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네."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문구이다. 예전에, 한참을 그의 책이 이야기 하는 '간절함'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가 말하는 대로, 내가 '간절'하게 원하기만 하면 내가 바라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내가 지금 실패한 것은, 내가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힘내자구!'어떤 경우에도 원인 제공자는 '나'였고, 그것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나'를 몰아세웠다. 집에 키우는 개가 아픈 것도, 친구의 연애사가 꼬이는 것도, 부장의 심기가 불편한 것도, 회사의 분기 수익이 좋지 않은 것도 모두 내 탓이었다.
쉴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는 점점 사라졌고,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살아도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심지어 일이 줄어들지 않는 것도 내 탓이었다). 게다가 부장이 원하는 자료는커녕, 원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그러다 문득, 정말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모든 문제는 정말 '나'의 잘못에 기인한 것일까? 내가 과연 지금보다 더 간절해진다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는 한가?
한 가지 생각해보자. 지난해 수능 응시자가 60만명이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친다고 할 때,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은 과연 얼마나 될까. 대기업에 입사할 확률은 1%를 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수용할 수 없다면 저렇게 높은 대학 진학률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왜 습관처럼 문제'있는' 상황을 말없이 수용하고 있는가? 이래도 '나'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 세울텐가?
<노오력의 배신>(창비)을 읽었다. 이 책에는 '간절함'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으나, 결국 간절함에 대한 응답을 얻지 못한 이 시대의 수많은 '젊음'이 등장한다. 그들은 진심으로 간절히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오력'을 다하지만 우주는 그들의 바람에 쉽게 응답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들의 험난하고 지난한 '노오력'에 대한 기록이다. 달리 말하면, 노력했던 것에 대한 '배신'의 기록이다.
현직 대통령이 후보 시절 '생애주기별 맞춤 복지'라는 개념을 얘기한 적이 있다. '생애주기'라는 말은 인간의 삶이 각 시기별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나가는 과정이 있음을 전제로 붙은 용어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어떤 시기엔 교육을 받게 되고, 취업을 하게 될 것이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그들을 키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며 사회의 생산에 기여한 후 일정한 시기가 되면 은퇴하여 여생을 즐기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대통령도 이러한 생애의 각 시기별로 필요한 지원이 달라지는 것을 고려하여 국가적으로 지원책을 마련한다는 의미로 '생애주기별 맞춤 복지'를 언급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 태어난 이삼십대의 청년들에겐 전 세대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평범한' 삶이 더 이상 '평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은 대학 진학을 하기 위해 잠을 자는 것도 포기한 채 극심한 경쟁을 거쳐야 했는데, 때가 되어 결혼을 하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쉬운 결정이 아니다. 책에서 언급된 한 인터뷰이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옮겨본다.
솔직히 그 아이를 위해서 못 낳겠어요. 한국이라는 사회가 애 키우기 좋은 사회가 아닌 것 같아요. 건강하게 자라기 힘든 사회인 것 같아요. 사자나 호랑이도 애기 때는 다 장난치고 즐겁게 물고 뜯고 놀며 사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살아남으려면 애기 때부터 경쟁하면서 제도권 안에 틀어박혀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컨베이어 벨트 같은 느낌? 내 아이를 저만큼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오히려 부모가 더 그 경쟁을 부추기잖아요. 한 달에 100, 200 하는 영어유치원 보내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불안한 사회...... 나도 그게 싫은 거고 그걸 또 해야 하는 애도 얼마나 싫겠어요. 그렇게 해줄 만한 돈도 없고, 사실. 그러면 태어나면서부터 루저가 될 게 확실해 보이는 이 사회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과연 맞는 건가? - pp.104~105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아이의 인생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도 포함하는 결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 '책임'의 무게에 짓눌린 상태로, 아이가 살아가야 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까지 얹히면 부모는 '아이를 이 사회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과연 맞는지' 의심한다.
우리는 현재의 '걱정'으로 '미래'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국가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가? 여기 희망을 찾지 못하여 '국가'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라, 그들을 말릴 수가 없다.
내 일에서 보람을 느끼면서도 먹고 살아갈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남자든 여자든 앞으로의 삶 정도는 계획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살면서 행복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가요? 어느 하나도 충족되지 않는 나라에 왜 남아 있느냐를, 저는 오히려 묻고 싶어요. - p144
책의 결말은 조금 성급하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의 절절함을 '지금 이대로는 곤란하다, 바꿔보자' 정도의 구호로는 풀어낼 수가 없다.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다시 '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오력하자'는 식으로 문을 닫아버린 것만 같아서 개운하지 않다.
나 개인만의 답으로 위안을 찾는 것은 결코 지속 가능한 해답이 될 수 없다. 그저 잠깐의 위안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이 같이 답을 찾도록 모두가 그 논의에 동참해야만 한다. 제도를 바꾸고, 정책을 입안하고, '평범'하다고 믿었던 인생의 틀에 다양한 선택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답이라고 찾아온 곳에서 '정신 승리' 이상의 결론을 얻지 못한다면, 현실의 난관으로부터 도망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짐작하시겠지만, 나는 더 이상 '노오력에 응답하는 온 우주의 기운'을 믿지 않는다.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주체는 '나' 개인만이 아니다. 그 답을 위해 온 우주가 '같이'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우리, 너무 '개인'을 몰아 세우지 말자. 이런 시대에, 이런 경제 환경 하에서 태어난 것이, 당신들의 잘못된 선택이었겠는가?
얼마 전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고치던 열아홉 청년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월급의 70퍼센트가 넘는 돈을 저금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던 청년이었다. 우리 사회는 그를 '싼 노동력'으로만 써먹을 뿐, 그의 삶에 대한 진지한 노력을 철저히 '배신'해 버렸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성실하게 살라'고 잘못 가르쳤다며 오열했으나 사회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제도를 바꾸는 것과 함께, 우리가 그들의 '성과'가 아니라 '삶'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것만이 우리의 끝없는 '노오력'에 대한 정당한 응답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노오력의 배신:청년을 거부하는 국가 사회를 거부하는 청년> 조한혜정 외 지음,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