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월 결혼한 저희 부부에게 올해 5월 11일 축복처럼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내와 저는 고민 끝에 딸에게 제 성씨인 '羅(나)'와 한자인 贇(빛날 윤, 예쁠 윤) 그리고 우리말 '별'을 합쳐 '羅(나)贇(윤)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죠.
하지만 저는 제 딸에게 처음 원한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습니다. 읍사무소에서는 한자와 한글이 섞여 있는 자녀의 이름은 출생신고를 받아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가족관계등록예규 제109호 5항이 '이름에 한글과 한자를 혼합해 사용한 출생신고 등은 수리해서는 안 된다'고 정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 '두나', '세나'처럼 한글로만 자녀의 이름을 짓는다 하더라도, 성씨(姓氏)는 아버지의 가계(家系)를 따라 한자로 표기를 합니다. '성'과 '이름'을 합쳐 '성명(姓名)'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성명'을 '이름'과 구분하지 않고 같은 뜻으로 사용하죠.
이렇게 본다면 이미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이름에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기관에서 성을 제외한 이름에 한자와 한글을 혼용했다며 출생신고를 받아주지 않는 것은 잘못된 관행인 듯싶었습니다.
억울한 마음에 이것저것 찾아보니 가족관계등록법 44조 3항은 "자녀의 이름에는 한글 또는 통상 사용하는 한자를 사용해야 한다"고만 되어 있더군요. 분명히 '한글과 한자를 같이 쓰지 못한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가족관계등록예규는 행정기관의 사무처리 규칙입니다. 아이의 이름에 한자와 한글을 혼용했다 하여 행정기관에서 출생신고를 수리하지 않는 것은 분명 법률에도 없는 제한을 두는 처사라 생각했습니다.
변호사도 수긍 못한 '한자+한글 이름 금지'저는 허탈한 마음으로 한자와 한글을 섞어서 자녀의 이름을 지었다가 반려 당한 사례가 없나 알아보았습니다. 다행히 한아무개 변호사가 저처럼 출생신고를 반려 당한 후 2013년 10월 '출생신고 불수리(不受理) 처분을 취소해 달라'고 소송을 낸 적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아무개 변호사는 결국 항고(항고사건 2013브17)를 거쳐 마침내 지난 2015년 7월 17일 서울 동부지법 제12민사부(조건주 부장판사)로부터 "딸의 이름에 한자와 한글을 같이 썼다고 출생신고서를 반려하는 것은 부당한 만큼 출생신고를 수리하라"는 판결을 받아내었습니다. 이는 가족관계등록예규 제109호 5항에 대한 법원의 첫 판단입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이름 짓지 못하도록 한 예규는 합리적인 범위를 넘어 부모의 작명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어 효력이 없으며, 아버지의 성(姓)을 따르게 돼 있는 이상 한글과 한자 혼용을 허용한다고 해서 성이 혼동될 우려도 거의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상, 자신의 딸 이름을 '韓李새봄'이라고 지었다가 출생신고를 반려당한 한아무개 변호사의 이야기였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선일보> 양은경 법조전문기자가 2015년 7월 17일에 작성한 "이름에 한글·한자 섞으면 안된다? 2년 분투 끝 딸 이름 지킨 아버지"라는 제호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사 주소:
http://me2.do/xSEMWZ79)
안타까운 점은 이런 판례에도 불구하고 가족관계등록예규가 현재까지도 수정되지 않았고, 행정기관에서는 여전히 한자와 한글을 혼용한 이름의 출생신고를 가족관계등록예규를 들어 반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 행정기관에서 항소를 하지 않아, 법원에서 가족관계등록예규가 효용 없다고 내린 판결은 현재도 유효하다고 합니다. 즉 예규'보다 우선 적용해야 할 '법'을 행정기관에서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죠.
지금의 예규는 부모의 작명권 뿐만 아니라, 행복추구권 등 국민 인권까지 침해하고 있습니다. 출생신고를 반려 당한 아이는 분명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아이이고 병원에서 받은 출생증명서도 있건만,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가짜 국민이 되어 버립니다.
한 변호사가 그랬듯 저 또한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때마다 왜 아이가 국민건강보험에 가입이 안 되어 있는지, 왜 주민등록번호가 없는지 일일이 설명해야 하겠죠. 하다못해 아이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도 신분증명을 못해 '어린이 표'를 끊어야 할 거구요. 당연히 어린이집에도 보낼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상황의 부모가 어떻게 가장 노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이런 가정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 저희 부부는 딸의 이름을 '羅贇별'로 짓기 위해 한아무개 변호사처럼 소송을 제기하려 했습니다. 물어물어 소송의 당사자였던 한 변호사님께 연락을 드렸고, 소송 절차에 대해 조언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부부가 감당해야 할 불편이 생각 외로 너무나 컸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보건소에 데려가 아이에게 예방주사를 맞혀야 했는데,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으면 발급번호를 받아와야 한다더군요. 소송은 소송대로 진행하면서도, 출생신고 지연에 따라 부과되는 과태료에 대해 이의신청도 해야 했구요. 보험 혜택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을 대상으로도 동시에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가정법원에서 상담을 받았듯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 '어떤 사유로 출생신고를 수리할 수 없는지'를 문서로 달라고 했는데, 읍사무소에서는 사정은 딱하지만 여러 사유로 불가능하다고 하여 당황했습니다.
출생신고 후 개명절차 밟기로결국 저는 차선을 택했습니다. 일단 아이의 이름을 '羅贇별이 아닌 '羅윤별'로 출생신고 하고, 추후 개명절차를 거치기로 한 것이죠. 실은 개명신청을 한다 해도 받아들여질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규가 아직 고쳐지지 않았으니까요.
아직 딸에게 진짜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제대로 시작한 건 없지만, 제 이야기가 자녀에게 원하는 이름을 지어주려 하는 부모님들에게 작게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을 썼습니다.
저는 딸의 개명신청과 함께 가족관계등록예규를 고치기 위한 헌법소원도 함께 제기하려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단지 이름에 한자와 한글을 혼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명권, 행복추구권 등을 포기당하며 자녀에게 원하는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는 부모가 저 이외에 더는 생기지 않았으면 하니까요.
말은 꺼냈지만 정작 법에는 무지한 터라 헌법소원을 하면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비용은 얼마나 들지 살짝 걱정도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혹시라도 법조계에서 근무하는 분 중에 문제점에 공감하여 제게 도움 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신다면, 언제든지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왜 딸에게 贇(빛날윤, 예쁠윤) 그리고 우리말 '별'을 합쳐 '贇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는지 알려드려야 할 것 같네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저는 윤동주 시인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서시'나 '별 헤는 밤' 등 윤동주 시인의 많은 시들이 아름답고 순수하게 빛나는 별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요. 저는 제 딸이 시인이 노래한 '별'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게 자라, 어려운 사람들의 그늘진 삶에 빛이 되어주길 바랐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첫 이름을 올린 제 딸에게, 저는 언제쯤 처음 원하던 이름을 제대로 선물해줄 수 있을까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제 딸에게 네 이름의 뜻은 빛나는 별이라고, 빛나는 별처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웃으면서 말해주는 그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