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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경주엔 꽃이 가득합니다. 길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벚꽃부터 시작해 유채를 지나, 연꽃이 가득하는 초여름까지 꽃잔치가 끊없이 이어집니다. 오늘은, 이런 화려한 봄 날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얗게 빛나는 하늘 작년 (2015년 4월 4일) 대회날의 꽃으로 가득한 하늘입니다.
▲ 하얗게 빛나는 하늘 작년 (2015년 4월 4일) 대회날의 꽃으로 가득한 하늘입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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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4월이 되면 경주에선 마라톤 대회가 열립니다. 올해로 25주년이 됐다니, 역사도 차곡차곡 쌓여가는 중이지요. 국제적인 관광 도시답게 최근에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많은 참가자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난 9일 앞에 달리던 참가자의 가방에 대만 국기가 걸려있던 걸로 봐서 참가하는 외국인도 계속 늘고 있는 것 같아요.

네. 저는 포항에 내려온 지 8년째, 대회 참여는 4년째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젠 봄이 되면 당연히 한번쯤은 뛰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앗, 여기서 잠깐! 절대 마라톤 풀코스를 뛸 만큼의 능력자는 아닙니다. 경주 벚꽃 마라톤에는 10킬로미터와 5킬로미터 건강달리기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저는 10킬로미터로 만족하고 있고요.

매년 초가 되면, 마라톤 대회에 신청을 하고나서, 잠시나마 '경주시청 공무원'의 마음에 공감해보곤 합니다. 마라톤 대회의 날짜는 이미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정해져야 하는데,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시기는 미리 알려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봐, 올해는 몇 일에 꽃을 피울텐가?"
"글쎄, 내가 그걸 알려 줄것 같은가? 하하!"


대회 조직위원회 실무자는 혹시라도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지나 않을까요? 경주 가로수 중 최고참 벚나무 어르신을 찾아가서 말이죠. 하지만, 매번 날짜를 맞추기는 정말 '하늘의 뜻', 그 뒤로 백일치성이라도 하셔야 할 것만 같아요.

올해의 대회는 4월 9일. 지난 주 토요일이었습니다. 애석하게도 포항은 4월이 되면서부터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로 급하게 맺힌 꽃망울이 파바박! 소리를 내며 팝콘처럼 터져버렸답니다. 분명 작년에는 대회 당일에 '하얀색 하늘 아래'를 달렸던 기억이 떠올라 너무 아쉬운 거예요.

"우왕~ 저 담주에 달리기 해야 하는데, 벌써 꽃이 다 피어 버렸어요!"
"괜찮아~ 경주는 여기보다 일주일 늦어."


분명 포항에서 30년을 넘게 살아오신 선배의 호언장담이었는데, 아뿔싸! 올해의 날씨는 참으로 요상스러운 것이, 벌들을 중노동시키기로 대동단결이라도 한 모양입니다. 경주의 벚꽃들도 포항과 같은 시기에 '만개' 사인을 보내고야 말았습니다.

아, 마라톤은 다음주인데, 4월 2일에 꽃놀이가 최고를 찍고야 말다니…, 이럴수가! 게다가, 한 주 동안 바람도 세게 하루 불더니, 목요일엔 시원하게 봄비도 내려버리니, 금요일부터는 탐스럽던 하얀 벚꽃들이 눈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주 내내 마음이 콩콩 방망이질을 하고 있네요.

'아, 꽃이 없는 10킬로미터를 뛸 수가 있을까?'

드디어, 대회 당일이 다가왔습니다. 아침에 늦잠을 자버려서 가까스로 출발 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답니다. 전세계에서 모여든 참가자들은 꽃이 벌써 많이 떨어졌음에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아 보였어요. 1년 중 단 하루, 오늘만 허락된 '도로점거 단체행동'. 이토록 즐거운 이벤트에 이미 흥분해버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즐거운 에너지 아닐까요?

이번 대회의 출발점 올해 대회의 출발 직전 사진입니다. 전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들썩거리네요!
▲ 이번 대회의 출발점 올해 대회의 출발 직전 사진입니다. 전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들썩거리네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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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준비되셨습니까? 올해 10킬로미터에만 참가자가 8000명입니다. 다들, 무리하지 마시고 조심해서 다녀오시는 겁니다. 약속!"

몇 년째 대회 사회자로 자리잡고 있는 연예인의 출발 안내와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출발!"

꽃눈이 내리는 길에서 대회 참가자들로 도로가 가득찼습니다. 합법적인 도로점거, 너무 멋지잖아요!
▲ 꽃눈이 내리는 길에서 대회 참가자들로 도로가 가득찼습니다. 합법적인 도로점거, 너무 멋지잖아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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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작년과 달리 이미 많이 져버렸습니다만, 길을 가득 채운 나무들은 하얗고 아름다운 꽃눈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같이 출발한 참가자들은 꽃들이 흩날리는 길에서, 이미 경기보다는 가는 봄이 남겨주는 풍경들에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저도 해마다 참가 기록이 점점 느려지고 있는데,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봄의 정취가 점점 더 좋아져서일 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정말?).

이렇게 올해의 대회도 끝이 났습니다. 대회의 기록은 둘째치고, 교통 통제덕분에 더 막히는 길을 간신히 집에 돌아와서는 그대로 쓰러져서 잠을 잤는데도, 월요일이 돼도 안 쑤신 곳이 없네요. 하루가 넘게 쉬었는데도, 회복이 안 되는 건 과하게 봄의 꽃놀이를 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나이를 먹어서인가요?

그래도,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가는 봄이 아쉽고, 무언가 새로운 이벤트를 준비하신다면, 봄엔 경주의 꽃놀이 마라톤 대회에서 '합법적인 도로점거!'를 즐겨주세요. 나름대로 통쾌한(!) 느낌도 있고, 아직 '살아있음'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랍니다. 물론, 매년 모이는 천원은 될까싶은 기념품 메달도 챙기고, 작년보다 얼마나 느려졌는지, 후유증은 얼마나 더 가는지를 챙겨보는 것도 덤이죠!


#일상 비틀기#경주 벚꽃마라톤#권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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