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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날, 하루 전 모신 아버지(좌)와 이모부입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럽습니다.
 어버이 날, 하루 전 모신 아버지(좌)와 이모부입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럽습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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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날입니다. 어제 90을 바라보는 부모님과 이모님 부부, 저희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하루 앞당긴 거죠. 머리 허연 어른들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모진 삶의 파고를 넘으신 경험이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각설하고, 아들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질풍노도의 시기입니다. 자연 속에서 뛰어놀아야 할 자유분방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하게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에 매진 중입니다. 이런 자식을 보면 부모로서 짠한 마음이 앞섭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 묵묵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바라는 세 가지 소원

"아빠랑 같이 하고 싶은 게 있어."

진지했습니다. 아들이 바라는 게 있었습니다. 뭘까? 이걸 들어 말아? 궁금하긴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기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거라면 좋습니다. 하지만 해 줄 수 없는, 능력 밖의 것이라면 어쩌지 싶으니까. 아버지의 두려움(?)을 눈치 챘을까. 아들은 망설임 없이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희망을 밝혔습니다.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목욕탕 같이 가기.
둘째, 탁구 치기.
셋째, 바둑 두기.

헐, 이런 걸 줄이야! 아들이 원하는 건 별 거 아니었습니다. 괜히 겁먹은 거죠. 해리포터에 나오는 소원,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 부활의 돌, 투명 망토" 정도를 생각했나 봅니다. 아무튼 소박한 소원에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아들도 자기 기준에서 아버지를 판단할 만큼 성장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거침없이 가슴을 열고 다가온 아들이 고마웠습니다. 시(詩) 한 수 읊고 가지요. 임호상 시인의 시집 <조금새끼로 운다>에 실린 '목욕탕에서 2'입니다.

       목욕탕에서 2
                                   임 호 상

멀대같이 키 큰 놈이
샤워기도 많은데
왜 굳이 단신인 내 바로 옆에 선 걸까
물을 튀길 때까진 참을 수 있었다
양치질하는 내게 샴푸 거품을 분사하면서
폭포수 같은 번뇌가 일었다
이런 키 크고 배려 없는 놈
영역을 침범한 그 녀석에게
최대한 온도를 낮춰 차디찬 냉수로 저항했다
파편이 온몸에 박혀 물러설 때까지
격하게 몸을 흔들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입니다. 아마, 시인 임호상 님의 마음도 이랬지 싶습니다.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아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부담스러운 이중잣대 말입니다. 어린 아이로만 봤던 아들이 어느 새 훌쩍 커, 예기치 않게 훅 들어오는 분신에 대한 수놈의 저항은 상대적으로 움츠러든 아버지 자신에 대한 자아성찰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거품'과 '냉수'는 자식에 대한 부모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매화처럼 은은한 향을 지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삶의 향기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님을 알았으면 싶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매화처럼 은은한 향을 지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삶의 향기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님을 알았으면 싶습니다.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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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지난 3월 말부터 타령처럼 흘러나오는 아들의 희망을 마음으로 들어줄 때가 된 겁니다. 아들의 세 가지 희망 '목욕탕 같이 가기, 탁구 치기, 바둑 두기'는 녀석이 어릴 때 함께했던 놀이입니다.

이후 초·중학교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놓았던 것들을 다시 꺼내 든 게지요. 아들은 지난해 말부터 목욕탕 가자고 졸랐습니다. 아들이 '미쳤지' 했습니다. 그리고 뜸을 들였습니다. 이에 대한 주변 반응이 재밌었습니다.

"고등학생 아들이 아빠에게 먼저 목욕탕 가자고 말하는 집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고놈 참 별종이네. 빼지 말고 같이 가잘 때 가. 그게 행복이여."

거부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아들의 바람 중 첫 번째인 목욕탕 함께 가기부터 실행에 옮겼습니다. 껍데기를 훌훌 벗어던진 부자 자체가 그림이었습니다. 늘씬하고 빼빼한 아들. 뒤룩뒤룩 살찐 아버지의 몸은 묘한 대비였습니다. '나도 저 때가 있었지'라는, '나도 저렇게 살이 붙겠지'라는, 위안으로 작용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들이 빡빡 등을 미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이었지요.

세상은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라는 걸 배웠을까?

"이제 아빠 이길 수 있어. 저도 많이 늘었어요."
"엄마랑 더 연습해라."
"엄마는 재미없어. 아빠랑 해야 재밌지."
"더 배우고 와."
"아빠, 나한테 자신 없는 거지?"
"…."

그동안의 실랑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것.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하길 바라는 두 번째 소원인 탁구치기에 돌입했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부터 탁구를 쳤지요. 아무리 멀리했다 해도 구력이 어디 가겠어요. 기본은 있지요. 아버지와 아들, 수놈의 자존심을 내세웠습니다. 당근, 내기를 걸었지요. 집 청소하기와 용돈주기.

어, 놀랐습니다. 몸 풀어 보니 예전 같지 않더이다. 탁구 채가 허공을 가르고. 다리가 따라가질 못하고. 공 줍기에 바쁘고. 세월은 역시…. 반면, 아들은 실력 많이 늘었더군요. 드라이브가 제법 세련됐고, 백핸드도 곧잘 넘기데요. 젊은 패기가 넘쳤습니다. 그러나 탁구는 서브 게임. 스매싱이 보다 서브를 잘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승패가 확연히 갈립니다.

11점, 3세트 시합에 돌입했습니다. 진지한 시합이 몇 조금 못가 실력 차가 드러났습니다. 갈등이 생기대요. 그렇다고 져주자니 아버지 자존심이 문제고, 이기자니 아들의 자존심이 걸렸지요. 너무 빡세게 했을까. 결과는 2대0. 아들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며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세상은 쉽게 그저 얻어지는 게 없지요. 모든 게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라는 걸 배웠으리라!

아들, 아빠에게도 소원이란 게 생겼다

지난 6일 밤, 아들이 원하는 세 번째 바람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지 말입니다. 지난 3월, 세상이 떠들썩했지요. 관심이 온통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대결에 쏠렸으니까. 다름 아닌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한판 승부. 승부사들은 이세돌의 완승을 예견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알파고의 4대1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후 아들은 스스로 '임세돌'이라 자칭하고 나섰습니다. 그랬는데 막상 대국에 들어서려니까 하는 말.

"따 먹는 것밖에 모른다."

아들 녀석은 엄살부터 부렸습니다. 헐, 그거라도 아는 게 어딥니까. 녀석이 유치원 때 일 년 정도 바둑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랬는데 다 잊은 겁니다. 위안 삼았습니다. 배운 거 잊지 않고 다 기억하면 그게 기계지 사람입니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망각의 미학 때문이라지요? 그렇더라도 접바둑도 접바둑 나름. 웬만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재미없지요.

"몇 점 깔아요."
"9점은 깔아야지."

부자(夫子), 바둑판 앞에 앉았습니다. 흑백은 가릴 필요 없었지요. 상수와 하수가 분명하니까. 아들, 얼굴에 웃음기 가득했습니다. 승패를 떠나 아빠와 무언가를 함께하는 즐거움과 행복으로 읽혔습니다. 아내와 딸은 아들의 세 가지 소원 이룸을 축하하면서도 바둑엔 관심 없었습니다. 하수들의 대결에 흥미 있을 턱이 있나. 아들은 정말이지 배웠던 바둑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바둑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망각의 미학이라는 듯...
 아들은 바둑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망각의 미학이라는 듯...
ⓒ 임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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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에 걸쳐 아들 소원을 들어준 소감은 아들에게도 자신만의 철학 세계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승패를 떠나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도전할 수 있는 젊음의 용기를 사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세상에 존재하기 위한 충분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믿음까지 생겼습니다. 그래, 어버이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마음의 편지를 짧게나마 쓸까 합니다.

아들!
너희는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것 같다. 아버지 세대는 혼자만 잘해도 세상 살아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단다. 그러나 너희 세대는 지구 온난화 등 환경 측면만 보더라도 더불어 함께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될 공동 운명체인 듯하다. 삶에 있어서 '살아가는 것'과 '살아내는 것'의 차이를 온몸으로 느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구나. 그래, 겁먹지 말고 당당하게 무슨 일이든 함께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다.

아들, 아빠에게도 소원이란 게 생겼다. 아버지도 언젠가 네게 세 가지 소원을 밝힐 거다. 네가 꼭 들어줬으면 한다. 내가 그랬듯 너도 그래 줄 거라 믿는다. 네가 그랬듯 거창하기보다 소박한 바람일 테니 기대해라. 알았지? 사랑한다, 아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어버이날, #아버지, #아들, #소원, #삶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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