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찔레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애기똥풀 사이로 난 길을 걷고 있다. 그와 함께 그 길을 걷는 이는 다혜농원 김정자(53)씨다. 5월은 이제막 여름으로 넘어가려는 듯 무더우면서도 아직은 봄의 끝자락이라는 듯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다.
지난 17일 이른 새벽 <소년이 온다>의 작가 한강의 작품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어지는 뉴스는 이번 상과는 관계가 없지만 한강 작가의 광주를 다룬 <소년이 온다>도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는 소식. 보훈처가 여전히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불허한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당사자인 우리만 광주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자뭇 슬프다.
괴물 같은 분단이 만들어낸 이념몰이는 광주뿐만 아니라 세월호까지도 이념논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애도하지만, 당사자인 우리 안에는 그 아픔을 증오하도록 부추기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이 모든 것들을 품을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한다면, 너무 추상적인 말일까? 그래, 그 흔한 사랑말고 깊은 사랑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다.
애기똥풀 사잇길로 찔레꽃 향기와 함께 걷는 김정자 씨가 가는 곳은 그의 농원(다혜농원)이다. 그는 농원에서 남편 박찬흥(56)씨와 함께 30년 넘게 러브체인을 키워왔다. 농원에 들어서자 작은 걸이화분마다 심장 모양의 이파리를 간직한 러브체인이 그득하다. 사랑을 상징하는 하트모양의 이파리들이 줄줄이 매달렸다.
신혼 초에 친구가 러브체인을 집들이 선물로 주면서 "부부금실이 좋으면 러브체인이 잘 된다"라고 했다. 몇 개월간 잘 자라다가 시들시들 말라버렸다. 몇 개월만에 사랑이 식어버린 것일까? 아니, 불 같은 사랑은 아닐지언정 지금 30년 가까이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으니 러브체인이 말라죽었다고 우리의 사랑도 그리된 것은 아닐 터이다.
화원을 지나다 러브체인을 만났다. 얼마나 실하게 자랐는지 이번에는 잘 키워보고 싶었다. 마음 한켠으로는 이제 갱년기를 맞이하는 아내와 뒤늦게 사랑을 꽃피우리라는 마음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화분 몇 개를 구했는데, 창가에 걸어두고 정성을 쏟았더니만 제법 잘 자라주고 있다.
물론, 러브체인이 자란 만큼 우리의 사랑도 자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을 키우면서 몇 가지 알지 못하던 사실을 알았는데, 러브체인이 단지 이파리모양만 닮아서 러브체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트모양의 이파리 사이로 줄기들이 서로 엉키면 여간해서 쉽게 풀지 못한다. 마치 얽힌 실타래 같아서 잘못하면 줄기가 끊어지기도 한다.
'체인(사슬)의 의미가 이런 것이구나'라는 단상. '사랑은 그렇게 끊어내기 힘든 것이고, 강제로 끊어내려고 하면 줄기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대견해 했다.
그런데 '러브체인'을 전문적으로 키우는 '다혜농원'을 알게 되었고, 그곳을 마실 삼아 찾아가게 된 것이다.
농원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러브체인은 생각보다 키우기가 까다로운데 음악을 틀어주면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식물도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들은 식물학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정되는 이야기이고, 나도 개인적으로 식물도 음악을 듣고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다고 믿는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러브체인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도 수출을 한단다. 박찬흥, 김정자 부부는 러브체인에만 30년 이상 매달렸으니 그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달인일 터이다.
내가 러브체인을 키우며 생각했던 단상을 이야기하자, 자신들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러브체인을 키우면서 삶의 철학으로 삼은 이야기들을 하나 둘 꺼내놓기 시작한다.
아내 김정자씨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남편인 박찬흥씨는 연신 밭을 오가며 상추며, 부추를 뜯어오고, 방금 낳은 청란이라며 따끈따끈한 청란을 가져왔다.
"부끄러워서 그래요."반 세기 이상을 살았음에도 아직도 사람을 만나면 수줍어한다는 말에 '이제 막 싹을 틔우는 러브체인'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금 덜할지언정 아내 김정자씨도 마찬가지였다. 수줍게 웃고, 마냥 선하고, 뭐 하나 더 챙겨줄 것 없나 챙기는 모습에서 마치 오랜 벗을 만난듯한 정을 느낀다.
러브체인을 번식하는 방법 중 하나는 줄기를 잘라서 심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기 위한 과정에서 아픔은 필수라는 것, 그것이 러브체인을 키우면서 배운 삶의 철학 중 하나라고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이파리가 물을 너무 오랫동안 머금고 있으면 녹아버려서 물을 줄 때에도 주의를 하지만, 물을 주면 화분에서 물이 금방 빠져나간단다. 그렇게 금방 물이 빠져나가도 러브체인은 자라난다는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라지만, 그들은 결코 그들을 배신하지 않고 자라나고 어느 순간에는 최상의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천천히 기다리는 삶, 느릿의 삶을 체득했단다.
셋째는, 그러나 견디지 못할만큼의 결핍은 러브체인에게 치명적이므로 농원을 가꾸는 입장에서는 결핍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가장 자라기 좋은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자들이 약자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것, 더는 뒤로 물러날 곳이 없는 이들에게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라며 그들의 설 땅을 빼앗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수줍은듯 어린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웃음을 지어가며 너무 순박해서 이 세상에서는 살아가기 힘들 것 같은 두 부부가 러브체인과 30년을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30년, 그들과 함께하다 보니 그들을 닮았을 것이다.
러브체인의 고향은 남아프리카인데 생육 조건만 갖춰주면 여간해서는 죽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번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생명력이 강하면서도 급속하게 우리의 산야로 번져나가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외래종이 될 가능성은 제로라고 하니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하는 식물인 셈이다. 두 부부는 그들을 닮았다.
인터뷰 말미에 두 부부의 사진을 담으려 하는데, 얼마나 쑥스러워 하는지…. 쉽지 않았으나 또한 어지간해서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도 못하는지라 허락한다. 그러나 그 모습에는 여전히 쑥스러운 모습이다. 사진을 화면으로 보여주니, 손이 정말 어색했다고 한다.
문득, 수줍음을 많이 타던 시절에 대중 앞에서면 손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당황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심성을 오십 중반을 살아가는 이 때에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니 참으로 필자로서는 오랜만에 사람다운 사람을 만난 셈이다.
돌아오는 길, 찔레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여전히 애기똥풀 사이로 난 길을 걷고 있다. 마음이 한결 푸근해져서 차에 앉았건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은 여전히 아픈 소식들이다. 내일이 그 날인데, 도대체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막으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이들은 도대체 사랑이 뭔지는 아는 이들일까 싶다. 국가보훈처에 러브체인이나 한 박스 보낼까 싶은 허망한 생각도 해본다.
러브체인 30년 키우다, 득도한 부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5월의 햇살이 뜨겁다. 그 뜨거운 5월의 햇살 아래서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밭일을 했을 어머니, 5월의 광장에서 쓰러진 5월의 영령들, 그들 모두가 이젠 평안히 쉬게 하는 것이 남은 자들의 할 일이 아닐까?
사랑, 사랑이 여전히 부족하다. 사랑은 넘쳐나는데 사랑 아닌 사랑만 넘쳐나고, 사랑이라는 단어만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