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 루트커스 광장. 미국 섬유여성노동자 수만 명이 노동조합 결성과 임금인상, 참정권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벌였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여성들은 거리를 행진하며 '빵'과 '장미'를 달라는 구호를 외쳤다. '빵'은 생존권을 말하며, '장미'는 인간다운 행복한 삶을 살 권리를 가리킨다.
섬유여성노동자들의 이날 시위는 1910년 의류노동자연합이라는 전국적 조직을 탄생시켰고, 미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기폭제가 된 3·8 가두시위를 '세계여성의 날'로 정해 매년 기념할 것을 결정했다. '빵'과 '장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청소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스크린에 재현한 거장 켄 로치 감독의 동명(<빵과 장미>, 2000년작)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세계여성의 날 제108주년을 맞아 지난 5일 열린 제32회 한국여성대회는 '희망을 연결하라-모이자! 행동하자! 바꾸자!'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흙수저, 헬조선 등으로 표현되는 한국사회에서 희망은 버겁고, 여성으로서의 삶은 더 버겁다. 그래서인가 보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연결하고, 연대를 통한 행동으로 변화시켜 보자고 한 것은.
한국사회 여성노동자 800만 명 가운데 56.11%인 450만 명은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 남성노동자 임금의 35.4%에 불과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포함한 전체 임금노동자를 대상으로 분석한 성별 월평균 임금격차도 40.14%에 달한다. 또 남녀 간 임금격차는 최근 5년 중 가장 크게 벌어지면서 외려 성평등에 역행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성별임금격차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배경이다.
'싸구려 여성노동자'들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알아?"
안산에서는 안산여성노동자회와 안산청년네트워크 주관으로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18차 안산여성대회 토크쇼가 열렸다. 'Women의 샤우팅-우리의 월급봉투 누가 정했나?'를 주제로 8일 오후 일일후원 찻집을 겸해 맥주나라에서 열린 토크쇼에는 노동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토크쇼는 정책전문가인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와 20대 여성(취업준비노동자, '야생마'),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40대 여성(어린이집 교사, '맥가이버'), 돌봄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50대 여성(가정관리사, '투덜이') 노동자가 별명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전단지, 호텔, 학원, 편의점 등 온갖 알바와 인턴을 해 봤어요. 이력서 스펙 쌓기 위해 방학 중엔 다양한 인턴을 했어요. 월 30만~40만 원 받고 주 8시간 근무에 야근도 하고. 그런데 900만 원 받는 오너가 인턴급여 30만 원을 안주면서 겨우 30만 원 때문에 자신에게 이러는 거냐고 권력을 과시하는 경우도 있었고 정말 파란만장했어요."(야생마)"21살에 결혼하고 이후 보습학원, 피아노학원, 선교원 등에서 일하다가 아이가 5살 때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서 일을 시작했어요. 그 후 아이 1학년 때 돌봐줄 사람이 없어 4개월간 쉬고 그 이후부터는 계속 이 일을 했어요."(맥가이버)"둘째 아이 출산 후 다시 일을 찾았을 때 나이가 46살이었는데, 그 나이가 되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현장에서도 나이 많다고 뽑아 주질 않더라고요. 나이 많은 여자는 여자도 아니지만 사람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러던 중 이 일을 시작했는데 적성에 딱 맞아요."(투덜이)이들은 세대와 직업, 업무의 숙련도, 전문성과 상관없이 최저임금을 받고 있거나 그 언저리에 머물러있다. '맥가이버'처럼 어린이집 교사로 20년 넘게 일해야 간신히 최저임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한 달 지출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가슴 한켠에 켜켜이 쌓은 응어리를 풀듯이 이야기는 술술 이어졌다.
"요즘 일이 별로 없어서 주 26시간 일을 하고 월 75만 원 정도 받아요. 대부분 식비로 지출해요. 예전엔 가계부도 쓰고 그랬는데, 이젠 매월 마이너스라 따로 쓰고 있지 않아요(...) 가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가 왜 이렇게 동동거리며 일을 하고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투덜이)"지금 살고 있는 집 대출금이 고정으로 40만 원 정도 나가고, 학자금대출과 생활비 충당을 위한 약관대출이 월 20만 원에서 30만 원 정도 돼요. 그리고 아이와 저 보험비가 40만 원, 아들 교육비 50만 원 정도? 한 달에 20~30만 원 정도는 마이너스인 것 같아요."(맥가이버)"회사 다닐 때 130만 원 정도 받아서 60만 원은 적금하고, 나머지로 핸드폰비, 보험, 후원금, 기타 문화비 등 사용했어요. 너무 하고 싶은 게 많지만 그럴 여유가 없어요. 개나 소나 다 간다는 기차여행 '내일로'도 못 가보고, 지금 장바구니에 40개 정도의 물품이 계속 담겨만 있어요. 사지는 못하고..."(야생마)최저임금 현실화 위해 "싸구려 임금에 분노의 싸다구를 날리자"
여성에 대한 임금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게 최저임금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특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항상 최저임금 선에서 결정되고 있다. 임금노동자 중 남성 저임금 계층이 13.2%임에 반해 여성은 39.1%에 이르고 있다. 최저임금 미달의 62%가 여성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은 최저임금 현실화 운동의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관련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최저임금 1만 원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최저임금 1만 원, 이건 좀 그래요. 최저임금 오르면 물가는 안 오르나요?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밥 한 끼는 사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강남 밥값이 한 끼에 8천 원이니까. 그러면 한 8천 원? 최저임금을 그냥 올리자고 하는 것보다는 주거비용이나 이런 걸 고려해서 결정하는 구조가 되면 좋겠어요. 사실 지금 주거비용이 가장 큰 고민거리거든요."(야생마)"지금 하는 일의 노동 강도를 고려하면 시간당 한 1만2000원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최저임금을 정하는 기준이 우리 모두 알 수 있는 기준으로 정해지면 좋겠어요. 뭐 노사 간 '올려 달라, 안 올려준다' 싸우다가 겨우 10원, 20원 오르면 더럽고 치사하지만 우린 그냥 수용해야 하고. 노동 강도나, 물가상승률 등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노도 사도 서로 이해하기 쉽지 않겠어요?"(투덜이)"OECD 국가 중 임금격차가 가장 적은 나라는 아이슬란드예요. 왜? 아이슬란드도 2008년에 금융위기를 겪었는데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실업자에게 건강보험 등을 확대하고, 고교 무상교육 등으로 여성이 일하기 좋은 기반을 만들었어요. 우리나라의 2014년 임노동자 평균연봉이 3240만 원인데, 최저임금이 그 절반은 돼야 한다고 봐요. 참고로 총선을 앞둔 각 정당별로 최저임금 공약을 보면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은 의견 없음이고, 더불어민주당은 2020년까지 1만 원, 정의당은 3년 이내 1만 원이에요."(임윤옥 대표)생존권과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한 선배 여성노동자들을 기억하는 '여성의 날'은 다음 세대의 정의와 평등을 위한 투쟁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지옥 같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각자가 꿈꾸는 희망을 연대의 힘으로 잇는 것에서 비롯된다. 여성노동자로 이들이 올해 희망하는 꿈은 무얼까.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고, 기본이 지켜졌으면 좋겠어요. 20대 초반이니까, 여성이니까, 신입이니까 이런 수식어 없이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었으면 해요. 청춘을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해도, 청년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바뀌길 바랍니다."(야생마)"우리나라가 남녀 임금격차가 크잖아요. 그럼 남녀의 역량에 차이가 있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자리에서 각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이 아이를 돌보니까, 일찍 퇴근해야 하고 그러니까 임금도 적게 주고…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요."(맥가이버) "가정관리사 일이 전문 직업으로 인정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전문 직업으로 인정되면 임금도 오르고, 보호도 받으니까요. 올해엔 가정관리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고 직업으로 인정받는 해가 됐으면 해요."(투덜이)"처음 토크할 때 백세인생이 축복이 아니라고 했는데 우리가 마음을 다지면 축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싸구려 임금 받는다고 싸구려 노동자는 아니죠. 존중받아야 할 노동자로 서로 돌보면서 백세인생이 축복받도록 최저임금 현실화에 서로 힘을 모았으면 해요.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싸구려 임금에 분노의 싸다구를 날리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어요."(임윤옥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