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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렸을 때부터 넋 놓고 앉아있길 잘 했는데, 그때마다 어른들은 쟤 또 멍 때린다며 놀려대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전 멍 때리고 있던 게 아니라, 공상을 하고 있던 거였어요.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들에 푹 빠져있길 잘했거든요.

나이가 들어서도 공상은 계속됐습니다. 심지어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공상에 빠지곤 했을 정도였지요. 이래저래 다양한 공간에서 공상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저는 왜 소설가가 되지 못한 걸까요. 공상 좀 해봤다고 해서 다 소설가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소설가 김성중은 공상을 잘 해서 소설가가 된 듯도 싶거든요.

 책표지
책표지 ⓒ 문학동네
소설집 <국경시장>에는 김성중 소설가의 자전적 소설인 '한 방울의 죄'도 실려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어린 김성중은 공상에 빠져듭니다. 저처럼요!

(…) 고도의 집중된 환상이 부풀어 오른다. 스스로의 최면에 빠져든 나는 완전한 초현실, 줄거리 없는 이미지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그 순간부터 눈앞의 현실은 녹아버리고 나와 내 감각만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미사. 진정한 미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이교의 제의인 이유는 신의 존재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 <국경시장> 중에서

미사 시간에 이루어진 소설가의 공상의 강렬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 뒤에 이어진 문장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깜깜한 거리를 가로질러 미사에 참여하는 순간이 하루의 절정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은 금세 시시해진다. 하루는 일찍 빛나다 시들어버리고, 나는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권태를 느끼며 하품을 한다.' - <국경시장> 중에서

현실에서 그다지 권태를 느끼지 않았던 저였기에 김성중 소설가 같은 소설가가 되지 못했던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국경시장>에는 총 8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습니다. 기억을 팔면 쾌락을 살 수 있는 매혹적인 공간 '국경 시장', 천재가 되는 기이한 방법 '쿠문', 육체는 사라지고 관념만 남은 '관념 잼', 거꾸로 흐르는 이야기 '에바와 아그네스', 생각을 지니게 된 뱀 '동족', 불멸의 반대말 '필멸', 계속되는 악몽 '나무 힘줄 피아노' 그리고 '한 방울의 죄'까지.

'에바와 아그네스', '필멸', '한 방울의 죄'를 제외하곤 환상성이 짙은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몸이 사라지고 관념만 남은 남자라니…, 생각하게 된 뱀이라니…, 병에 걸리면 천재가 된다니... 책을 읽는 내내 전 궁금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가에게 또는 소설 속에서 환상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은 책의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던 '한 방울의 죄'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환상

작가가 열한 살 때 희정이란 친구랑 친했답니다. 희정이는 그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 리더로 통했어요. 말솜씨가 좋아 아이들을 확 휘어잡을 수 있었거든요. 그때는 몰랐는데 커서 생각해보니 희정이는 거짓말을 아주 잘 하는 아이였습니다.

본인은 원래 부잣집 딸인데 일이 생겨 한시적으로 이 동네에 살게 된 것이다, 내가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은 아빠가 아니고 삼촌이다, 내 집에는 2층 침대가 있다, 난 잠옷도 열 벌이다 하는 식으로 척척 거짓말을 하는 아이였던 거죠. 희정이의 거짓말은 친구들에게 결코 탄로 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의심을 할라치면 더 큰 거짓말로 친구들 정신을 쏙 빼놓곤 했거든요.

희정이는 환상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 환상을 말로 풀어내니 거짓말이 된 것이죠. 그렇다면 어린 희정이에게는 왜 환상이 필요했던 걸까요? 작가는 희정이에게 환상이 필요했던 이유로 존엄성을 듭니다. 없는 엄마, 없는 잠옷, 그 외 현실에선 부재하는 모든 것들 앞에서 어린아이는 환상을 통해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야 했을 거라고요. 희정이는 "공란이 그렇게도 많은 어린 삶을 방어하기 위해 숱한 거짓말을 발명한 것"이라고요.

저는 희정이의 이야기를 읽으며 눈 앞의 현실이 결코 우리의 존엄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희정이처럼 우리도 벗어나고 싶겠죠. 반면 우리는 또한 현실을 잘 살아내고 싶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버티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환상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에 대한 환상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일 수도 있습니다. 환상이 우리를 지켜주는 거죠.

우리를 지켜주는 환상. 보통의 우리 삶에서 환상의 역할은 여기까지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론 환상에 빠졌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곤 하는 삶의 반복. 이런 반복을 지속하다 삶을 끝마치게 되는 거겠지요.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환상

하지만 소설 속에서 환상의 역할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소설 속 환상은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소설에선 희정이의 거짓말이 거짓말로만 끝나지 않는 거죠. 왜냐하면 독자인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건 희정이의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말이, 환상이 가리키는 희정이의 공란 많은 삶이니까요.

실제로 소설집에 포함된 7편의 단편 소설 중 환상성이 짙은 소설일수록 현실감각이 더 두드러지기도 했습니다. 소설에서 환상성을 걷어내자 현실의 이야기가 파닥파닥 살아났거든요.

현실을 버티게 해주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소설 속 환상성. 이걸 알고 나니 저는 이제 환상 소설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더라구요.

8번째 소설 '한 방울의 죄'를 읽자 그 앞에 있던 7편의 소설들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지는 흥미로운 소설집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실 분이 있다면, 꼭 순서대로 읽으라 권하고 싶어요. 매혹적인 환상에서 시작해 진솔한 현실로 끝을 맺는 소설의 맛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덧붙이는 글 | <국경시장>(김성중/문학동네/2015년 02월 25일/1만2천원)
개인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문학동네(2015)


#김성중#소설#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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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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