내 아들을 만났을까. 또 1991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도 다시 만나 "왜 나만 두고 갔냐"며 울었을까.

아버지는 아내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당신이 떠난 후 밝혀낸 아들의 사인 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서울대 졸업장을 받지 못한 아들을 대신하여 지난 2008년 아버지가 받은 서울대 명예 졸업장. 또한 지난 2009년 11월, 서울대학교 내에 민주화 운동중 사망한 아들의 추모 조형물이 세워졌다는 말도 아버지는 전하지 않았을까.

그랬다. 정말 아버지는 열심히 싸웠다. 1995년, 군사 독재자인 전두환과 노태우의 처벌을 위한 '5.18 특별법' 제정 투쟁을 비롯해 아버지는 늘 한결같이 최전선에서 독재와 맞섰다. 또한 의문사 특별법 제정과 연장을 촉구하는 농성을 위해 아버지는 칠순의 연세에도 한겨울 여의도 국회 앞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쇠도 세월이 지나면 녹이 스는데, 도대체 지난 29년간 아버지는 무슨 힘으로 그런 세월을 보낸 것일까. 그런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말씀이 있었다. 아들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만든 '최우혁 열사 추모집' - <아직도 못다 부른 노래>에 실린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나는 이제 너가 죽은 것에 대하여 그리 슬퍼하지 않을란다. 네가 남긴 유제(遺題)를 위하여 나의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부디 나에게 힘을 주어 너의 비참한 죽음을 알리게 하고, 그리고 너와 같이 뜨거운 피를 가진 청년들이 죽어 자빠지게 만드는 부조리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 주기를 바란다. 이제부터는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차가운 강은 없어도 좋을 법 하구나.'

어쩌면 아버지는, 아들을 잃고 대신 아들의 생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운동권 아들을 반대하다가 '운동권' 아버지가 되었던 최봉규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끝내 암 투병중 눈을 감으셨다. 처음 만났을 때, 정갈한 손짓으로 내게 수박 한 쪽을 건네시며 사람 좋은 미소로 웃으셨던 영원한 유가협 '총무 아버지'. 고 최봉규 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최우혁 열사의 아버님, 최봉규 님의 빈소는 서울 보라매 병원(02-841-7652) 8호실이며, 발인은 2월 12일(금)입니다. 장지는 11시 마석모란공원이며 2월 11일(목) 저녁 7시 '최봉규 아버님 추모의 밤'을 보라매 병원 장례식장 인근에서 열 예정입니다.


#유가협#최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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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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