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나는 꿈을 꾼다. 오래된 미래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어떤 그림을. 고르게 가난한 나라, 그 가난이 가져다줄 삶의 평화. 그 평화의 정경을. (28쪽)
이계삼 님이 신문과 잡지에 쓴 글을 엮어서 빚은 <고르게 가난한 사회>(한티재, 2016)를 읽습니다. 이계삼 님은 한때 국어 교사였고, 한동안 밀양송전탑과 얽힌 일을 했습니다. 이제는 녹색당에 몸을 바치면서 지낸다고 합니다.
밀양에서 나고 자란 뒤에 도시로 나가서 학교를 다녔고,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교사 일을 열한 해 만에 씩씩하게 그만두었고, 고향 밀양에서 시골마을 할매랑 할배하고 이웃으로 지냈다고 해요.
이계삼 님은 어릴 적에 송전탑이나 전봇대가 무엇인지 알았을까요? 아마 몰랐겠지요. 이계삼 님은 어릴 적에 핵발전소나 거대자본을 알았을까요? 아마 몰랐을 테지요.
그렇지만 이계삼 님은 나이가 드는 동안 차츰 하나씩 알아차립니다. 스스로 알려고 하면서 하나씩 배워요. 사회가 어떻게 흐르는가를 몸으로 부딪히면서 깨닫습니다. 정치나 경제가 굴러가는 얼거리를 몸으로 부대끼면서 알아차립니다.
'송주법은 송전선로 갈등을 '얼마 되지 않는 쥐꼬리 보상'으로 틀어막으려고, 그러니까 주민들이 입을 피해를 덜어 주거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송전선로를 더 쉽고 원활하게 깔려고 만들어진, 철저히 한전과 정부의 이익을 위하여 입안된 것이다.' (41쪽)<고르게 가난한 사회>는 이계삼 님이 몸으로 부딪히면서 깨달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수수한 국어 교사였던 사람이 왜 교사라는 자리를 씩씩하게 그만두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수수한 밀양 아저씨 한 사람이 왜 송전탑을 반대하는 싸움에 뛰어들어서 온몸을 바쳤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수수하고 작은 사람이 왜 녹색당이라고 하는 정치운동에 한몸을 맡기려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라는 이야기책에서는 경제발전을 다루지 않습니다. 이 책은 진보나 사상이나 철학을 밝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왜 이 길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길이 되는가 하는 대목을 돌아보면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돈 앞에 무릎을 꿇고야 마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교육이란 무엇인가 하고 돌아보는 이야기를 적어요. 크거나 대단한 것이 아닌 평화와 사랑으로 짓는 살림살이를 꿈꾼다고 하는 이야기를 펼쳐요.
'또래 아이들보다 가난했고, 밤낮없이 이어지는 부모님의 고된 노동을 지켜보면서 자랐지만, 그 시절이 행복했던 것은 아마도 내가 낙동강 지류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강변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2쪽)'학교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을 농민으로 길러내는 것은 지금 현실 속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교육 학교의 일부를 농업계로 전환하는 것도, 학교 교육과정 속에 농적 요소를 결부시키는 것조차 지금은 불가능해 보인다.' (69쪽)
어느 모로 본다면, 평화야말로 큰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곰곰이 따진다면, 사랑이야말로 커다란 이야기라 할 만합니다. 차근차근 돌아보면, 꿈이야말로 삶을 살찌우는 가장 크나큰 이야기라 할 테지요.
시골 교사로 일하다가, 밀양송전탑을 반대하는 일을 하다가, 녹색당 일을 하는 이계삼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평화'로 나아가자는 이야기이고, '사랑'을 나누자는 이야기이며, '꿈'을 키우자는 이야기입니다. 평화 아닌 길로는 가지 말자는 이야기이고, 사랑하고 어긋난 자리에 서지 말자는 이야기이며, 꿈을 짓밟는 무리하고 손을 잡자는 이야기예요.
'공부를 잘하면 한수원 직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공부 못했던 하청 직원에게 피폭 노동을 맡길 수 있다.' (95쪽)'할머니들이 한 젓가락 드시려고 마스크를 내리니, 옳거니 싶어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현장 직원이 있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단다, 이놈들아" 하며 소리치던 할머니들, 머쓱해 하는 직원이 보기 안 됐는지, "이리 와서 같이 짜장면 죽자"고 하셨단다.' (154쪽)조촐한 이야기책 <고르게 가난한 사회>는 참말 이 이름 그대로 "고르게 가난한" 삶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고르게 가난한" 삶터가 되기를 바란다는 꿈은, 굶자는 뜻이 아닙니다. 혼자 차지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어깨동무를 하자는 뜻입니다. 서로 나누는 기쁨을 누리자는 뜻입니다. "고르게 평화롭자"는 뜻이고, "고르게 아름답자"는 뜻이리라 느껴요. 이 땅에서 한솥밥을 먹는 우리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길을 즐겁게 열자는 뜻이리라 생각합니다.
'공부 못한' 학생이었기에 '하청 직원으로서 피폭 노동'을 도맡아야 하지 않거든요. '공부 잘한' 학생이었기에 '한수원 직원으로서 방사능 안 쐬는 사무직'을 도맡아야 하지 않아요. 공부를 못하거나 잘하거나 아름다운 일자리를 함께 누려야 하고, 학벌이나 재산을 모두 내려놓고 즐거운 꿈과 기쁜 사랑을 두 손으로 쥘 수 있을 때에 아름다운 나라가 되리라 생각해요.
'기본소득론은 예수님이 원조이다. 일거리가 없어 놀다가 저물녘 맨 나중에 온 일꾼에게도 먼저 와서 일한 자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다는 포도원 주인 비유야말로 기본소득론의 핵심적인 논리를 꿰뚫고 있다.' (225쪽)'이명박 정부는 강을 결딴냈다. 22조 원을 쏟아부은 4대강 본류는 지금 녹조 범벅이고, 물고기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곁으로 큰빗이끼벌레가 유유히 헤엄치는 거대한 물웅덩이가 되어 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산을 결딴내고 있다. 빗장이 풀린 산지개발허가는 전국 곳곳에 대규모 개발사업을 일으키고 있다.' (295쪽)어깨동무하는 평화를 꿈꾸는 아저씨 이계삼 님이 내딛는 발걸음은 조그맣습니다. 이제 막 한 걸음을 내딛는다고 할 만합니다. 어릴 적에 누린 아름다운 낙동강을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자라는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은 꿈이란 무척 수수하면서 예쁘다고 할 만합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서 이계삼 님이 목청 높여 외치듯이, 어느 대통령 한 분은 이 나라 물줄기를 결딴냈고, 어느 대통령 한 분은 이 나라 멧자락을 결딴내는 길을 걷습니다. 어쩌면 두 분 대통령은 "고르게 가난한" 삶터를 누린 적이 없기 때문에 슬픈 몸짓으로 물줄기와 멧자락을 결딴내는 정책을 밀어붙이는구나 싶기도 해요.
부디 이 나라에 따스한 평화와 아름다운 사랑과 푸른 꿈이 깃들 수 있기를 빌어요. 평화를 꿈꾸는 아저씨 이계삼 님도, 대통령이나 기업가도, 공무원이나 회사원도, 수수한 어버이도, 그리고 앞으로 이 땅을 가꿀 맑고 밝은 어린이도,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삶이 아니라 "고르게 넉넉한" 삶과 "고르게 즐거운" 삶이 되는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빌어요. 이 꿈길은 틀림없이 이루어지리라, 아니 우리가 꼭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고르게 가난한 사회>(이계삼 글 / 한티재 펴냄 / 2016.2.15. / 15000원)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