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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7월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는 430여 명 이상의 강화지역 민간인들이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점령시기의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1년 1·4후퇴시기에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 강화경찰서 등지로 연행·구금되어 고문을 당한 뒤 집단 학살된 사실을 진실 규명하였다.

그리고 지난 2011년 7월 서울중앙지법은 서영선씨 등 한국전쟁 당시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된 피해자 자녀 등 유족 10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서씨 등 9명에게 "국가는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5억3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8000만 원, 피해자 배우자에게 4000만 원, 자녀에게 800만 원씩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저자 서영선 선생
 저자 서영선 선생
ⓒ 서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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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선(78) 시인은 1951년 당시 13살로 어머니, 1살 남동생, 그리고 77세 할머니가 학살당하는 참변을 당했다. 그 후 그의 6살짜리 여동생은 영양실조로 죽었고 1961년 남동생은 경찰이 학교에 찾아온 후 귀가 도중 의문사 당했다. 1951년 어머니가 학살당한 후 서영선 시인과 어린 형제들은 부모도 없이 친척집을 전전하며 '빨갱이 자식'이란 누명을 쓰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살았다.

나는 진실위 근무 당시 서영선 시인에 대한 기록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자서전을 읽으며 뜨거운 분노와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서영선 시인의 시 중 '비극의 새'를 영어로 번역하여 외국 언론인들 만날 때 마다 진실위 활동 소개 자료와 함께 건네주었다.

비극의 새

아직도 끝나지 않은 비극의 새가 되어
컴컴한 굴속에서 후미진 골짜기에서
파도에 휩쓸려 날지 못하는 영혼
찢겨진 하늘에 갈라진 땅 위에
반세기의 혼이여

아물지 못하는 상처 골골이 새겨지고
인고의 세월 점점이 서리어도
피붙이 염원에 내일이 있으리니
하늘이 감천하여 평화의 비둘기 보내드리리다

Tragic Bird

I am an ever tragic bird
I am wandering in a dark cave and a deep valley
Hit by a wave, my soul cannot fly
The sky is torn and the earth is divided
My soul has been wandering for half a century

My wounds have not yet healed over the many years
Time has passed, but nothing seems resolved, I wish I could see eternity
I hope our dearest wish can move the heavens
And the heavens send us flesh spring water and peaceful doves

한국전쟁 중 민간인학살 진실규명활동으로 전국을 누비면서도 서영선 시인은 최근 두 권의 책을 냈다. 한 권은 시집 <산그늘 꽃덤불>이고 또 한 권은 수필집 <산은 막히고 강은 흐른다>가 그것이다.

시집 <산그늘 꽃덤불>과 수필집 <산은 막히고 강은 흐른다>
 시집 <산그늘 꽃덤불>과 수필집 <산은 막히고 강은 흐른다>
ⓒ 서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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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과 수필집은 서영선 시인이 보고 들은 한국현대사의 참혹한 학살 현장과 그 이후의 현장에 대한 상념을 담은 소중한 기록이다. 이 책을 읽고 지난 2주간 서영선 시인과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 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추운 겨울에도 몇 달 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다"

- 1961년,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우리 남매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라고 책에 쓰셨는데 그때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부정권 시절 우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언니 와, 나, 동생이 방을 얻어 자취를 했다. 그런데 몇 달이 안 돼 우리 자취집에 경찰이 다녀갔다. 그리고는 주인집에서 우리를 찾아와서는 나가달라고 했다. 우리가 '빨갱이 자식'이라고 나가라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고 기가 막혔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할 수 없이 추운 겨울에도 몇 달 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다.

또 경찰은 우리가 이사 가는 집 마다 수시로 찾아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아예 진을 쳤다. 그래서 내가 '왜 우리 집에 자꾸 와요, 안 와도 돼요' 그러면 '우리들은 놀러 다니는 거야' 하면서 실실 웃었다. 또 나와 언니가 직장이라도 하나 간신히 얻어서 다니고 있으면 경찰이 직장에도 찾아왔다. 그리고 사장에게 뭐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사장은 경찰이 돌아간 다음에 나를 불러서 '미안한데 나가줘야 겠다' 하고 나는 즉시 내쫓겼다. 그래서 직장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몇 달이 멀다하고 여기저기 새로운 직장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때 언니가 25살, 내가 23살이었고 남동생은 일하며 공부하느라 학교가 늦어 18세에 중학교 3학년이었다. 아아, 그 시절 고생한 것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하고 몸서리가 쳐진다."

- 1961년 6월 24일 동생 서유석이 '빨갱이 자식'이라고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결국 의문사 당했는데, 당시 동생은 몇 살이었고 어떻게 의문사 당했는가?
"남동생은 의문사 당시 19세로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다. 경찰이 동생이 다니던 학교에 수시로 찾아와서 선생님들과 다른 학생들에게 동생이 '빨갱이 자식'이니 지켜보라고 고지하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당시 누나들이 걱정할까 봐 집에 와서 그런 소리를 일절 안했다. 그냥 아침마다 '누나 나 학교 안 갈테야'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나는 '사람은 배워야 해' 하면서 싫다는 동생의 등을 밀어 억지로 학교에 보냈다.

그러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던 동생이 한강 샛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경찰은 그냥 동생이 '의문사' 하였다고 언니와 내게 무뚝뚝하게 통보하였다. 아마 집 안에 개가 죽었어도 그렇게 무뚝뚝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와 언니는 너무 무서워서 경찰이나 동생이 다니던 학교에 동생이 '의문사' 당한 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의문사' 당했는지 등에 전혀 물어 볼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다.

동생이 '의문사' 당한 지 30년 후인 지난 1991년 노태우 정부 시절 나와 언니는 동생이 고등학교 다닐 당시의 담임선생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동생이 의문사 당한 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을 당시 담임선생에게 물었다. 30년 만에 처음 물어 본 것이다.

하지만 담임선생은 그저 '모른다'며 발뺌하기만 급급하였다. 당시 동생은 a반인데 건장한 b반 아이 둘에게 학교에서 끌려가듯이 갔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 이 바보 누나들은 그 건장한 아이들 이름도 못 물어 보고 그저 엉엉 울기만 하였다. 지금 생각만 해도 펑펑 눈물이 난다. 불쌍한 우리 동생..."

"이승만 정권은 살인 정권"

- 이승만 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한 어머님과 1살 된 동생, 또 77살 할머님을 생각 할 때 마다 드는 상념이 있으실 텐데?
"그냥 이승만 정권은 살인정권이고 이승만은 부관참시를 해야 마땅하다는 생각만 든다."

- 요즘도 가끔 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학살당한 강화도에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머니와 동생이 갇혀있던 곳과 학살 장소를 보시면 여러 가지 생각이 나실 텐데?
"1951년 추운 겨울 어머니와 동생은 화장실도 없고 불기도 하나 없는 강화도의 양조장, 곡물검사소, 경찰서를 며칠간 옮겨서 끌려 다니셨다. 그리고 그 추운 겨울, 잠도 그냥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이불이나 요 한 장 없이 한 살배기 동생을 끌어안고 주무셔야 했다. 어머니를 잡아온 사람들이 밥이나 국 한 끼도 안 줘서 어머니와 동생은 며칠간 아무 음식도 못 드셨다. 대소변도 그냥 같이 끌려온 남자들과 함께 갇혀 있는 양조장이나 곡물창고 구석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해결 할 수밖에 없으셨다. 아아, 이게 생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후 거의 기아상태에서 추위와 공포로 벌벌 떨면서 어머니는 한 살배기 동생과 함께 학살당하셨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찰로부터 어머니와 동생의 시신을 건네받지 못했다. 아아, 내가 죽어도 이 한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가 갇혀있던 양조장 자리는 지금은 헐어 없어졌다. 그래서 강화도에 가면 어머니가 당시 갇혀있던 곡물검사소와 경찰서를 물끄러미 보다가 온다. 그곳을 볼 때 마다 가슴이 막 뛰고 손에 땀이 나며,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리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다. 그때 마다 너무 마음이 괴롭고 집에 와선 며칠간 잠도 잘 못 잔다. 경찰서는 지금 건물이 아니고 후에 다시 지었다."

서영선 시인이 강화도 학살지에 세운 시비, 학살당한 어머니를 그리는 내용이 애닯다.
 서영선 시인이 강화도 학살지에 세운 시비, 학살당한 어머니를 그리는 내용이 애닯다.
ⓒ 서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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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 어머님에 대해 잊히지 않는 추억이 있다면?
"어머님은 호수돈 여고를 나온 재원이시고 성격도 시원하시고 우리 자녀들에게는 자상하시고 따뜻하셨고 손재주도 좋으신 분이셨다."

- 지금 형제분들은 어떠하신지? 선생님은 글과 시로서 과거의 고통과 아픔을 승화시키고 계시지만 형제분들은 어떻게 사셨고 과거의 그 말 못할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고 계신지?
"나는 지면에 한을 풀고 있지만 언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열심히 살고 있다. 1951년 어머니가 학살당했을 때 4살이었던 여동생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결혼시키고 부부가 잘 살고 있다."

- 다른 민간인학살 유족 분들을 만날 때 마다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다른 민간인 학살 유족들을 만날 때면 학살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매일 술에 찌들어 살며 그냥 비관하는 분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반면에 그런 말 못 할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민간인학살의 진실규명을 위해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고 정말 자랑스럽고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들은 '우리는 빨갱이 만 죽였다'고 주장한다"

- 죄 없는 어머니와 1살짜리 동생, 77세 할머니를 학살한 가해자들은 그 후 어떻게 지냈는지 아시는지?
"노무현정부시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어머니와 동생, 할머니가 죄가 없이 학살당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진실규명 되었다. 그 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도 내가 승소했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죽이고도 지금 가해자들은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을 인정하거나 피해자인 나에게 용서를 빌기는커녕 '우리는 빨갱이 만 죽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지금도 국가에서 주는 연금으로 '빨갱이'를 죽인 유공자로 행세하며 차도 몇 대 씩 갖고 있고 잘 살고 있다. 같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어머니가 '빨갱이'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또 어머니를 학살한 가해자들은 여전히 '빨갱이'를 죽였다고 떠들며 국가유공자 행세를 하며 연금을 받고 있는 나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 학살가해자 중 일부를 만나신 것으로 안다. 만났을 당시 가해자들이 선생님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어떤 가해자는 '나는 전혀 모른다. 그저 위에서 시켜서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한 가해자는 내가 찾아간 후 집을 옮기고 전화번호도 바꾸어서 아예 연락을 못하게 했다. 2년 전에 죽은 또 다른 가해자는 1951년 당시에 나를(뿌리를) 죽이지 않고 살려 놓아서 자기가 노후에 고통을 받는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 10대에 졸지에 부모와 동생들을 잃고 60여 년의 세월을 핍박 받으며 한을 안고 살아오셨는데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아니 극복하려고 노력하시는지? 지금도 학살의 후유증이 많으실 것 같은데?
"아직도 그 트라우마는 극복이 안 되고 있다. 60여 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악몽을 꾸고 자다가 수시로 깰 때가 많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이후 세월이 흐를수록 좋은 세상을 못 만나 실망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이 많기에 건강에 유의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희망이 없어 조언할 것도 없다"

- 과거 민간인학살사건과 관련하여 아직도 99% 이상의 사건은 진실규명은커녕 기본적인 예비조사 조차 되지 않고 있다. 과거사정리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드리고 싶은 건의사항이나 조언이 있다면.
"지금 이 정부는 희망이 없어 조언할 것도 없다. 정권이 바뀌면 새 정부와 새로운 국회에 희망을 걸어 보겠다."

- 우리나라의 다수 국민들은 과거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민간인학살사건이나 인권침해사건에 대해 무관심하고 오히려 냉담하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분들에게 우리나라의 과거사 정리가 왜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은지?
"지금도 6.25전쟁 중 좌익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은 우리를 원수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남북관계가 좋아지고 통일을 이루어야 비로소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 반공이데올로기로 지배된 우리 국민의 정서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사 정리에 대한 수구언론의 방해, 박근혜 정부의 냉담한 태도 등 현재 모든 여건이 우리 학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도 알리지 않고 있다. 과거사정리의 필요성에 대해 우리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 서영선 선생은
1938년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예창작과 수료. 한국문인협회 회원. 순수문학회 회원. 양천문학회 회원. 징검다리시동인. 시집 <산그늘 꽃덤불>, <하얀 눈 위의 첫 발자국>, <가깝고도 먼길>이 있으며 동인시집으로 <바다가 쏘아 올린 찬사의 헹가래> 등 12집이 있다. 수필집 <산은 막히고 강은 흐른다>, 자서전 <한과 슬픔은 세월의 두께만큼>이 있다. 영랑문학 우수상 수상. 양천문학상 수상. 민족평화상 수상. 평생학습상 수상. 강화희생자 유족회장. 전국유족회 고문. 민간인학살범국민위 운영위원이다.

1951년 1월 6일 13세의 나이로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 어머니와 1살 동생 77세의 할머니가 학살되는 과정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 후 언젠가는 반드시 가해자들을 찾아서 어머니의 무고한 죽음을 따져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품고, 강화를 떠나 부역자의 가족으로 연좌제의 고통 속에서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 1990년부터 가해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하여 강화 양민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홀로 전개해왔다.

2000년에 출범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의 활동에 적극 동참하면서 전국의 유족들과 함께 민간인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전국유족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범국민위원회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해왔다. 그동안 강화위령제를 국가와 지자체의 비협조 속에서 사비를 들여 홀로 치러왔다.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그간 서영선 시인의 활동으로 인해 밝혀진 강화지역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태그:#서영선, #김성수, #강화, #학살, #진실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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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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