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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철부지 젊은 남녀는 서로에게 씌어준 '특별한 안경' 덕분에 하나의 가정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안경에는 예상치 못한 허점이 숨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경의 초점이 흐려졌다.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려면, 처음 그 순간의 설렘이 필요한데, 그 시절로 돌아갈 타임머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더구나 살다보면 서로의 민낯을 확인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뿌옇게 흐려진 안경 너머의 세상에서는 장점으로 여겼던 성격이 어느새 단점으로 둔갑해 있었다. 때아닌 착시 현상인가 싶어 찬찬히 들여다봐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동질감에서 시작된 서로에 대한 호감은 달라도 너무 다른 반감으로 변해 있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술렁거리는 마음 속에서 아름다운 언어가 피어날 리 없다. 티격태격, 서로의 가슴에 못질을 해대는 망치 소리로 소란스러운 날들이 이어졌다.

부부 싸움 이후로 찾아드는 감정은 슬픔 말고도 다른 감정이 있었다. 어렸을 적 부모의 다툼을 바라볼 때면 짧은 공포영화처럼 느껴졌던 순간들이 떠올라서였다. 엄마가 나를 끌어안고 울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우리 아이들은 어떤 기분일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열심히 인터넷 서점을 뒤졌다. 혹시 부모 때문에 마음 아픈 아이들을 소재로 한 그림책은 없을까.

그때 이 그림책을 만났다. 그림책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책장을 넘기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까르르 박장대소를 터트리자, 아이가 달려와서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던 것도.

 정말 안 맞는 부부. <따로 따로 행복하게>
정말 안 맞는 부부. <따로 따로 행복하게> ⓒ 보림

강렬한 첫인상으로 기억되는 그림책 <따로 따로 행복하게>는 부부가 헤어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림책의 공간으로 불러들이기에는 다소 무거운 주제여서 웬만한 필치로는 풀어내기 어려울 텐데... 하는 건 어디까지나 나의 기우에 불과했다. 과감한 시선으로 세밀한 구석까지 묘사해놓은 그림책 속 부부의 이야기는 포복절도의 코미디였다가 가슴 찡한 다큐로 다양한 감정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림책 속 부부가 사는 집은 서로 다른 취향과 개성으로 얼룩진 시장골목 같다. 아빠가 소를 키우면 엄마는 말을 사다놓았다. 아빠가 꿀벌을 키우면 엄마는 식충 식물을 길렀다. 엄마는 아빠에게 집수리를 하라며 잔소리를 퍼부었고, 아빠는 엄마가 만든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는 서쪽 방에 사는 아빠네 친척 아주머니들이 싫었고, 아빠는 엄마랑 같이 말을 타러 다니는 왈가닥 아줌마들이 보기 싫었다.

아빠는 엄마 몰래 목욕 소금에 시멘트 가루를 섞었다. 회색빛 욕조 속에 몸을 담근 엄마의 두 눈은 뾰족한 삼각형으로 변했다. 복수를 벼르던 엄마는 아빠가 먹을 음식에 폭죽을 넣었다. 아빠가 포크를 든 순간, 눈앞에서 불꽃이 펑펑 터졌다. 고소해 죽겠다는 엄마의 웃음도 팡팡 터졌다. 쫓고 쫓기는 숨찬 릴레이가 격렬하게 이어졌다.

만날 싸우는 아빠, 엄마... 혹시 우리들 때문에?

<따로 따로 행복하게>의 겉표지 배빗 콜 지음/ 고정아 옮김
<따로 따로 행복하게>의 겉표지배빗 콜 지음/ 고정아 옮김 ⓒ 보림
어느 날, 드미트리어스와 폴라는 부모의 싸움이 자신들 때문은 아닌지 고민이었다. 두 아이는 학교 알림판에 커다란 게시물을 붙였다. 그 게시물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엄마 아빠 때문에 골치 아픈 사람 오늘 오후 1시 30분에 탈의실에 모이자!"

두 아이의 예상을 깨고 구름떼처럼 몰려든 같은 학교 친구들. 화가 난 것도 같고, 슬픈 것도 같고, 몹시 지쳐있는 것도 같은 아이들은 사뭇 진지했다. 마침내 아이들이 내린 결론은 명쾌했다. 엄마 아빠가 다섯 살 배기 어린애처럼 구는 게 아이들 잘못은 아니라고.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두 아이는 매일 싸우는 엄마 아빠를 위해 기상천외한 작전을 세운다. 그 이름도 기발한 '엄마 아빠의 끝혼식'. 두 팔 걷어붙이며 아이들이 치러주는 끝혼식의 풍경은 어떨까.

마을 교회 목사님의 주례와 검정색 드레스, 검정색 웨딩케이크까지. 그 격식과 절차도 결혼식만큼 성대했다. 모든 하객의 만장일치로 진행되는 이 부부의 '끝혼식장'에는 싱글벙글한 웃음과 쨍쨍한 박수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따로따로 '끝혼 여행'을 떠난 비행기 두 대가 푸른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올랐다.

두 아이는 엄마 아빠의 '끝혼 선물'로 살던 집을 포클레인으로 밀어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두 채의 집이 들어섰다. 한 채는 엄마 집, 한 채는 아빠 집. 두 아이만 지나다닐 수 있는 비밀 통로가 두 집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젠 뭐든 두 배였다. 엄마 따로 아빠 따로 살았지만, 집도 부모님도 두 배로 많아졌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이 부부의 만행에 키득키득 웃음이 났지만, 그 뒷맛은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결혼 생활이 계속될수록 변화되는 부부의 얼굴 표정을 보여주는 그림 앞에서는 "으악! 이건 나잖아!" 하는 생각에 소름까지 돋았다. 이 작가도 꽤나 결혼 생활이 힘들었나보군, 하는 엉뚱한 상상마저 들었다.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바라보는 주인공 아이들의 독특한 시선은 그림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작용할까. '끝혼식'을 진행하는 주체자로 아이들을 내세운 다소 황당한 설정에 어리둥절했지만, 그 아찔함은 격한 공감으로 금세 바뀌었다. 그림책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었고, 그림책의 마법 같은 상상력은 현실 세계의 장벽을 뛰어넘는 매직 월드이지 않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그리운 현실. 나는 이 그림책의 세계를 믿고 싶었다. 어른들의 문제로 상처만 받는 아이들이 아니라, 그 상처를 딛고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이들만의 순수한 상상력을 마음 깊이 신뢰했다.

이 그림책의 원래 제목은 <TWO OF EVERYTHING>이다. 모든 것의 두 가지. 세상 모든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사랑 아니면 미움, 기쁨 아니면 슬픔. 하지만 살다보면 이 두 가지가 확연히 분리되는 경우란 드물다.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감정을 느껴보지 않은 연인이 어디 있으랴. 슬프다가도 기쁘고, 기쁘다가도 슬픈 게 인생이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양면성이 오히려 판단을 흐릿하게 할 때가 있다.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고 자신도 모르게 어정쩡한 상황에 빠져든다. 그 순간 'TWO OF EVERYTHING'은 회초리처럼 정신을 번쩍 뜨이게 한다.

슬플 때는 슬픔만, 기쁠 때는 기쁨만 생각하기. 좋으면서 싫은 척하지 않고, 싫으면서 좋은 척하지 않기. 불안한 진동으로 매일 흔들리는 마음속에 세워둘 이정표로 이만한 것은 없을 성싶다. 그건 좋음과 나쁨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켜주는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수만 개의 갈래로 뒤엉켜있는 것 같지만, 이 그림책 작가는 말한다. 그건 단지 복잡하게 보일 뿐, 실제로 세상 모든 것은 딱 두 가지로 나눠진다고. 어린 아이들도 알아챈 삶의 이정표를 부디 잊지 말라고. 어쩌면 이별보다 더 슬픈 것은 헤어지지 못하고 서로를 괴롭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014년 기준 하루에 평균 315쌍이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혼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한부모가정을 비정상적인 가정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이 그림책에서 '이혼'을 '끝혼'이라고 한 것도 어쩌면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에 대한 저항의 표현일지도.

이 책 뒷면에는 아동문학 연구가 김세희씨가 전하는 당부의 글이 짤막하게 수록돼 있다. 이혼을 어른들만의 문제로 쉽게 단정 짓지 말고, 그 상황을 아이에게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혼 문제는 서로 다른 가정 문화에 대한 이해로 접근해야하며, 이는 우리 사회가 더불어 사는 사회로 발전하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함께라서 행복하지만, 따로따로여서 행복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함께'나 '따로'라는 형식이 아니라, 어떻게 삶의 만족을 느끼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가치관일 것이다. 그림책의 따뜻한 상상력이 구현해내는 세상에서는 어떤 방식의 삶을 선택하든 격려해주는 밝은 미소가 아름답게 피어난다.

'엄마 아빠만 싸우는 게 아니야'라는 방패막이로 아이와 함께 읽었던 그림책이었지만, 그 수상한 의도를 뛰어넘어 깊은 밤 짧은 단편 영화처럼 위로를 안겨주었던 나만의 그림책 <따로 또 같이>. 이 그림책을 덮고 나면, 타인의 시선에 주눅 든 발자국 말고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발자국으로 삶의 지도를 그려나가라는 당부가 생생하게 귓전을 맴돈다.

덧붙이는 글 | <따로 따로 행복하게> 배빗 콜 지음/ 고정아 옮김/ 보림/ 값 9500원



따로 따로 행복하게 - 3~8세

배빗 콜 지음, 보림(1999)


#한부모가정#그림책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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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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