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지리 1348-2번지에 가면 '현풍곽씨 12정려각'이라는 이름의 문화재를 만나게 된다. 이름에서 짐작이 되듯이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29호인 이 문화재는 12개나 되는 정려들이 한 지붕 아래에 들어 있는 장관을 보여준다. 그중 특히 역사적 의의와 애달픈 사연을 짙게 거느리고 있는 것이 바로 곽준 관련 정려이다.
곽준(1550~1597)은 임진왜란 의병장이다. 그는 1597년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중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대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본 장남 곽이상과 차남 곽이후가 그냥 물러설 리 없는 법, 결국 두 아들도 성중에서 죽었다. 곽준의 사위 류문호 또한 이날 전투 중에 죽었다.
전쟁의 처참한 가족사 담고 있는 '현풍곽씨 12정려각'맏며느리 거창신씨도 시아버지와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스스로 자진했다. 딸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이미 알았지만 아직 지아비가 살아있어 내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는데 이제 지아비까지 적들에게 비명에 갔으니 어찌 나 혼자 살아 남을까!" 하며 목숨을 끊었다. 의병장, 두 아들, 사위, 며느리, 딸까지 여섯 명이나 되는 소중한 이들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간 사실을 증언하는 곳, 전쟁의 처참한 가족사가 혈흔처럼 배어 있는 곳이 바로 현풍곽씨 12정려각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매우 드물고 자랑할 만한 곽씨 일가의 죽음' 기사 참조)
그래도 현풍곽씨 12정려각은 도로변에 있어 찾기가 쉽지만, 역시 임진왜란 의병장인 박응성 장군의 묘소는 정말 참배하기 어렵다. 장군의 묘소는 대구시 수성구 욱수골이나 경산시 옥산동에서 성암산 능선을 타고 1시간 30분 또는 2시간을 줄곧 걸어야 닿을 수 있다. 게다가 이정표도 없고, 주소를 검색해도 '대구시 수성구 욱수동'으로만 나오는데다가, 등산로를 비껴난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무턱대고 찾아나서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나 다를 바 없다.
박응성 의병장은 1592년 7월 17일 경북 성주에서 전사했다. 당시 경상우도 의병도대장 김면의 의병군은 성주성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무렵 적들은 배를 타고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이동했다. 의병군은 적선에 실려 있는 군사 장비들과 군량미들을 수장시키기로 결의했다.
아버지와 세 아들이 한 싸움터에서 전사한 박응성 의병장 집안적선들이 나타나자 잠복 중이던 의병들은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전투가 계속될수록 무기와 병사 수에서 맞상대가 못됐던 의병들에게 점점 패색이 쏠렸다. 마침내 의병들은 궁지에 몰렸고, 많은 용사들과 더불어 박응성 의병장과 그의 세 아들 박근, 박장, 박헌이 모두 죽었다. 냉철하게 역사를 기록해야 하는 사가조차도 아버지와 세 아들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적에게 목숨을 잃은 이 비극 앞에서는 눈물을 참을 수 없으리라. (자세한 내용은
'세 아들과 함께 전사한 박응성 의병장' 기사 참조)
세종시 연동면 예양리 21(미꾸지길 9-3)에도 현풍곽씨 12정려각과 박응성 가문 묘소에 버금가는 임진왜란 유적이 있다. 흔히 '밀양박씨 오충정려'라 부르는 '오충각'이 바로 그것이다. 현지 안내판에는 '밀양박씨 오충정려'로 소개되어 있고, 비각 현판에는 '五忠閣(오충각)'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런가 하면, 도로변에는 '양세 오충각' 다섯 글자가 적혀 있다. '양세'는 부모와 자녀의 두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양세 오충각은 한 집안에서 부모와 자녀 다섯 명이 나라에 큰 충성을 보여주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부르든 이 비각은 박천붕((朴天鵬, 1545-1592)과 그의 네 아들을 기려 세워진 정려이다. 1747년(영조 23) 원하리에 처음 세워졌는데 1920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당시 일제가 아주 없애버리려 든 것을 지역 사람들이 강력히 항거한 끝에 이곳으로 이전, 보존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스승을 따르느라 벼슬을 버리는 박천붕박천붕은 27세이던 1571년(선조 4) 무과에 장원 급제한 이래 한양에서 관직에 있었는데 1587년(선조 20)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온다. 스승인 조헌이 선조와 충돌한 후 낙향하게 되자 뒤따라 관직을 버리고 내려왔던 것이다.
이미 1586년(선조 19) <만언소>를 올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의 잘못을 통타했던 조헌은 그 이듬해인 1587년 일본 사신을 받아들이지 말 것과, 동인이 나라를 잘못 이끌고 있다는 소(疏, 건의문)를 올린다.
조헌은 "지금의 시장 마을이나 외진 여염의 늙은이와 어린 아이가 모두 당대의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今之市里窮閻 白叟黃童 皆謂當代之有君無臣). 적국의 첩자가 이 말을 들으면 해됨이 어찌 적겠습니까(若使敵國觀兵者聞之 其害豈淺淺哉)? 그런데 (영의정) 이산해가 한 번도 듣지 못하였다면 이는 귀와 눈이 없는 것이고, 알고서 고치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임금을 저버린 것입니다(而山海一不聞之 則是無耳目者也 知而不改 則是負君父者也). 귀와 눈이 없는 죄는 가볍고 임금을 저버린 죄는 큽니다(無耳目之罪輕 負君父之罪大)" 하고 통탄한다.
조헌의 직선적인 건의를 본 선조가 크게 역정을 낸다. 선조는 조헌의 소를 불태워버리라고 명령한다. 그후 조헌은 임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다.
스승을 따라 임진왜란 의병이 되는 박천붕박천붕은 스승을 도와 종군한다. 하지만 청주 상당산성에서 전사한다. 안내판은 '박천붕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스승 조헌이 거느린 의병과 함께 전쟁터로 나아갔다. 왜적에 대항하여 힘을 다해 싸웠으나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박천붕의 용기있는 죽음으로 의병들은 다시 힘을 내어 다음날 청주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이후 왜적의 기세를 꺾은 첫 승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참고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 기술되어 있는 조헌의 활약상을 잠깐 살펴본다.
'호서의병장 조헌은 5월 21일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보은을 거쳐 충청도 서남지방에서 추가로 모병하여 군세가 1천 명에 이르렀다. 이와 동시에 승군장 영규가 궐기하여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조헌은 영규의 의병군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 하치스가 이에마사)의 일부 병력이 청주성을 쳐서 (충청도 방어사) 이옥을 패퇴시키고 성에 머물고 있었다. 8월 1일 조헌의 지휘하에 영규 그리고 이옥군이 성을 파상적으로 공격하니 일본군이 견디지 못하고 밤 사이에 후퇴하였으므로 성을 수복하였다.'<신편 한국사>는 조헌의 이후 활약상도 보여준다.
'조헌은 이후 북상하고자 하였으나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의 간곡한 요청에 의하여 금산의 적을 치기로 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1차의 금산전에서 타격을 입었으나 무력화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금산에 있던 일본군을 견제하려고 보성과 남평현의 관군이 북으로 진군하려다가 적에게 엄습을 당하여 남평현감 한순이 전몰하게 되자 관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조헌은 권율에게 서신을 보내 금산성 공격일을 8월 17일로 결정하였음을 알리고 양군이 서로 합세할 것을 제의하였다. 겨우 2천에도 이르지 못한 조헌과 영규의 의병군이 1만 5천여의 일본군을 정면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무리였기에 조헌의 부장이나 영규 등이 전투의 연기를 건의하였으나 조헌은 이를 거부하고 16일 금산성 외곽에 진출하였다. 일본군은 공격군이 소수임을 보고 18일 성을 나와 조헌의 의병군을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대장과 죽음을 맹세한 7백 명의 용사 그리고 영규의 부하까지 혈투를 계속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끝내 패하고 말았다.일본군도 이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어 마침내 금산성에서 철퇴하여 상주 방면으로 돌아갔다. 무주와 옥천에서 원호하고 있었던 일본군도 어찌할 수 없이 잇따라 철수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고경명, 조헌의) 2차에 걸친 금산전투의 결과라 할 것이다.'아버지 박천붕이 장렬하게 전사하던 그 무렵, 네 아들들은 아직 두 살부터 열한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었다. 이제 두 살밖에 되지 않은 막내 의겸(義兼, 1591-1637)은 말할 것도 없고, 삼남 예겸(禮兼, 1586-1637)이 일곱 살, 차남 인겸(仁兼, 1584-1637)이 아홉 살에 지나지 않았고, 장남 원겸(元兼, 1582-1637)도 열한 살에 불과했다.
네 아들의 타계 연도가 모두 1637년이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주는 조짐으로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안내판은 '그(박천붕)의 네 아들 원겸, 인겸, 예겸, 의겸 역시 1636년 병자호란에서 충청병사 이의배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이들은 "남쪽 왜적이나 북쪽 오랑캐나 비록 종자는 다르나 우리나라를 침범한 원수임은 매한가지이니 부친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수치를 씻겠다"면서 싸움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1637년(인조 15) 1월 9일 검천 죽산산성 싸움에서 적병에게 포위되어 전사하였다'라고 말한다. 아버지에 이어 네 아들 또한 외적과 싸우다 목숨을 던졌던 것이다.
아버지 따라 외적과 싸우다 죽는 네 아들안내판은 본문 뒤에 '정려 : 나라에서 충신, 열녀 등이 살던 마을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새워 표창하는 일'이라는 부연 설명을 붙여 두고 있다. 이때 나라는 조선의 조정을 말한다. 조정은 임금과 대신들이다.
박천붕과 그의 네 아들이 침입해 온 외적과 싸우다 죽은 이래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조선 조정은 곽준, 박응성, 박천붕과 같은 의사들을 기려 정려를 세웠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장렬하게 목숨을 던진 선조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오충각 주변에는 주차장도 없고, 매연과 비바람에 찌든 도로변 이정표는 낡은 얼굴을 한 채 찡그리고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