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걸 즐기는 듯, 박스종이를 깔고 누워 느긋하게... - 이상옥의 디카시 <정주의 디오게네스>중국 정주 대학로에서 박스 종이를 한 장 깔고, 배낭에 기대 벌렁 드러누워 노트에 뭔가를 쓰려고 하는 노숙인을 보았다. 형색을 보니 노숙인인 건 분명한데, 예사롭지가 않다. 곁을 지나가는 학생들은 관심이 없고, 그러기는 노숙인도 마찬가지다. 그 모습에서 특별한 느낌을 받은 것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무관심해 하는 것노숙인이 노트에 뭔가를 진지하게 쓰려고 한다는 것을 신기해하는 건 나 자신의 편견인지도 모른다. 노숙인도 얼마든지 자신의 일상을 기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남의 일상에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고 개입하는 것은 당하는 상대방 입장에서도 매우 불편한 일이다. 어차피 노숙인의 삶을 구제해 줄 수 없다면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무관심해 하는 것이 오히려 배려일 수 있다.
한국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서 불편한 사회다. 아직까지 한국은 체면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사회다 보니, 무의식적으로도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게 된다. 유교 경전 <효경>에서 '입신양명'하는 것이 효의 성취라고 가르친 것이, 조선조에 출세주의로 변질되어 오늘의 한국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위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어야 성공적인 삶이라는 등식, 곧 '입신양명'을 하지 못하면 루저로 취급받는 것이 오늘의 한국사회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의 적성을 고려하지 않고 명문대 의대나 법대를 가라고 권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사회적 지위나 체면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나'라는 개인으로보다 '누구'의 아들로, 어느 가문의 한 일원이라는 공동체 의식 속에서 좀 자유롭지 못한 것도 분명하다. 물론 이걸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체면 때문에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제약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중국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중국에서 내가 느끼는 자유로움은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것이다. 60이라는 제법 적지 않은 나이지만 대낮에 선글라스를 끼거나 타이트한 청바지에 빨간 캐주얼화를 신고 다녀도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진다. 나로서는 익명의 공간이니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중국은 한국사회보다 이런 점에서도 좀더 자유로운 거 같다.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에서는 나 스스로 위축되어 좀 눈이 부셔도 대낮에 선글라스 쓰는 것을 절제했고, 옷이나 신발의 색깔마저 고려해서 착용했던 것이다. 검정색 혹은 남색 정장 정도를 무난하게 생각하고 그런 톤의 양복만 입었던 것 같다.
대학로에서 만나 노숙인은 거의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영혼 하나만은 누구보다 자유로운 것 같다. 그를 정주의 디오게네스라고 호명하기로 한다.
덧붙이는 글 | 올 3월 1일부터 중국 정주에 거주하며 디카시로 중국 대륙의 풍물들을 포착하고, 그 느낌을 사진 이미지와 함께 산문으로 풀어낸다.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스마트폰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감흥)을 순간 포착(영상+문자)하여, SNS 등으로 실시간 소통하며 공감을 나누는 것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