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창밖엔 비가 내리죠. 그대와 난 또 이렇게 둘이고요. 비와 찻잔을 사이에 두고 할 말을 잃어 묵묵히 앉았네요…." 배따라기가 부른 <비와 찻잔 사이>라는 노래의 가사 중 일부이다. 노랫말만 봐서는 한 쌍의 남녀가 찻집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은 왜 함구한 채 창밖만을 응시하고 있는 걸까? 혹시 싸워서? 아님 둘 중 하나가 바람을 피우다가 들키기라도 해서? 에잇, 모르겠다. 가뜩이나 머리 아픈 세상인데 생면부지의 남자와 여자가 싸우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다만 지금도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비와 추억 사이에서 송풍수월(松風水月, 소나무에 부는 바람과 물에 비친 달이라는 뜻으로, 차분한 자연(自然)의 정취(情趣)를 조용히 감상(感想)하는 심경(心境))의 기분으로 치환되어 그 시절을 회고하곤 하는 것일 뿐.
불운과 박복이 쌍두마차로 달려왔다. 어머니는 핏덩이인 나를 버리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좌절해 만날 술만 드셨다. 공부를 그렇게나 잘했건만 중학교 진학은 사치로 치부되는, 닿을 수 없는 섬이었다.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순 없었기에 고향역 앞에 나가 구두닦이를 하면서 입에 풀칠을 시작했다. 비가 쏟아지면 우산도 팔았다. 세월은 강물로 흘러 청년이 됐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어느 날이던가…. 그날도 비가 내렸다. 우산 속에 들어온 그녀를 포옹하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자. 내가 너를 평생 비 안 맞도록 해줄게." 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내가 우산도 아닌 터인데 어찌 비를 안 맞게 해줄 수 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결혼하여 35년째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가난'이라는 외투를 벗게 해주지 못 하고 있다. 따라서 아내를 볼 적마다 미안할 따름이다.
지난 23일 야근을 들어올 적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야근을 하던 자정 무렵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비는 24일 아침까지 여전했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 한 탓에 시내버스가 대전역을 지날 무렵 집으로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 우산 좀 갖고 와 줘." 버스 정류장까지 우산 두 개를 들고 와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새삼 고마웠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와서 그런 걸까. 고삭부리 아내는 갸냘픈 어깨를 약간 떨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우산을 갖고 출근했으면 당신이 안 나왔어도 됐을 것을." 아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냐, 덕분에 모처럼 당신이랑 빗속의 데이트를 즐길 수 있잖아?" 아내가 고마워서 와락 껴안으려다가 지나가는 행인이 있어서 꾹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