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도 아이들은 맨발로 뛰쳐나가서 마당을 와아아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어쩜 이렇게 씩씩한가 하고 뒷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나도 어릴 적에 이 아이들처럼 놀았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에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나무란 말이 문득 떠올라요. 아차, 나도 우리 어머니처럼 우리 아이들을 나무라고 말았네 하고 새삼스레 깨닫지요. 그래서 곧바로 말을 바꿉니다. "얘들아, 겨울에는 양말을 신고 놀자. 발이 아야 하겠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여요. "얘들아, 너희가 예쁘다고 여기면서 새로 장만한 이 멋진 신이랑 장화가 여기 있는데 이 신을 안 신어 주면 이 신이 서운해 하지."
똑같은 일이나 몸짓을 놓고 어떻게 바라보고 마주하면서 말을 내놓느냐에 따라 참말 살림이 달라집니다. 나 스스로 늘 느낍니다. 아이들이 겨울에도 맨발로 놀겠다면, 또는 양말바람으로 마당을 뛰어다니겠다면, 이대로 놀라 할 수 있어요. 이러다가 발이 다친다든지 양말에 또 구멍이 나면, 이런 대로 맞아들이면 돼요. 발이 다쳤으면, "그래, 발이 다쳤네. 어떻게 하지?" 하고 되묻고, 양말에 구멍이 났으면, "그래, 구멍이 났네. 어떻게 하지?" 하고 되묻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고 깨달으면서 새로운 길을 열도록 북돋울 노릇이에요. 무엇보다 아이들 스스로 즐겁게 저희 살림길을 열도록 도와야지요.
착취자의 기준은 효율성이고, 양육자의 기준은 돌봄이다. 착취자의 목표는 돈, 즉 이윤인데, 양육자의 목표는 건강이다. (29쪽)
식량울 무기로 생각하든가 또는 무기를 식량으로 생각하면 소수의 사람들에게 안보와 부의 환상을 심어 줄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고방식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태롭게 만든다. (34쪽)웬델 베리 님이 빚은 <소농, 문명의 뿌리>(한티재,2016)라는 책을 읽습니다. 한때 교수로 일하다가 이 교수 일을 접은 뒤에 농사꾼이 되었다는 웬델 베리 님이라고 합니다. 도시에서 지식인으로 지내던 살림을 고이 접은 뒤, 시골에서 농사꾼으로 지내는 살림으로 거듭난 웬델 베리 님이라지요.
도시하고 시골을 온몸으로 겪은 삶이요, 도시하고 시골에서 온몸으로 일한 삶이기에, 웬델 베리 님이 쓴 <소농, 문명의 뿌리>라는 책에서는 두 문명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대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짚습니다. 사람들이 도시에서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배우는가 하는 대목을 건드리고, 사람들이 시골을 등지면서 무엇을 잃고 잊고 놓치는가 하는 대목을 살핍니다.
전문가가 주도하는 시스템의 가장 잘 알려진 첫 번째 위험은, 많은 비용과 수고를 들여 한 가지 일만을 하도록 훈련되는 사람들, 즉 전문가들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 예방에는 아무 기술도 관심도 없는, 질병에 대해 값비싼 치료책에만 능숙한 의사들이 생겨난다. (51쪽)미국 시민들은 "노동력의 96퍼센트는 식량 생산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을 기꺼운 마음으로 경청한다. 그러나 미국 시민들은 노동력이 '해방'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는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고용으로부터 해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79쪽)<소농, 문명의 뿌리>라는 책에서 크게 짚는 대목을 꼽자면 '앗기·돌봄'입니다. 웬델 베리 님이 두 가지 문명을 두루 겪고 살아낸 나날을 돌이킨다면, 도시살이는 '앗기'요, 시골살이는 '돌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시골살이도 '앗기'랑 '돌봄'으로 갈린다고 해요. 한집 사람들 살림을 짓는 "작은 보금자리"가 아니라 "엄청나게 커다란 농장"을 수많은 기계와 화학비료로 '운영 관리'할 적에는 '앗기'라는 문명이 된다고 해요.
'대규모 농장'은 땅에 땅힘을 되살리도록 북돋우지 않고 '더 많은 생산량'에만 목을 매단다고 합니다. 아마 이러한 대목은 여느 도시 이웃도 웬만큼 알리라 생각해요. 이를테면, 양계장 아닌 닭공장에서는 수십만 마리 닭이 옴짝달싹 못하면서 밤낮조차 없이 아주 빠르게 살이 찌다가 죽어야 합니다. 알 낳는 닭도 하루 내내 전구 밑에서 알만 낳지요. 돼지우리나 소우리 아닌 돼지공장이나 소공장이 되고 만 커다란 짐승우리에서도 돼지이며 소이며 옴쭉달싹 못하면서 그저 살만 빨리 찌우다가 죽어야 하는 얼거리예요.
이 같은 이야기는 방송에서도 곧잘 다룹니다. 그렇지만 이 같은 모습은 안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스스로 제 밥을 제 손으로 일구는 삶하고 아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안데스 농업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화해의 모델을 제시해 준다. 치료책은 주변부를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대자연이 가장 생활 속에서 숨 쉬게 하는 것, 다양성을 통일된 전체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런 것이다. (357쪽)건강한 농장에는 나무들이 심겨 있을 것이다. 농장이 위치한 곳이 애초부터 숲이 울창한 삼림지대일 수도 있고, 과실수와 견과류 나무들, 또는 그늘을 만들기 위한 나무들이 심겨 있거나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363쪽)<소농, 문명의 뿌리>를 읽어 보면, 미국에서는 96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도 4퍼센트가 될랑 말랑 하는 사람들이 '대규모 농장'에서 곡식하고 고기를 뽑아내어도 먹고살 수 있는 얼거리라고 합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엇비슷합니다. 한국도 '도시 거주 인구'가 90퍼센트를 넘은 지 열 해 즈음 되고, '농업 인구'는 '시골 거주 인구' 가운데에서도 얼마 안 되어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자급자족'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살림이라지만, 막상 '돈을 버는 일' 때문에 너무 바빠요. 손수 흙을 일구어서 밥이나 고기를 얻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막상 느긋하게 도시 문명을 누리거나 즐기지 못하기 일쑤예요.
집집마다 자동차는 있는데, 이 자동차로 길을 나설라치면 언제나 길이 잔뜩 막혀요. 도시에서는 쉴 만한 자리나 공원도 마땅하지 않은데, 주말에 바깥 나들이라도 가려 하면 그야말로 길이 막히고, 기차도 시외버스도 빈자리가 드물지요. 참말 뭔가 많이 뒤틀리고 만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농을 하는 농부는 이익과는 관계없이 그저 밭을 거닐지만, 산업농에 종사하는 농부나 관리인은 오로지 필요 때문에 농장을 돌아본다. (375쪽)아미쉬 농업은 현대적이거나 진보적이지 않다. 그러나 결코 무지하거나 비지성적인 것이 아니다. 올바른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은 정통농업보다 정교하다. (423쪽)
교수님 아닌 농부님 살림을 짓는 웬델 베리 님은 우리한테 묻습니다. 그대는 '진보'를 좋아하려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대는 '현대' 문명이 좋으냐고 묻습니다. 웬델 베리 님이 도시에서 교수로 살다가 시골로 옮겨서 오랫동안 농사꾼으로 사는 동안 몸소 겪고 지켜보노라니, '진보와 현대'라는 이름은 거의 허울뿐이었다고 밝힙니다. 우리 삶은 굳이 '현대적'이지 않아도 되고, '진보'가 아니어도 된다고 밝혀요. 그러면 우리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소농, 문명의 뿌리>라는 책에서 웬델 베리 님은 우리 삶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면, '아름다운 삶'이나 '즐거운 살림'이나 '착한 사랑'이나 '참다운 꿈'이나 '기쁜 웃음'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도시로 내다 팔아서 돈을 얻어야 하니까 그렇게 농약이나 비료를 많이 쓸 수밖에 없지만, 한집 사람들이 손수 먹을 곡식이나 열매나 고기라면 그처럼 함부로 '땅을 괴롭히면서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내 곁에서 깔깔거리며 노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웬델 베리 님 책을 읽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싶을 만한 종이소꿉을 손수 오려서 둘이 신나게 오랫동안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작은 흙지기'가 되면 스스로 즐겁게 흙을 짓습니다. '작은 살림꾼'이 되면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참으로 기쁘게 하루를 짓습니다.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기쁜 살림을 언제나 아름답게 누리면서 아이들하고 함께 누릴 사람이지 싶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일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주고 꿈을 북돋울 어른이나 어버이여야지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소농, 문명의 뿌리>(웬델 베리 글 / 이승렬 옮김 / 한티재 펴냄 / 2016.1.25. /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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