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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어느 날 새벽, 영혜는 무엇에 홀린 듯 얼빠진 채로 부엌 냉장고 앞에 서서 말한다. "꿈을 꿨어" 그리고, 그 순간을 시작으로 고기를 일체 먹지 않는다. 큼지막하고 네모난 정육점 칼로 닭 한 마리는 우습게 손질할 정도로 여러 가지 고기 요리들을 거침없이 잘 했으며 또 고기 요리를 즐겼던 그런 영혜가.

가족 모임이 있던 날, 친정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은 저마다의 생각대로 영혜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영혜를 가족 누군가 꼼짝 못하게 붙잡고, 크게 분노한 친정아버지가 영혜의 입에 고기를 강제로 쑤셔 넣는 일이 일어나고 만다. 그에 영혜는 과도로 자해를 하고 만다. 그리고 병원.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창비 펴냄) 첫 번째 이야기인 '채식주의자', 그 대략의 줄거리다.

 <채식주의자> 책표지.
<채식주의자> 책표지. ⓒ 창비사
표제작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영혜의 남편, 너무나 평범한 것이 장점인 영혜가 어느 날 괴이한 꿈을 꾼 후 허물어져가는 과정을, 그리하여 일반 병원에서는 치료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는 과정을 남편을 통해 들려준다.

다이어트 때문인가. '채식주의자'란 제목을 본 순간부터 52~53쪽을 읽기 전까지는 솔직히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화자인 나(남편)의 표현대로 '광대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영혜가 채식을? 아마도 그렇다면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관념 그런 것 때문에? 그럼 이 소설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은 소설인가, 싶었던 것이다.

소설은 어느 날부터 영혜를 덮친 섬뜩한 꿈들과 영혜의 의식들을 글씨체를 달리해 들려준다. 52~53쪽의 영혜의 어린 시절 기억 하나.

'어느 날 우연히 주인집 딸인 나 영혜의 다리를 물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만 했던, 주인집 딸을 물기 전까지 영리하다고 동네사람들 칭찬이 자자했던 우리 개 흰둥이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처참한 죽임을 당한다. "달리다 죽은 개가 고기 맛도 좋다"는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근거 없는 말 때문에 오토바이에 매달려 동네를 일곱 바퀴째 도는 동안 살점이 툭툭 터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대문간에 서서 오토바이에 묶일 때부터 그 개가 죽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봤던 아홉 살 영혜는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죽인 개로 잔치를 벌이며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그 개의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말에 얼떨결에 흰둥이의 살 한 점을 얻어먹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뚝딱 비울 정도로 흰둥이의 살을 맛있게 먹었었다. 오래전에.'

소설 속 그녀의 가족들 역시 나처럼 '다이어트 때문에 영혜가 고기를 안 먹는 것으로' 모두 그렇게 단정하고 만다. 그리하여 "다이어트도 좋지만 건강하게 살려면 고기를 먹어야"를 설득하는 데 급급할 뿐이다.

아무도 그 이유를, 영혜의 아픔을 들어보려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버지는 억지로 고기를 쑤셔 넣는 폭력까지 행사하고 만다. 그렇게 영혜의 가족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영혜를 몰아가는 폭력을 행사한다.

아니 딱 한 사람 그녀의 형부는 침묵한다. 이 연작소설 두 번째 이야기 '몽고반점'에서 처제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남아 있다는 몽고반점에 성적 희열을 느끼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처제의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삶과 예술혼이 활활 불타오르는 형부. 영혜가 자해하는 순간 자신 안에 있던 무언가 소중한 것이 훅 빠져나가는 상실감에 다급해져 자해로 피가 낭자한 처제를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순식간에 업고 달린 그 형부만 빼고 말이다.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질문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았을까. 그걸 대체 말이라고 하느냐고, 온힘을 다해 화라도 냈어야 했을까.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 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아이들을 패주고 다닌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 <채식주의자> 세 번째 이야기 '나무 불꽃'에서.

<채식주의자>는 남편과 형부 그리고 언니의 시선으로 담아낸 영혜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두 번째 '몽고반점'은 처제인 영혜를 특별한 느낌으로 생각한 형부가 화자고, 세 번째 작품 '나무 불꽃'은 두 번째 이야기인 '몽고반점'에서 남편과 동생의 불륜을 목격했음에도 모든 것들을 안고 살아야 하는 언니가 화자다.

자신이 나무가 되어가고 있다고 착각하며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그렇게 죽음 가까이로 가는 동생 영혜를 어떻게든지 지켜내려는 언니의 절망과 자책 그리고 영혜처럼 또 다른 폭력으로 상처받아 고통스러운 자신의 아픔을 들려준다.

<채식주의자>에는 국가의 어떤 명분 때문에 개인이 사람 일곱을 죽이는 폭력을 비롯하여 여러 성질의 폭력들이 내포되어 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베트콩 일곱을 죽였다는 사실을 눈을 빛내며 말할 정도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런 아버지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모두를 오랫동안 폭행한다. 아홉 살 영혜가 해질 무렵의 숲 속에서 길을 잃은 것보다 집에 돌아가는 것을 더 무서워할 정도로 끔찍한 폭력.

"달리다 죽은 개의 고기가 맛있다"는 허무맹랑한 이유만으로 한 생명을 더욱 처참하게 죽이는,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매달고 달리다 죽이는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의 폭력은 또 얼마나 잔인한가? 그런데 무서운 사실은 그런 것들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누군가 그 폭력을 당연하게 배우고 그러면서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채식주의자>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은 왜 <채식주의자>를 최종 후보작품으로 지목했을까?

아마도 국가의 어떤 명분 때문에 개인이 배워야만 했던, 그럼에도 훈장으로 합리화된 폭력과 살인이 개인의 삶에 스며들어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하여 누군가의 삶 또는 영혼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자칫 모르기 일쑤인 내 안의 폭력을 알아차리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

맨부커 상 최종 수상작은 17일(우리 시간) 새벽 발표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채식주의자>(한강) | 창비 | 2007-10-30 | 정가: 12,000원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창비(2007)


#폭력(가정폭력,아동학대)#맨부커 인터내셔널 상#몽고반점#나무 불꽃#소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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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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