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소설의 역사를 장식했던 수많은 연쇄살인범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개인적으로는 토머스 해리스(1940~ )가 창조한 한니발 렉터가 떠오른다.
작가 토머스 해리스는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언론사에서 일을 하며 잔인한 살인사건들을 많이 취재했다. 아마도 그 경험이 한니발 렉터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토머스 해리스는 다작형 작가가 아니다. 그는 1975년에 첫작품으로 <블랙 선데이>를 발표한 이후로 한니발 시리즈를 이어가게 된다. 한니발 렉터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레드 드래곤>을 1981년에 발표하고 그 이후 대표작인 <양들의 침묵>(1988)을 완성하기까지는 약 7년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사실 <양들의 침묵> 속에서 알려지는 한니발 렉터의 연쇄살인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그는 고작(?) 9명을 죽였을 뿐이다. 한니발의 독특한 점은 몇 마디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의 내면과 심리를 들여다 본다는 점이다.
분석심리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한니발은 살인혐의로 체포되기 전까지 상당히 큰 정신병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방법원이 의뢰하는 살인자의 정신감정을 다루어 왔다. 그러니까 정신질환을 가진 범인들의 살인사건을 취급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이 살인자로 변한 것이다.
그가 왜 살인을 저지르는 지는 모른다. 살인범들의 정신질환을 치료하다가 자기도 거기에 전염됐을 수도 있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도저도 아니면 남들이 하는 범죄를 바라보고만 있기가 지겨워져서 스스로 그 바닥에 뛰어들었는 지도 모른다. '나라면 더 잘할 수 있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무튼 한니발의 살인동기는 작품의 마지막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분석심리학자이자 연쇄살인범인 한니발 렉터<양들의 침묵>은 미국 FBI 수사관 클라리스 스타알링이 정신병동에 수감 중인 한니발 렉터를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연쇄살인범들을 인터뷰하면서 현재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연쇄살인범 버팔로 빌 사건 수사에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연쇄살인범들은 대부분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 과거가 그들을 살인의 세계로 몰아넣는 것이다. 형사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월남전의 악몽을 잊지 못해서 전역 후에 형사가 되는 사람도 있다. <양들의 침묵>의 클라리스는 고아원을 전전하고, 시골의 목장에서 생활하며 부모를 그리워했던 어린 시절이 그녀를 수사관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한니발의 독방 창살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대면하지만 그 결과는 클라리스의 실패다. 한니발은 클라리스의 과거로 이야기를 끌고 가서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린 시절 가장 아팠던 기억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지? 어린 시절 시골의 목장에서 들었던 양들의 울음소리를 지금도 듣나?"클라리스는 주저하고 머뭇거리면서도 한니발이 내뿜는 묘한 기운에 끌려가듯이 모든 질문에 솔직히 대답한다. 그러자 한니발은 클라리스의 과거와 버팔로 빌 사건을 연관시켜서 다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버팔로 빌을 잡으면 양들의 울음 소리가 더 이상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이 질문을 통해서 왜 이 작품의 제목이 <양들의 침묵>일까 하는 의문이 풀리게 된다. 한니발은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클라리스에게 '양들의 울음소리는 그쳤나?'라고 다시 묻기도 한다.
어린시절의 기억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양들의 침묵>은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다. 1992년도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서 5개 부문의 상을 휩쓴 이 영화의 성공으로 '한니발 렉터'라는 이름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잔인한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범죄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면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너던 드미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한니발 렉터를 연기했던 안소니 홉킨스는 교양있고 세련됐지만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죽일 것 같았고, FBI 수사관 클라리스 스타알링 역의 조디 포스터는 조금씩 자신의 과거와 내면을 한니발에게 드러내는 모습을 연기해낸다(여배우들 중 총 쏘는 모습이 가장 잘 어울렸던 인물이 조디 포스터라고 생각한다).
영화 <양들의 침묵>은 후속 편으로도 이어지지만 조디 포스터는 출연을 거절한다. 영화가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반면에 안소니 홉킨스는 이후에도 계속 한니발 렉터로 등장한다.
어찌보면 조디 포스터나 안소니 홉킨스에게 최고의 영화는 <양들의 침묵>이었을 것이다. 작가 토머스 해리스는 이후에도 <한니발 라이징>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한니발 시리즈를 이어가지만 <양들의 침묵>만큼의 반응은 얻지 못한다. 그래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를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할테니까. 비록 연쇄살인범이라도 마찬가지다. 버팔로 빌 사건 이후로 클라리스도 편안하게 잠이 든다. 양들의 침묵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