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감독당국이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시중은행에게 일방적인 지원을 요구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은행장들을 갑자기 불러놓고 협조를 요청한 것은 사실상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 것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13일 은행들은 진웅섭 금융감독원장의 뜻을 따르겠다면서도 당혹감을 표했다. 또 대우조선해양의 채권은행으로서 여신규모가 커 부담스럽다는 입장도 내비쳤다.
지난 12일 진 원장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농협·KEB하나·우리은행장 등과 조찬을 가졌다. 금융권에 따르면 진 원장은 은행장들에게 "현재 진행 중인 주채무계열(대출이 많아서 은행이 특별 관리하는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를 취약업종을 중심으로 엄정하고 신속하게 평가해 달라"고 당부했다. 재무구조가 취약하거나 부실징후가 있는 기업을 분류해 구조조정 절차를 밟게 하자는 것이다.
모임 2,3일 앞두고 통보... 구조조정 협조 압박또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서는 "채권은행들이 협조를 잘해야 한다"며 "채권단끼리 신속하고 빨리 정리를 해서 긍정적인 측면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찬모임은 금감원 쪽에서 모임을 불과 2~3일 앞두고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은행권 관계자는 "진 원장이 원래는 7곳의 은행장을 불렀는데 갑자기 약속을 잡아 시간이 안 된 은행장 들이 많았다"며 "결혼식 참석 때문에 오지 못한 은행장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진 원장은 구조조정에 대한 입장도 전달하고 조선·해운의 익스포져(Exposure·위험노출액)가 많으니 충당금을 쌓아놓으라는 등 허심탄회한 발언을 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은행장들 입장에서 보면 다르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현재 정부와 금감원 등은 부실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추진 중이다. 은행 등 채권금융기관의 자율에 맡기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은 현재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며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은 구조조정 절차에 돌입했다.
은행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충당금을 쌓고 기업신용평가를 다시 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설 뜻을 내놨다. 또 대우조선해양의 여신에 대해 적잖이 신경쓰는 모습을 보였다. 농협·KEB하나·우리은행의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여신은 각각 1조4950억 원, 8650억 원, 4880억 원 순이다.
농협은행 쪽은 "내부에서 충당금을 내놓고 (구조조정에) 지원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에 지원한 자금이 1조4000억 원이 넘어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는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충당금 규모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며 "그 쪽의 입장도 들어봐야 하고 재무제표도 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은행권 관계자는 "금융당국의 발언으로 규제도 많고 부담으로 돌아오는 것도 많지만 얘기할 수 입장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은행은 당국이 기침만 하면 감기에 걸리는 상황이라 좋고 싫고의 문제를 떠나 그냥 따라야 한다"며 "구조조정 지원에도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하나은행 쪽은 "당국에서 발언이 나왔으니 재점검에 나설 것"이라며 "대기업 여신은 지난해에 비해 줄어들고 있지만 다시 면밀히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아직 여신을 줄인다는 등의 계획은 없는 상황이며 기업신용평가 등도 다시 할 수 있는데 정해진 것은 없다"고 했다.
우리은행 쪽은 "주채권은행이자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 등의 의사판단이 중요하다"며 말을 아꼈다. 이 관계자는 "이들 은행의 결정을 지켜보고 판단할 것"이며 "국책은행의 주도하에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임의적인 행동은 쉽지 않다"고 했다. 대기업 여신 역시 두고 보겠다는 입장이다. 우리은행의 대기업 여신 비중은 지난 4월 기준 22조 9 억원으로 업계 최상위 수준이다. 그는 "문제가 있는 기업 여신은 내부적으로 판단 하에 대책 등을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 원장이 은행에 지나친 압박 가하고 있다"이와 관련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무역학과 교수)은 진 원장이 은행에 지나친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은행에 대해 "미래를 알 수 없는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에 동참하는 것은 예금자 의무를 위배하는 등의 소지가 있어 크게 망설이고 있다"고 했다.
은행은 주주나 예금자에 대한 보호 의무를 갖고 있는 금융기관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에 나설 이유가 크지 않으며 보수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 김 소장은 "이런 상황에서 금감원장은 은행장들을 갑자기 불러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했다"며 "은행의 입장에서 보면 요청이 아닌 비틀림을 당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 시중은행이 진 원장의 발언에 휘둘리지 말 것을 조언했다. 김 소장은 "시중은행들은 금융감독 당국이 팔을 비틀어도 독자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시중은행 경영진의 신중한 판단이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대우조선해양의 등급을 낮춰 재분류할 경우 추가 충당금 문제가 터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대우조선해양은 대다수 은행권 여신에서 '정상'으로 분류돼 있다. 김 소장은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로 가면 대손충당금에 대한 적립 부담이 급증한다"며 "충당금 적립이 늘어나면 그만큼 순이익이 감소해 시중은행의 수익안정성 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