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뜬금없이 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나 혼자뿐인 것 같아."그 말을 듣자마자 엄마의 눈이 토끼눈처럼 커다래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고나 그러는지,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왜 혼자야? 엄마 아빠도 있고 동생도 있는데... 아무리 설명해도 그 이상의 반전은 없었다.
네 마음 속이 궁금했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어진 후에나 들 법한 생각인데, 겨우 여덟 살짜리 꼬마가 그런 말을... 그런 느낌에 젖어들 때면 엄마도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한데, 믿어지지 않았다. 넌 기억조차 없겠지만, 강렬한 한 컷의 사진처럼 엄마의 기억 속엔 또렷하게 살아 있다.
어쩌면 넌 유치원 가고, 학교 가는 시간들을 통해 낯선 감정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혼자 밥 먹고, 혼자 버스에 오르고, 혼자 벌을 섰던 시간들을 통해 야금야금 외로운 감정을 배웠는지도 몰랐다. 그런 감정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지 알아차렸을 때, 아마 그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온 '공기' 같은 것이었는지도. 오직 엄마에게만 심장박동수가 빨라질 놀랄 만한 '사건'이었겠지.
그땐 한순간이었다. 그런 말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칼과 방패를 들고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옥상에서 쿵쾅쿵쾅 네 발도장이 찍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걱정스런 엄마의 눈빛도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요즘 넌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젠 말 대신 표정으로 너의 감정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우주의 고아'가 된 듯 침울한 낯빛을 하고. 저 광활한 안드로메다의 별무리를 헤집고 다니면서, "전 혼자 뿐이에요.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라고 슬픈 목소리로 샤우팅 하는 네 얼굴이 떠올랐다.
사춘기의 큰 태풍이 지나갈 때마다 그 가운데에 서있는 너만큼은 아니었지만, 엄마에게도 바람이 불어왔다. 예상치 못했던 바람이었고, 메마르고 입 안이 텁텁해지는 모래바람이었다. 태풍의 중심은 너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 바깥에서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때였다. 사막 위에서 살다간 어느 선인장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선인장의 군락지에 '숲'이라는 별칭이 붙여진 과정을 설명한 그림책이 떠올랐다. 이 그림책엔 네가 좋아했던 동물들이 많이 나와 그 이름을 일일이 부르느라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던 책이었다.
어느 날 사막 위로 툭 떨어진 빨간 씨앗. 그 씨앗은 자라 선인장이 됐다. 선인장에게도 오직 하루 동안이었지만 꽃망울이 맺혔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달렸다. 빨갛게 무르익은 열매를 따먹으러 딱따구리가 다가왔다. 그러다 딱따구리가 선인장에 집을 지었다.
딱따구리의 단단한 부리가 선인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딱딱딱, 부리는 쉼 없이 움직였다. 선인장 속에 방 한 칸이 만들어졌다. 낮에는 시원한 그늘을 주고, 밤에는 따뜻한 온기를 주는 훌륭한 보금자리였다. 선인장은 딱따구리가 싫지 않았다. 딱따구리가 선인장에 사는 해로운 벌레들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딱따구리에게는 아늑한 보금자리가 마련됐고, 선인장에게는 건강한 피부관리사가 생겨난 셈이었다.
딱따구리만 살던 이곳에 올빼미와 흰줄 비둘기가 찾아왔다. 선인장의 몸 속 여기 저기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사막 위에 세워진 고층 빌딩 같았다. 선인장은 사막에 사는 동물들의 안전한 호텔이 돼 주었다.
200년이 지났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선인장은 모래 바닥에 쿵, 쓰러졌다. 그 소리가 고요한 사막의 정적을 흔들었다. 선인장 호텔은 모래 바닥에서도 그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새 손님이 선인장 호텔을 찾아왔다. 낮은 곳에 사는 동물들이 이사를 왔다. 지네와 전갈이 선인장의 몸 안을 들락날락 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주변으로 사구아로 선인장의 후손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선조의 정신을 이어 받아 황량한 사막의 아름다운 호텔이 돼 주었다. 그건 작은 씨앗이 일구어낸 아름다운 대자연의 서사시였다. 미국과 멕시코 북부지역에 서식하는 선인장 무리에 '사구아로 숲'이라는 멋진 호텔 간판이 붙여졌다.
선인장의 행보가 어떤 성인보다 위대하게 느껴졌다. 사막 위의 번듯한 호텔이 되어준 선인장에게 기립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선인장 덕분에 사막에 사는 동물들은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렸다. 거대한 선인장은 집 없는 동물들에게 무료로 집을 나눠준 셈이었다. 다람쥐와 도마뱀이, 나비와 쥐가 이웃사촌이 되었다. 사막에 사는 동물들은 선인장의 울타리 안에 어우러져 그윽한 평화를 일구었다.
변덕스러운 사막의 날씨를 견디려면 선인장 호텔 만한 곳도 없었다. 더구나 선인장의 뾰족한 가시는 동물들의 안전한 울타리가 돼주었다. 선인장의 가시 때문에 쉽사리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사막을 지키는 파수꾼이 된 선인장에게 감사패라도 전해야하지 않을까.
이 그림책을 읽을 때마다, 너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텔'이 되어 주자고 속으로 다짐했었다. 아름다운 호텔이 되는 건 아주 쉬워보였다. 선인장이 그랬듯이 너의 조개 같은 입술을 따뜻하게 품어주면 그만이었다. 장난기가 흠뻑 배어있는 작은 입술쯤이야 쉽게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카로운 입을 품어야 그 속에 깃들 둥지가 마련되는 법이었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서로의 마음 한켠에 작은 둥지를 짓도록 허락하는 일이다. 사구아로 선인장이 딱따구리의 입을 받아주었던 것처럼. 그 아픔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의 둥지가 완성된다.
그러나 어느 날, 조개 같았던 너의 입은 무지막지하게 날카로운 꽃게발로 변해버렸다. 네 가슴 위를 휩쓸고 간 봄바람은 도저히 예측이 되지 않았다. "사춘기면 저래도 되는 거야." 엄마 혼자 씩씩 거릴 때도 있었다. 앞 뒤 문맥 다 잘라 먹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쏘아붙이는 너의 거친 말들이 엄마의 가슴 속에서 뾰족한 가시처럼 자라났다.
그 순간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뾰족한 건 자식의 입술이라는 걸. 아무리 품으려고 해도 품어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땐 자기 마음 속에 돋아난 가시를 들여다봐야 했다. 가시가 돋아났다는 건 지금 사막을 건너간다는 신호였다. 사막을 건너려면 가시만큼 좋은 잎사귀도 없으니까.
그래도 너를 위한 둥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보잘 것 없는 이 마음이 누군가의 집이 된다는 걸 알려준 넌 엄마의 '영원한 딱따구리'였다. 너의 부리에 떨어져나간 살점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곤 할 수 없지만, 그 아픔이 엄마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맨 처음 선인장에게 딱따구리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선인장 호텔은 지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처음 엄마의 품으로 찾아든 네가 없었다면, 엄마는 평생 누군가의 매서운 말 뿌리를 품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미덕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있어서 '품어야하는 사랑'을 알았다.
품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날카로운 것들을 품고 품어 작은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 역시 너의 모습일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란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엄마 품을 떠나기 싫었던 네가 이제 엄마 얼굴만 보면 네 방으로 도망쳐버리는 이 슬픈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도 품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품고 품어서 엄마의 마음 속에 돋아난 가시가 선인장의 가시처럼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줄 그날을 꿈꾸어본다.
황량한 무법천지의 세상을 걷다 차가운 이슬을 피할 지붕이 필요할 땐, 부디 이곳을 떠올려주기를. 그리 화려하진 않지만, 엄마의 마음 속엔 너만을 위한 특별한 호텔이 있단다. 연중무휴. 평생무료. VIP 고객으로 특별우대. 이렇게 판타스틱한 조건은 아마 전 세계에서 유일무일 할 거야.
'언제나 대환영'이라는 플래카드가 나풀거리는 호텔. 너의 발자국 소리만 나면 마법처럼 문이 스르르 열리는 신비한 호텔. 언제든 찾아올 너를 위해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덧붙이는 글 | <선인장 호텔 > 브렌다 기버슨 글/ 미간 로이드 그림/ 이명희 옮김/ 마루벌 / 값 92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