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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서원의 사당 측면이 보이는 풍경
 서계서원의 사당 측면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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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0일, 신평 경북대 로스쿨 교수의 저서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이 출간되었다. 책은 '1장: 사법개혁 산물로서의 법학전문대학원, 2장: 교육과정의 점에서 살핀 한국 법학전문대학원의 모습의 변화, 3장: 대륙법계 국가에서의 법조양성을 위한 교육과정, 4장: 한국 법학전문대학원 교육과정에 대한 개선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 목차들은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이 전문 연구서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는 본문 속의 '(경북대 법률전문대학원의) B교수가 "모 변호사 아들이 이번에 우리 법전원에 원서를 냈는데 꼭 합격시켜야 한다"며 동료교수 연구실을 찾아다녔다.'라는 한 대목에만 유난히 주목했다.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고시생 모임'의 권아무개씨(39)가 "부정입학 관련 의혹을 밝혀달라"고 경찰에 신고하자 나라의 이목이 온통 이 구절에 집중되었다.

한국 로스쿨, 부정 입학 있을까 없을까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경찰은 '입학 청탁 의혹을 받고 있는 B교수와 해당 학생의 아버지 등을 피내사자 신분으로 조사하는 등 모두 28명을 조사했으나 부정 입학 부분은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신 교수는 5월 26일 자신의 SNS를 통해 "녹음 파일이 있음에도 청탁을 입증하는 증거를 모두 무시하고 일방적인 결론을 내렸다"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또 "B교수가 관련된 또 다른 입시 비리 의혹 수사도 해줄 것을 경찰에 요청했으나 이를 전혀 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하면서 "면접관이 면접 내내 전라도 지역민들을 비하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질문을 하는 등 입시의 공정성을 현저히 해하는 내용에 대한 수사도 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경북대 로스쿨 부정 입학 없었다? 경찰이 증거 무시" 기사 참조)

서계서원 전경
 서계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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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북구 호국로51길 45-17(서변동) 서계서원에는 임진왜란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 대구의병진)의 3대 의병대장 이주 선생이 모셔져 있다. 서계서원이 있는 서변동의 동북쪽 뒤편으로는 팔공산 자락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임진왜란 당시 대구 사람들은 이 골짜기로 대거 피란을 했다. 일본 군대는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줄기차게 공격을 해댔다. 팔공산 서봉 아래 부인사에 본부를 둔 공산의진군은 일본군들을 잘 막아내었다. 덕분에 대구 부민들은 정유재란 이전까지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같은 이력의 이주 선생에게 과거 시험 부정 사건과 관련되는 특별한 실화가 따라다닌다는 사실은 참으로 뜻밖이다. 물론 선생에게 부정적 인상을 덧씌우는 일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지만, 흥미로운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튼, 이 재미있는 사건을 돌이켜보려면 그가 과거에 응시하게 된 과정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과거 합격을 통해 입신출세를 하겠다고 꿈꿔본 적이 없는 이주가 시험 부정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과거 통해 입신출세를 꿈꿔본 적 없는 이주

일찍 학문의 경지에 도달한 이주는 약관 27세(1582년)에 환성정이라는 띠집 정자를 짓고 후배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자신이 손수 지은 금호강변의 환성정를 매우 좋아해서, 그해 9월 9일 중양절에는 거기 올라 '중구등환성정(重九登喚惺亭)'이라는 시를 읊기도 했다. 원문과 구본욱의 국역시를 함께 읽어본다.

回首山亭引興長 산정에 올라 돌아보니 흥취가 크게 일어나는데
九秋佳日屬重陽 9월의 가을 중 좋은 날 중양절이라네.
霜前草木俱零落 서리 내려 초목에는 잎이 다 떨어졌는데
最愛籬花晩節香 울타리 옆에 늦게 핀 국화 꽃 향기가 가장 사랑스럽다네.

젊은 나이임에도 출세욕도 없이,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살아가는 아들이 어머니로서는 탐탁할 리 없었다. 결국 이주는 29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어 과거에 응시했다. 그는 지방에서 치러지는 두 번의 향시(鄕試)와, 과거 본시험의 예비 관문격인 동당시(東堂試)에 연이어 장원을 차지함으로써 "3장원(三壯元)"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서계서원 내의 서재 겸 정자인 환성정. 건물의 끝이 정자로 꾸며진 점이 이채롭다.
 서계서원 내의 서재 겸 정자인 환성정. 건물의 끝이 정자로 꾸며진 점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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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이주는 복시(覆試)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갔다. 달리 회시(會試)라고도 하는 복시는 과거의 본시험을 말한다. 과거장에서 이주는 <대학>을 외던 중 문득 한 글자에 의심이 생겨 잠시 암송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장막 밖에서 지켜 보고 있던 대구 출신 고관이 손톱으로 가죽신에 글자를 새겨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주는 의연히 일어서서 시험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는 스승 전경창에게 "임금을 섬기겠다고 과거장에 들었으면서 임금을 속이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는 시험장을 아주 떠나버렸다. 그 이후 이주는 단 한 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런 성정의 이주였으니, 그가 우리 민족 최대의 전란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시험 부정 거부한 이주, 임진왜란 의병장이 되다    

임진왜란 당시의 환성정은 지금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본래의 환성정은 망일봉의 끝자락인 금호강 물가에 지어졌다. 그러나 이주가 처음, 직접 지은 환성정은 임진왜란 중에 불탔다. 왜란 종전 1년여 후인 1599년, 당시 44세였던 이주는 환성정을 다시 짓고 강학도 재개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환성정은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철폐령에 휩쓸려 서계서원이 훼철되자 지역 선비들과 후손들은 서원을 잃은 대신 환성정을 재복원했다. 이에 대해서는 1832년(순조 32) 발행판 <대구부 읍지>에 관련 증언이 남아 있다. 이 책은 '지금 정자는 (환성정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고 실물이) 없다'라는 기록을 보여준다.

강당과 환성정, 그리고 경내 뜰이 잘 보이는 풍경
 강당과 환성정, 그리고 경내 뜰이 잘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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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서원은 1781년(정조 5)에 건립되었다. 지역 선비들은 조선 태종 때의 대제학 이문화(李文和, 1358-1414) 선생을 모시기 위해 서원을 세우면서 동화천(溪)의 서(西)쪽에 있다고 하여 서계(西溪)서원이라 불렀다. 그 뒤 임진왜란이 끝나고 200여 년 경과한 1801년(순조 1), 공의 8세손인 태암(苔巖) 이주(李輈, 1556-1604) 의병장을 다시 배향했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던 서계서원이 다시 살아난 것은 1992년으로, 훼철된 때로부터 120년도 더 지난 후였다. 그래서 성균관 전학 이상학이 쓴 <서계서원 복원기(復元記)>의 서두도 '팔공산 남쪽 금호강 위에 예전에 서계서원이 있었으니 공도공(恭度公) 오천(烏川) 이선생(李先生, 이문화)을 타유(妥有,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냄)하던 곳이다. (중략) 순조 원년에 선비들이 발의하여 다시 선생의 9세손 태암공 휘(諱, 이름) 주를 배향하였다.'로 시작된다.

당연히, 선산목사 김영이 쓴 <서계서원기(西溪書院記)>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서원기 역시 '달구(대구)의 북쪽 금호(강) 위에 서계서원이 있으니 이는 오천 선생을 봉안한 곳이다. 그리고 또 오천 선생의 9세손인 육휴당(六休堂, 이주) 선생을 배향하였다.'라고 기술하여 이 서원이 이문화와 이주 두 분 선생을 모시는 곳임을 밝혀두고 있다.

서원기를 꼼꼼하게 읽으면 보이는 재미있는 표현

방금 인용한 서계서원기 안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발견된다. 대구를 '달구'로 적은 대목이다. 대구 일원에서는 '닭'을 "달", '닭 새끼'를 "달구 새끼"로 발음한다. 즉, 대구 사람들에게는 '달'과' 달구'가 같은 말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첨해이사금 15년(261) 조에 기술되어 있는 '달벌성'은 곧 '달구벌성'이다. 달성은 지금의 대구 시민들에게 "달성 공원"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사실은 우리나라 고대 축성술을 증언해주는 국가 사적 62호이다.

달벌 또는 달구벌은 757년 '대구(大丘)'라는 새이름을 얻는다. 경덕왕이 인명과 지명들을 중국으로 개명할 때 덩달아 그렇게 바뀌었다. 그런데도 그보다 1020여 년 후에 집필된 서계서원기가 여전히 '달구'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임금과 조정이 지어서 내려보낸 '대구'라는 중국식 이름보다 본래 이름 '달구'에 지역민들의 더 깊은 애착이 서려 왔다는 사실과, 언어에 깃들어 있는 사회성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겨울에 본 서계서원의 강당과 환성정
 겨울에 본 서계서원의 강당과 환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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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서원에는 지명과 얽힌 또 다른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 일화는 서계서원의 건물 중 한 곳인 환성정의 기문(記文)에 남아 있다. 해당 원문은 '余嘗構數椽于所居之洞 洞卽麗祖之討甄萱時 警軍曰 無怠者也(여상구수연우소거지동 동즉려조지토견훤시 경군왈 무태자야)'이다. '내(이주)가 일찍이 사는 동네에 몇 칸의 집을 지었는데, (이) 동네는 고려 태조가 견훤을 토벌할 때 경계하는 군사들에게 "게을리하지 말라!" 라고 말한 곳'이라는 뜻이다.

<환성정기>에는 '고려 태조가 견훤을 토벌'했다고 되어 있지만, 927년의 이곳 동수대전에서 참패를 한 쪽은 왕건이었다. 왕건은 신숭겸, 김락, 전이갑, 전의갑 등 장수들이 목숨을 내던져 견훤군을 막는 동안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 그래도 이주는 후삼국을 통일하여 민족사의 새로운 전기를 개척한 왕건의 업적을 기려 '고려 태조가 견훤을 토벌했다' 식의 치사를 환성정기에 남겼다.

사당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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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서원에도 사당은 강당 뒤편에 있다. 우리나라 서원들이 취하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건물 배치 방식이다. 물론 강당, 환성정 등 모든 건물들이 1992년에 웅장하게 신축되었으니 사당 역시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까닭에 사당다운 분위기는 자연스레 풍겨난다.

사당의 주벽(主璧, 중심이 되는 위패) 이문화는 1358년(공민왕 6) 인천이씨 문중에서 태어나 1380년(우왕 5) 과거에 합격했다. 그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시대에 예조판서, 호조판서, 형조판서, 도승지, 대제학 등의 고위 벼슬을 역임했다. 그가 1414년(태종 14) 타계하자 왕이 사흘 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슬퍼했다는 유명한 옛일이 전해진다. 태종은 그에게 공도(恭度)라는 시호(諡號, 죽은 뒤 임금이 내린  이름)를 내리고, 영의정에 추증(追贈, 죽은 뒤 벼슬을 높여줌)했다.

이주는 일곱 살 때 처음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홉 살 때 <소학>을 배우던 중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愛親敬長)'라는 구절에 이르렀을 때 "사람 되는 도리는 이 가르침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파잠(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 살았던 그는 열 살 때 역시 파잠에 거주하고 있던 계동 전경창의 제자로 입문했다. (전경창에 대해서는 '연경서원 터, 지금 보지 못하면 영영 못 본다' 기사 참조)

서계서원의 외삼문과 서원 사적비
 서계서원의 외삼문과 서원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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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가 27세에 정자를 짓고 환성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환성정은 늘 깨어 있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이주의 자기 채찍이었다. 그는 직접 지은 <환성정기>에 '옛날 서암사의 승려가 날마다 스스로에게 "주인은 깨어 있는가(惺惺否)?" 묻고는, 이어서 "깨어 있다(惺惺)" 하고 대답하는 자문자답을 반복했다. 이것은 옛사람이 항상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방법(常惺惺法)'이라고 밝히고 있다.

환성정은 대구의 초기 정자 문화를 대표하는 여섯 곳 중 한 곳이었다. 1924년에 발간된 <대구읍지>에 따르면, 낙동강 강창나루(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디아크문화관 두물머리)부터 금호강 고산서당(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에 이르는 강변 좌우에는 무려 88개나 되는 정자가 있었다. 그중 전경창·응창 형제의 세심정, 채응린의 압로정, 정사철·광천 부자의 아금정, 이주의 환성정, 이종문의 하목정, 서시립의 전귀당은 초창기에 건립된 여섯 개의 유서깊은 정자였다. 선비들은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시를 읊고 학문을 논했다.

환성정을 사랑했던 이주 선생, 시도 남겨

물론 환성정을 창건한 이주도 자신의 정자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이주가 지은 시 중에는 환성정이 물가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는 작품 '금호범주(琴湖泛舟)'도 있다. 주자의 '무이도가'를 연상하며 지은 듯한 '금호범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江水滔滔逝不休 강물은 도도히 쉬지 않고 흐르고
滿汀琴韻和漁謳 물가에 가득한 거문고 소리 고깃배 노래 소리에 화답하네.
到頭焉用推移力 끝까지 도달하는 데 어찌 옮기는 힘이 필요하겠는가?
最愛中流自在舟 강 가운데 저절로 떠다니는 배가 가장 사랑스럽네.

과거 시험의 부정을 단호히 거부한 이래 다시는 응시를 하지 않았던 꼿꼿한 선비 이주, 일본의 침입이 있자 분연히 창의하여 적들의 침탈로부터 대구 부민들을 지켜내었던 의병장 이주, 1599년 대구향교를 재건할 때 상량문을 지었던 대구 유림의 지도자 이주는 시를 통해 '끝까지 도달하는 데 어찌 옮기는 힘이 필요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자연스러운 존재(自在)가 가장 아름답다(最愛)는 가르침이다.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가족과 지역, 그리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동물다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부정과 속임수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단호히 거부하는 것 또한 사회적 동물로서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시 한 수를 읊는 촉촉한 감수성의 발휘 역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자연스러운 천혜이다.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주 선생, 서계서원에 계신다. 

환성정에는 1900년 최익현 선생이 찾아왔다. 그만큼 환성정은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졌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특히 15세 때부터 무태로 옮겨와 살았던 이주 선생이 <환성정기>에 '(환성정의) 북쪽은 팔공산이 우뚝 섰는데 기암괴석과 구불구불한 산언덕이 모두 와서 따받들고 있는 형상'이라면서 '마치 (주자가 살았던) 무이산의 대은병과도 같다. 주문공(주자)의 시에 "청산에는 옛날처럼 푸른 나무가 많구나(依舊靑山綠樹多)!" 라는 구절이 바로 이곳을 두고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찬탄한 글을 읽고도 찾아볼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더 더욱 자연스럽지 못하다. 자연 속의 서계서원과 환성정을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발걸음, 오늘 당장 실행할 일이다.

환성정. 서원 경내로 들어가는 협문이 환성정 바로옆에 나 있다.
 환성정. 서원 경내로 들어가는 협문이 환성정 바로옆에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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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주, #임진왜란, #이문화, #서계서원, #환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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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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