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강남역 사건에서 놀라운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었다. 사실 '여성혐오'도, 그것이 폭행이나 살인으로 이어진 일도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것은 '헬조선'의 일상적 특징 중 하나였다. 놀라운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분노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사건은 켜켜히 쌓이던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하게 만드는 작은 불씨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무시당하고, 멸시당하고, 조롱당하고, 평가받고, 배제당하고, 차별받고, 성희롱의 대상이 되고, 강간당하고 죽어왔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그녀들의 경험이 소환되는 자리"(이나영 교수)였다.
강남역에 모인 여성들은 자신들이 살면서 어떤 공포와 아픔을 겪어야 했는지, 이 여성혐오 사회의 더러운 진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전국 곳곳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수많은 사람이 이 사건 속에서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나만 불안한 게 아니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이런 아래로부터 분노와 공감의 힘이 새로운 운동을 창조해냈다.
'현재적 가해자'들의 반격과 이간질 헬조선의 바닥에서 이런 용암이 분출하자, 곧바로 '여성 차별·혐오 사회'의 반격이 시작됐다. 반격의 주축은 주류 언론, 경찰, 정부, 일베 등이었다. 주류 언론은 여성혐오적 관점·표현·기사·사진·광고로 매일 도배돼 있다. 국가와 억압기구들은 여성차별과 혐오를 교육과 정책으로 뒷받침해 왔다. 일베 게시글의 상당수가 여혐이다.
이들은 여성혐오의 '현재적 가해자'들이라 할 만하다. 여성을 멸시하고 대상화하던 당사자들이어서, 쏟아지는 고발과 폭로 속에 치부가 드러나고 있던 이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여성들의 입을 틀어막으며 '가만히 있으라'고 해야 할 필요와 동기가 있었다.
경찰청장 강신명은 "혐오는 의지적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며 '이번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했다. 수많은 여성들의 절규를 간단히 무시하며, 살인범의 진술을 신뢰했다.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는 가해자의 진술 내용도 있다." 이렇게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고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살인일 뿐이며 여성혐오는 없다'는 '답정너'가 시작됐다. 이어서 기득권 세력의 단골 메뉴가 등장했다. 바로 '배후론'과 '변질론'이다. <조선일보> 칼럼들이 전형적이었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은 사실은 조현병 환자의 피해망상으로 인한 범죄이다. (중략) '여성 혐오를 멈추라'는 피켓이 아니라, '정신과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라'는 피켓이 필요한 사건이다.""몇몇 여성 단체가 분노의 방향을 '한국 남자'로 틀기 시작했다.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된 남성들이 발끈하면서 점차 남녀 성(性) 대결로 번졌다. (중략) 현장의 열기는 정상적인 추모를 비켜나고 있었다. 이성이 빠져나간 자리에 증오가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등을 돌렸다."'제발 등을 돌려라'고 고사를 지내는 듯한 이런 우파 언론의 주문 속에 '양성평등연대'('남성연대'의 새이름)도 행동에 나섰다. "혐오를 넘어 화합으로!",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봤자 우리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극단적 페미니즘에 의한 여성 특혜 정책을 폐지해야 한다."
그토록 만연하던 여혐과 여혐 발언들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여성혐오에 대한 각성을 요구하는 주장들은 곧바로 '남혐'으로 규정하고 '혐오 중단과 화합'을 요구하고 나섰다. 세월호 가족들의 고통에 무관심하던 자들이 꼬투리만 생기면 "막말", "갑질"이라며 성토하던 것과 비슷하다.
이어서 경찰과 정부는 정신질환자 격리와 감시, 화장실 분리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이 대책은 강남역에 붙은 수많은 포스트잇과 발언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들만 골라모은 듯하다.
'여성차별·혐오 사회'의 공모자들은 투쟁에 나서기 시작한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을 이간질했다. 이 운동을 '남혐을 부추기며 여성과 남성을 대립시키려는 사람들의 불순한 시도'로 몰기 위해 온갖 부풀리기와 왜곡, 억지 논리가 동원됐다.
'살女주세요. 살아男았다'는 문구는 '여성이 더 큰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남성은 모두 가해자'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미러링'은 여혐에 반발하며 그것을 비꼬는 방법이 아니라 '적극적 남혐'으로 해석됐다.
운동 참가자 중 일부 개인의 과도한 언행은 곡해될뿐 아니라 곧바로 운동 전체의 뜻으로 해석됐다. 마치 참석자 개인의 발언을 곡해해 '내란음모'로 몰고, 한 사람의 태극기 소각을 곧 모든 민중총궐기 참가자들의 뜻으로 과장한 것처럼.
여성혐오가 어디있냐? 사이좋게 지내자?
이런 이간질에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낀 게 사실이다. 여성 차별과 혐오에 찌든 세력이 언론, 포털, 교육 등을 좌지우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여성 차별과 혐오는 마치 공기처럼 우리 모두에게 스며든다.
일상 생활에서, 광고에서, 드라마에서, 재밌는 짤방과 각종 유머를 통해서도 말이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존재를 미처 느끼지 못할 정도다. 반면 남성에 대한 멸시,비하는 바로 주목과 반발을 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이 여성차별·혐오 사회는 수많은 남성과 여성들을 각자의 성역할에 맞게 길러진다. 남성들은 자신보다 높은 위치의 남성에게 당한 무시는 참아도 여성에게 당한 무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느끼도록 길들여진다.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더구나 이 헬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취업난, 저임금, 불안정 노동, 주거난 등에 고통받고 있다. 이런 불만이 더 약자를 향하도록 하는 게 지배층의 주특기다. '여혐이 어디 있냐? 너희부터 남혐하지 마라. 아프다고 징징대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
강남역에 일부 남성들이 나와서 이렇게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구조의 반영이었다. 결국 이런 현상 자체가 이 사회가 얼마나 여성 차별과 혐오에 물들어있는지 보여 준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특히 가장 안타까운 것은 진보진영 일부까지 부적절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에 있다. 여성 차별·혐오를 과소평가하는 태도가 대표적이다. 이는 '여성혐오는 과장이다', '당신들이 아픈 것은 혐오 때문이 아니다'라며 가르치는 태도로 나타났다.
주된 문제를 '주류화된, 분리주의 페미니즘'에서 찾는 태도도 나타났다. 모든 페미니즘이 주류화된 것도, 분리주의도 아니고 '페미니즘이 싫다며 IS 가입하는' 일까지 일어난 상황에서 그야말로 '표적을 잘못 잡은' 것이다. 서로 손가락질하며 "훈수와 훈계를 두는 방식"이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가자며 손을 내미는 것"(손희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말이다.
다른 사안과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의아스러운 일이었다. 예컨대 노조 탄압으로 노동자가 자결해서 분노한 사람들이 '노조 혐오가 낳은 살인이고 방관하면 우리도 공범이 될 수 있다'며 싸운다면 '노조에 대한 탄압을 넘어서 혐오는 가능하지 않고, 방관자를 공범으로 모는 것은 단결에 해가 된다'는 설교가 나왔을까?
여성 혐오, 신자유주의 시대의 병적 징후 '여성혐오'가 무엇이고, 왜 생겨났으며 어떠한 구실을 하느냐는 중요한 물음이다. 이 나라는 이 단어가 사전에 등재돼 있지도 않다. 이것 자체가 여성 차별의 반영으로 보인다. 옥스퍼드 사전 등에 따르면 여성혐오(misogyny)는 "여성에 대한 증오와 멸시, 그리고 편견을 포함하는 보편적인 정서"를 뜻한다. '여자를 성적 도구로만 생각하고,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으며 남성의 소유, 이용, 혹은 학대의 대상으로 보면서 여성의 자율성과 활력, 감정이나 주체성을 부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적 경제적 조건 또는 사회적 기회에서 주어지는 차별"인 '여성 차별'과는 구분된다. '여성혐오'는 여성차별의 구조, 제도, 관행을 뒷받침하는 감정, 정서, 문화를 더 넓게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여성혐오는 여성을 무시, 비하, 조롱, 모독하는 발언으로 드러나며 나아가 폭력적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어휘는 이미 역사적·전세계적으로 쓰여 왔고 특히 한국에서는 이번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통해 더욱 명백한 사회적 의미를 얻게 됐다.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는 아래로부터 저항이 폭발하면서 새로운 어휘와 의미를 창조해 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성혐오가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걸까? 이미 엥겔스는 사유재산과 가족이 등장하며 여성이 비천한 처지로 전락한 "세계사적 패배"를 언급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자신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 남성의 정욕의 노예로, 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자본주의 들어서 더욱 악화됐다.
이윤만을 우선하는 자본주의 자체가 인간성의 부정이며 끝없는 차별을 낳지만, 여성혐오는 특별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 특히 자본주의 탄생기를 주목해야 한다. 약탈, 학살, 노예거래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에 여성혐오와 마녀사냥이 넘쳐났다. 이를 통해 공동체 파괴, 성역할 강요, 여성에게 출산, 육아, 가사 부담 전가 등이 이뤄졌다.
이처럼 여성 차별과 혐오는 자본주의 탄생과 역사 속에 새겨진 특징이다. 2차 대전 이후 장기 호황과 복지국가의 시대에 여성운동의 성장 속에 이 문제가 약간 가려지긴 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반동과 함께 '혐오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신자유주의는 복지를 축소하고 돌봄 부담을 개별 가정과 여성에게 떠넘겼다. 여성운동이 쌓아 온 성과를 빼앗으려 했고, 여성을 주 타겟으로 삼아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대폭 늘렸다. 고삐풀린 시장 논리는 성상품화와 성적 대상화를 강화했다. 불만을 돌리고 책임을 떠넘길 희생양도 필요했고 여성은 성소수자, 이주민, 무슬림과 함께 표적이 됐다.
이 모든 것이, 가사와 육아는 당연히 여성들이 도맡아야 하고, 여성이 하는 노동은 별 가치가 없으며, 여성은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존재하고, 내 고통과 어려움은 무임승차하는 저 '김치녀'들 때문이라는 논리와 주장들이 커지는 배경에 있다.
이것은 여성을 2등 인간으로 보도록 만들고, 무한 경쟁 속에서 낙오한 일부 남성들이 '내가 갖지 못한 저 전리품이 나를 무시하기까지 한다'며 병적 혐오를 표출하도록 만든다. 즉, 여성혐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두드러진 병적 징후이다.
이 속에서 여성들은 '성형을 안 해도 예쁘고, 재능있으면서 남자의 기를 살릴 줄 알고, 순진하면서 섹시하고, 애도 잘 보고 돈도 잘 벌고, 개념도 있으면서 착해야 한다'는 끔찍한 굴레 속에 사지가 묶여 있다.
이것이 이 헬조선에서 특히 더 심각하다는 것은 여러 수치가 증명한다.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60%이고, 비정규직의 70%는 여성이고, 기업 임원과 국회의원 중 여성의 비율은 20% 이하이고, 성별 경제·정치·교육에 대한 참여 기회와 권한은 모두 세계 최하위다.
은수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빅데이터 분석 결과에서 인터넷상 여성 관련 연관어 1위는 '폭력·범죄·살인'이었고, 2위는 '여혐·비하'였다.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여혐' 언급량은 무려 21.5배 증가했다. 일베 게시물 중에 욕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여자'였다. 여기에 남편이나 남자 친구에게 살해당하는 여성이 2.4일에 한 명꼴이라는 통계(한국여성의전화)까지 더하면 여성혐오에 대한 과소평가는 더 설 자리가 없다.
공감하고, 성찰하고, 배우고, 연대하자
지난 2주일 넘게 쏟아졌던 고통과 분노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그 응답은 결코 일부 남성들이 보여 준 것처럼 또 다른 멸시와 혐오여서는 안 된다. 피 흘리는 초식동물의 죽음을 보고 물기가 가득한 눈들 앞에서 '육식동물은 죄가 없다'는 팻말을 들고 있는 것은 조롱으로 보일 뿐이다.
'남성들의 삶도 고달프고 힘들다'는 응답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자신보다 더 힘든 사회적 약자를 향해 애꿎은 화풀이를 하는 것을 정당화해줄 수 없다. '여성이 잠재적 피해자라면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란 말이냐'며 분개하는 그들은 아마 오늘도 자신의 여자 친구, 여동생, 딸에게 이런 카톡을 보낼 것이다. '항상 조심하고,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안전한지 확인 문자줘.' 그것은 우리가 모든 남성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여성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회구조를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단결할 수 없고 승리할 수 없다'며 정답을 가르치려드는 것도 적절한 응답이 아니다. 지금 여남의 단결을 저해하는 책임은 분노하는 사람들보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과도한' 용어와 주장이 아니라 '과도한' 차별과 혐오에 있다.
먼저 필요한 것은 이 헬조선이 남성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며, 여성이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가운데에 서는 것은 결국 오른쪽을 편드는 것밖에 안 된다.
왼쪽으로 가서 같은 편에 서야 한다. 즉, 여성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목소리에 지지를 보내고, 공격에서 방어해야 한다. 그들의 경험, 분석, 분노를 이해하고 거기서 배우려고 해야 한다. 차별과 혐오에 시달리는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
당신이 남성이라면 특히 그것은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고? 불편함을 주는 것이 단결과 운동의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아니다. 문제는 일부 남성들이 그 정도의 불편함과 자기 성찰을 거부하는 것에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여성 2명중 1명이 데이트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성인남성의 57%가 성매수를 한 적이 있다는 여성가족부의 통계도 있다. 이는 여성 차별·혐오적 자본주의에서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소수의 괴물같은 가해자만 도려내는 게 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던져야 하는 질문은 '내가 이 사회에서 여성 차별과 혐오의 동조자나 방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하는 자기 성찰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런 남성들이, 여성에게 더 기울어진 이 헬조선을 바꾸는 데 앞장서겠다는 의지와 실천을 보여주면서 응답해야 한다. 그럴 때 여성들은 남성들이 '남성 중심 사회의 공모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과 남성들이 이미 그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원문은 이곳에 실려있습니다. http://anotherworld.kr/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