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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성 소설 <열등의 계보>을 읽으며 저는 마치 하나의 공연을 보는 듯했습니다. 막이 열리고 무대가 펼쳐집니다. 한 남자가 농익은 태도로 무대에 오릅니다. 남자는 두루마리를 두르고, 한 손에는 부채를 쥐고 있습니다. 다른 한 손은 뒷짐을 쥐고 있네요. 눈은 갓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저는 그의 눈이 빛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중석엔 적막감이 흐르고 남자의 입이 열립니다. 남자는 처음부터 거침없는 질문을 관객을 향해 던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사는가?" 세상에서 가장 큰 질문을 받은 우리는 저마다의 머릿속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의 입은 한 번도 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강물처럼 긴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남자의 구수한 입담에 절로 어깨가 들썩여집니다.

남자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몇몇의 관중은 남자의 정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두루마리, 부채, 갓, 구수한 입담, 삶에 대한 통찰, 넓은 지식. 남자는 어느 누군가의 할아버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들썩들썩. 남자의 움직임은 할아버지라 하기엔 재기 발랄합니다. 이상하다 느껴지는 순간 남자는 갓을 벗습니다. 젊은 남자가 눈 앞에 나타납니다. 부채를 펴 듭니다. 이야기를 하느라 땀이 나는지 씩 웃으며 부채질을 하는 남자는 영락없는 이십대 청년입니다. 관중들은 놀랍니다. 저 젊은 청년이 어떻게 이런 무대 매너를 지니고 있고,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지?

예상하셨겠지만 관중은 독자이고, 이십대 청년은 이 소설을 쓴 홍준성입니다. 하지만 놀랄 시간도 없네요. 무려 4대에 걸친 김씨 가문 사람들에 대한 남자의 이야기는 끝이 나려면 먼 듯합니다. 아직도 1대인 김무(金無)씨의 인생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니까요.

작가의 문체가 무엇보다 독특한 책이었습니다. 어느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관객을 앞에 두고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면서 자유자재로 '썰'을 풀듯, 글을 풀고 있는 듯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이 사람 정말 자유롭게 글을 썼구나'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 어떤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 누구의 판단에도 지지 않겠다는 듯 문장은 자유롭게 흘렀습니다.

4대에 걸친 김가네 사람들 이야기

 책 표지
책 표지 ⓒ 은행나무
문장은 자유로웠지만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시대가 던져준 숙제를 등에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하필 거기에 있던 대단치도 않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곤, 오뚝이처럼 일어났으면 좋겠지만,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스러지는 수많은 인생들 중 하나가 김무였고, 김성진이었고, 김철호였습니다. 그래서 책은 잊을 만하면 이 문장을 끄집어냅니다.

"인생무상, 그것은 김가네의 가풍이었다." - <열등의 계보> 중에서

1930년대,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 김무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하와이로 건너옵니다. 어머니는 천재인 형의 공부 뒷바라지를 김무가 해주길 바랐습니다. 하와이에 온 김무는 손바닥이 다 벗겨지도록 사탕수수밭에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형을 대신해 이 한 몸 바치는 것이 억울하긴 해도, 김녕 김씨 충의공파의 자손으로서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곧 김무는 자신의 삶은 그저 '따까리' 인생이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김무의 아들 성진은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옵니다. 혈혈단신의 몸.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합니다. 깡패 밑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거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성진은 빨갱이가 무언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무언지, 이념이 무언지도 모른 채 군에 들어가 학살에 가담합니다.

사람들을 죽이면서 성진은 믿고 싶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진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행되어야 하는 거라고. 하지만 전쟁 후 남은 건 이 사실 하나였습니다. 사람을 쏴 죽인 건 자유민주주의도, 진보도, 이념도 아닌 자기 자신의 손이었다는 것.

철호는 '다리병신' 아빠와 혼혈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병신 자식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라납니다. 철호의 일생을 작가는 이렇듯 짧은 듯 길게 요약합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하지만 철호의 일생을 보고 있노라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드노니 - 하긴 뭐, 모든 법칙엔 예외라는 게 있는 법, 철거촌 출신에, 다리 병신 아비와 반짝이 치마로 술집 나가는 반쪽이 어미, 헌데 그 아비는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요 어미는 자살을 했으니, 주민등록증도 받기 전에 인생의 팔 할이 파탄 난 것처럼 보이는 철호의 인생은 계속해서 삐걱거렸다.

(...)  물론 희망을 말하는 몇몇은 바닥에 떨어지면 그 바닥을 치고 올라가면 된다고들 말하고 다녔지만, 안타깝게도 지옥엔 바닥이 없는 것이니, 철호의 삶은 헤어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흡사, 철호에게 세상은 하나의 깊은 늪이었다.' - <열등의 계보> 중에서

고로, 인생무상, 그것은 김가네의 가풍인 것입니다. 무에서 성진, 철호로 이어져 내려오는 김가네 사람들은 시대의 숙제에 제대로 답도 해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쓰러집니다. 성진이 손녀 유진에게 말하듯 그들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주어진 길을 걷다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것이지?' 하다 보면 삶이 끝나 버린 거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사는가

책에서 이들의 삶은 '묘청의 난'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같은 맥락 안에 놓여 있습니다. 고려 인종, 승려 묘청은 인종에게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합니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결과로 '묘청의 난'이 나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김부식 등을 포함한 부패한 귀족들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은 사대주의 대 독립주의의 투쟁이었고, 이때 독립주의가 패했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가 주체성이 결여된 사대주의로 흘러가버렸다고 판단합니다. 조선과 함께 그 안의 국민들의 삶에서도 주체성이 사라진 것이라고요.

'묘청의 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은 김무는 한번 들은 이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주체적인 삶과 주체적이지 못한 삶. '따까리' 인생. 자신은 묘청이 되지 못했지만, 김무는 마지막으로 아들 성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니는 꼭 묘청이 되그래이. - <열등의 계보> 중에서

성진도 묘청이 되지 못했고, 철호는 묘청이 누군지도 모르고 죽습니다. 한 세대를 뛰어넘어서야 성진은 유진에게 묘청에 대해 말할 수 있었죠. 1995년에 태어난 유진에게 주어진 시대의 숙제란 명문고,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 성진은 유진에게 묘청에 대해 말하며 이렇게 묻고 있었던 겁니다.

"너는 너의 인생을 살고 있니?"

고려 시대부터 시작돼,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해방 후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길고 긴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거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사는가?" 이보다 더 어려운 질문이 있을까요. 책을 읽은 후 제 머릿속에선 이 질문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저자 홍준성은 이 소설을 24살 나이에 보름 만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보름 만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소설 작법도 배워본 적 없는 철학과 학생이요. 앞으로가 정말 기대되는 젊은 소설가입니다. 문득 궁금해지네요. 작가는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열등의 계보>(홍준성/은행나무/2015년 10월 09일/1만3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열등의 계보 - 2015년 제3회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

홍준성 지음, 은행나무(2015)


#홍준성#소설#한국소설#열등의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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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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