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조지훈문학관 전경
조지훈문학관 전경 ⓒ 박도

조지훈문학관

영양 읍내를 떠난 택시가 10여 분 달리자 주실마을이 나왔다. 마을 어귀 주차장에 내리자 그곳에 '조지훈문학관'이 있었다. 문학관을 들어서자 먼저 선생의 근엄한 흉상이 맞았다. 우리는 모자를 벗고 깊이 묵념을 드렸다. 선생의 옥음이 들리는 듯했다.

"고맙네."

곧 실내에서는 자동으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선생의 '승무'를 한 여성 아나운서가 낭랑히 낭독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대학 1학년 작문시간 마다 선생이 당신의 자작시를 낭독하시던 그 굵은 음성이 클로즈업 되었다. 여성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내 마음 깊이 남아있는 선생의 옥음에야 견줄 수 있으랴.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 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1950. 9. 26.)
- 조지훈 '다부원에서'

 경북 칠곡 다부동전직지에 있는 '다부원에서' 시비 앞에서(2011. 10.)
경북 칠곡 다부동전직지에 있는 '다부원에서' 시비 앞에서(2011. 10.) ⓒ 박도

내 소설의 창작 모티브가 되다

이 시는 선생님께서 한국전쟁 당시 종군 시인으로 포연 속에 쓰신 시로 강의실에서 들었던 작품이다. 대학 재학시절 이 시에서 받은 감동이 후일 나의 장편소설 <약속>의 창작 모티브가 되었다. 나는 그 작품을 선생님 대신 아드님에게 보내드렸다.

선생님의 장편 소설 <약속>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멀리 이곳까지 보내주신 선생님의 친절하신 배려와  수고에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드립니다. 평생을 두고 꼭 쓰고 싶은 작품이었기에 탈고의 기쁨 또한 크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고인이 되신 두 스승(저의 선친과 정한숙 선생님)께서도 하늘나라에서 흐뭇한 미소로 격려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고 늘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름다운 글로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 뉴욕에서 조광렬 올림

조지훈 문학관에는 선생의 생애를 잘 압축해 놓았다. 특히 옆방에는 선생의 부인이신 서예가 김난희 여사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거기에는 남편의 시를 당신이 손수 한 자 한 자 단아하게 써서 액자에 담아두었다. 그 가운데 초기의 시 '완화삼(玩花衫)' 한 편만 사진으로 보여 드린다.

 김난희 여사의 서예 작품으로 남편의 '완화삼'을 쓰다.
김난희 여사의 서예 작품으로 남편의 '완화삼'을 쓰다. ⓒ 박도

조지훈 문학관을 나와 생가로 가자 온통 주실마을은 새로 단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몇 집 살고 있지 않아 나그네 마음이 아팠다. 어디 이 마을뿐인가. 그동안 우리 농촌 마을에는 사람들이 떠나 폐가가 속출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그래도 이 마을은 위대한 시인을 낳은 마을로 지자체에서 잘 가꾸고 있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주실마을 길섶의 모란꽃이 주인 대신 나그네를 반겼다.
주실마을 길섶의 모란꽃이 주인 대신 나그네를 반겼다. ⓒ 박도

호은종택(壺隱宗宅)

거기서 100미터 마을을 관통하자 선생의 생가 호은종택(壺隱宗宅)이 나왔다. 대문 옆 종가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집은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근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의 본명은 동탁이며, 고풍의상 · 승무 등의 민족적 전통이 담긴 시작과 지조론 등의 평론을 남기었다. 선생이 태어난 이 집은 조선 중기인 인조 때에 주곡리 입향조 조전의 둘째아들 정형이 창건하였으며 6·25동란시 일부 소실되었던 것을 1963년 복구하였다.

이 지방 주택의 전형적인 형태인 ㅁ자형이며 정면·측면 모두 7칸에 지훈 선생의 태실이 있다. 이 태실에서는 한말 의병장 조승기, 6·25 때 자결한 지훈의 조부 인석 등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많은 분들이 태어난 바 있다.

고래 등 같은 큰 집에는 주인은 없고, 텅 빈 집만이 나그네를 맞았다. 바깥채 대문은 열려 있었지만 안채 문은 잠겨 있었다. 친구와 나는 사랑채 쪽마루에 앉아  잠시 스승에 대한 추억담을 나눈 뒤 일어섰다. 스승님이 살아계셨다면 우리는 사랑방에서 스승님과 마주 앉아 박주산채를 놓고 시담을 나누었으리라.

 선생의 생가 호은종택 쪽마루에서 친구와 흔적을 남기다(오른쪽 민병기 창원대 명예교수).
선생의 생가 호은종택 쪽마루에서 친구와 흔적을 남기다(오른쪽 민병기 창원대 명예교수). ⓒ 박도

우리는 택시기사와 약속시간이 되었기에 곧장 일어섰다.

"자네들, 예서 하룻밤 묵고 가시게."

스승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아마도 우리를 붙잡았을 것이다. 조지훈 선생님의 단명 이유 가운데, 제자들과 밤새워 술을 드신 것도 하나라는데, 첩첩산중 오지, 벽촌 주실마을 찾은 제자를 어찌 그날로 맨입으로 돌려보낼 텐가. 하지만 세월의 무상함이여!

친구와 나는 찾아오던 길을 역순으로 영양으로, 이어 안동으로 돌아와 굳은 악수로 헤어진 뒤 나는 안동역에서 오후 7시 20분 청량리행 열차에 올랐다. 검은 유리창 차창 밖 스승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새 원주역에 도착했다. 나는 늙은 아내가 기다리는 치악산 밑 내 집으로 돌아오면서 선생의 '봉황수' '고풍의상' 등을 읊었다.

 선생의 생가 앞에서 흔적을 남기다.
선생의 생가 앞에서 흔적을 남기다. ⓒ 박도

지조론

집에 도착 후 늦은 밤이지만 서가에서 <조지훈 전집>을 뽑았다. 나는 선생의 여러 산문 가운데 <지조론>을 폈다. 이 글에는 대쪽 같은 선비의 얼이 담겨 있다.

변절을 밥 먹듯 하는 해바라기형 지식인이나 이 당이 좋을까 저 당이 좋을까 아무런 이념도 소신도 없이 얄팍한 이해에 따라 옮아 다니는 철새 정치꾼들에게는 촌철살인의 글이다. 이 글은 흐려져 가는 시대의 양심을 깨우침과 아울러, 모름지기 역사 의식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길잡이가 되는 글이다.

지조(志操)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지훈〈지조론〉에서

선생은 지사(志士)였다. 나는 때때로 <조지훈 전집>을 펴들고는 선생의 육성을 들으며 살아왔다. 조지훈 선생은 내 마음 속에 늘 살아계신다.

마음 후줄근히 시름에 젖는 날은
동물원으로 간다.

사람으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짐승에게라도 하소연해야지.

난 너를 구경 오진 않았다.
뺨을 부비며 울고 싶은 마음
혼자서 숨어 앉아 시를 써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야지.

쇠창살 앞을 걸어가며
정성스레 써서 모은 시집을 읽는다.

철책 안에 갇힌 것은 나였다.
문득 돌아보면
사방에서 창살 틈으로
이방의 짐승들이 들여다본다.

'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

무인(無人)한 동물원의 오후 전도(顚倒)된 위치에
통곡과도 같은 낙조가 물들고 있다.
- 조지훈 '동물원의 오후' 

 주실마을 앞산으로 조지훈은 청소년시절 이 산을 오르며 꿈을 키웠으리라.
주실마을 앞산으로 조지훈은 청소년시절 이 산을 오르며 꿈을 키웠으리라. ⓒ 박도

낙화(落花)

오월, 신록의 밤은 스멀스멀 깊어가고 있다. <청록집>에서 '낙화'를 폈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사라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조지훈 '낙화'


#조지훈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