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박 9일 간의 해외출장 중에 취재일정이 이틀 뿐이라면 해외취재일까 여행일까. 1인당 수백만 원이 드는 유럽 여행을 대형 보험사들의 전액부담으로 다녀온 기자들이 보험사보다 소비자 권익을 우선한 보도를 할 수 있을까.
손해보험협회는 지난 5월 12~20일 보험협회 출입기자단에 소속돼 있는 언론사 기자들을 대상으로 '프랑스·독일 해외취재'를 실시했다. 국민일보, 뉴시스, 동아일보, 머니투데이, 부산일보, 서울경제, 서울신문, 세계일보, 이데일리, 조선일보, 파이낸셜뉴스, 한겨레, 헤럴드경제, CBS, MBC, YTN 등 16개사 기자가 참가했다.
손해보험협회에 공식보고 된 해외취재 일정은 ▲ 유럽 보험사기 세미나 참석 ▲ 독일보험협회 방문·취재 ▲ 현지 세미나 ▲ 프랑스 도로안전협회 및 악사 프리벤션 방문·취재 등이다. 전 일정이 현장 취재와 세미나 등 유럽의 손해보험업계를 상세히 취재하고 토론하는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가 여러 경로를 통해 파악한 실제 해외취재 일정은 달랐다. 공식보고 내용에는 없는 이탈리아 일정이 3일 있었고, 현지 취재일정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각 하루씩 이틀 밖에 없었다. 현지 취재에 고작 10시간 정도만 배정한 일정이다.
8박 9일 일정 중 취재는 10시간, 나머지는...기자들은 12일 늦은 밤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뒤, 13일 오전에는 베를린에 있는 독일보험협회를 방문하고 오후에는 유럽 보험사기 세미나에 참석했다. 하지만 오후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고 관광에 나선 기자들도 있었다.
14일은 베를린 관광 일정으로 채워졌고, 기자들은 이날 밤 이탈리아로 떠나 15~17일 사흘 동안 밀라노와 베네치아 등을 관광했다. 15일에는 쇼핑과 자유 일정으로 나눠 각자 일정을 보냈고, 16일부터는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기자들은 17일 밤 프랑스 파리로 이동했다. 18일 오후엔 프랑스 도로안전협회를 방문해 음주운전 예방과 관련한 취재를 했고, 이후 19일 저녁까지 파리 시내를 관광한 뒤 오후 9시 귀국편 비행기에 올랐다.
일정에 포함된 주요 관광지는 독일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브란덴부르크문, 쿠담거리, 이탈리아 밀라노 세라발레 아울렛, 베로나 인근 시르미오네, 베로나 '라 까사 데 줄리에타',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베니스 대운하,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라발레빌리지 아울렛, 몽마르뜨 언덕, 샹제리제 거리, 개선문 등이다.
명목이 해외취재인만큼, 현지 취재 내용으로 작성한 보도가 나오기는 했다. 크게 ▲ 보험사기에 강력하게 대처하는 독일보험협회 ▲ 운전자가 음주측정을 해야 시동이 걸리는 음주잠금장치를 전 버스에 의무화한 프랑스 등 두 가지 주제의 기사가 나왔다. 각 언론사는 이 해외취재를 통해 1~2편의 보도를 냈다. 하지만 해당 취재가 손해보험협회의 비용부담으로 이뤄졌다는 언급은 없었다. 또 일정 중 3일을 차지하는 이탈리아에서 취재해 보도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8박 9일의 일정 구성과 보도 실적을 보면, 손해보험협회의 유럽 해외취재는 명목만 해외취재일 뿐, 사실상 해외관광을 보내준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16개 언론사 기자가 참여하고 손해보험협회 관계자 및 삼성화재·현대해상 등 6곳의 대형 손해보험사 관계자도 동행했다.
이 해외여행 일정은 4번의 비행기편 이동(인천→베를린, 베를린→밀라노, 베네치아→파리, 파리→인천)과 7번의 호텔투숙으로 이뤄졌다. 이용 항공사는 에어프랑스와 알리탈리아였다. 숙박은 4성급 호텔을 이용했고, 지상 이동은 전용 차량을 이용했다. 식사비용도 손해보헙협회에서 부담했다.
<오마이뉴스>가 파악한 여행 일정과 교통편, 숙박시설 정보를 받아서 검토한 한 주요 여행사 관계자는 "우리라면 1인당 350만~400만 원에 판매할 수 있는 일정"이라고 분석했다. 식사비 등을 제외한 비행기 탑승권, 호텔 숙박비, 전용차량 운행, 현지 가이드 등으로 상품을 구성하면 그 정도 금액이라는 설명이다.
식사비까지 계산하면 1인당 최소 400만 원은 잡아야 하고, 참가자 24명에 대한 전체 비용으로 약 1억 원을 손해보험협회가 부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해보험협회는 각 보험사들이 낸 돈으로 운영되고 각 보험사는 보험 가입자들이 낸 보험료가 이윤창출의 근원이다.
기자단 "취재 목적으로 갔다"... 손해보험협회 "공익적 차원에서 진행"보험출입기자단 측은 외유성 해외 취재 아니냐는 지적에 "정말로 충실히 취재활동을 했다는 걸 감안해달라"고 말했다.
보험출입기자단의 간사를 맡고 있는 홍창기 파이낸셜뉴스 기자는 "외유성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충분히 외유성이라고 볼 수 있지만, 유럽에 간 목적은 취재였다"면서 "유럽까지 가는 데 12시간, 오는 데 12시간이 걸린다. 또 유럽 내에서 이동하는 시간도 고려해야 한다. 취재를 이틀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 놀았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라고 밝혔다.
손해보험협회 방태진 홍보부장은 "외유성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다. 이런 행사를 한 두 해 한 것도 아니고, 매년 기자단 해외 취재를 해왔다. 목적을 갖고 공익적인 차원으로 진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8박 9일의 일정 중 취재 일정이 이틀 밖에 없었다는 점에 대해선 "현지 사정으로 중간의 취재 일정이 줄었다"고 해명했다. 당초 취재 일정을 5월 12일, 16일, 18일, 19일로 잡았지만 16일은 독일의 오순절 휴일이어서 12일 일정에 합쳤고, 18일 취재일정은 19일 일정과 합쳐서 진행했다는 해명이다. 방 부장 역시 "충실한 취재와 보도가 있었기 때문에 해외취재 지원을 한 것이다, 공짜로 해외여행을 보냈다고 보는 건 무리"라고 반론을 폈다.
하지만 보험출입기자단에 등록돼 있거나 등록 경험이 있는 기자들은 이같은 해외취재 일정이 사실상 향응에 다를 바 없다는 반응이다. 이번 해외취재 일정에 참가한 한 기자는 '해외취재가 아니라 공짜여행 아니었느냐'는 물음에 "반론을 할 여지가 없고, 그에 대해선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고 반응했다.
현재는 기자단에 등록돼 있지 않지만 보험기자단의 해외취재 사례를 다수 봐 온 한 기자는 "기자들도 그냥 여행이란 걸 다 알고 가는 것"이라며 " 보험협회 출입을 맡게 되면 '어디 좋은 데 갔다 오겠네'라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말했다.
이같이 공짜로 외유성 해외 취재에 나서는 것은 언론윤리에 위반된다.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은 "(기자협회) 회원은 취재원으로부터 제공되는 일체의 금품, 특혜, 향응을 받아서는 안 되며, 무료여행, 접대골프도 이에 해당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방송사와 신문사 역시 원칙적으로 공짜 해외 취재를 금지하고 있다.
이기욱 금융소비자연맹 사무처장은 보험협회와 기자단의 행태를 비판했다. 그는 "보험사기만 강조할 경우, 보험소비자 권익이 침해될 수 있다"면서 "보험가입자들의 돈으로 운영되는 보험회사와 보험협회가 보험소비자 권익 보호와 배치될 수 있는 보험사기의 심각성만 강조하기 위해 기자단의 해외취재를 지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보험출입기자단에는 31개 언론사가 가입돼 있다. 보험출입기자단은 매년 이 같은 해외취재를 진행해 왔는데, 손해보험협회와 생명보험협회가 각각 비용을 대는 2개의 취재단을 꾸렸다. 손해보험협회 취재단 16개사를 뺀 나머지 15개사로 꾸려진 생명보험협회 취재단은 오는 10~17일 7박 8일 일정으로 미국 뉴욕 등 동부지역에서 보험연구기관인 LIMRA와 푸르덴셜생명 본사 등을 방문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