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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2016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2016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 이희훈

1969년 미국의 한 술집, 사람들이 모여 있다. 동성애 반대가 합법이었던 당시 경찰들은 성소수자들이 모이는 장소들을 단속했다. 국가권력의 급습에 맞서 성소수자들은 스톤월 인이라는 술집에서 자발적으로 데모를 일으켰다. 1년 뒤인 1970년 '게이 퍼레이드'라는 행진이 시카고, 로스엔젤레스와 뉴욕에서 열렸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외침이 수면에 떠올랐다. 매년 6월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는 그렇게 시작됐다.

지난 11일 어김없이 서울시청 광장은 무지개로 물들었다. '퀴어 아이엠'(Queer I am)이라는 문구를 들고 외국인, 장애인, 성소수자, 종교인,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혐오를 멈추라는 움직임에 동참했다.

저항의 상징으로 돋보였던 소위 문란한(?) 복장도 예상 외로 흔치 않았다. 꽤나 평범한 얼굴을 한, 혹은 아주 조금 특별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노래를 즐기고, 맛있는 걸 나눠먹었다. 한켠에선 여러 국가의 대사관이 부스를 차렸고 시민단체인 군인권센터 부스도 눈에 띄었다. 다른 편에선 퀴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감리교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퀴어퍼레이드가 열릴 때마다 보수 기독교계의 자칭 '맞불집회'도 어김없이 열린다. 서울시에선 공인된 퀴어 페스티벌을 방해하지 않고 혐오언사(Hate speech)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들의 모임을 허락했지만 약속은 어김없이 깨졌다.

마이크로 목청이 찢어져라 찬송가를 부르던 사람은 '신사답게' 집회할 것이라며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자들에게 개XX라 욕하고 저주받았다고 비난하던 이들은 어김없이 '동성애OUT, 이슬람OUT, 박원순OUT'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이 이들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웃으며 '샬롬'이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그들의 맞불시위가 흥미로운 이유 

 지난 1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2016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2016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 이희훈

흥미롭게도 퀴어 축제 반대 시위마다 태극기가 걸리고 나라를 위한 부채춤이 벌어진다. 이들이 하나님이나 예수님 같이 기독교적 단어를 내세우지 않는다면 흡사 '어버이연합'이 보여준 국수주의적 집회와 다르지 않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동성애를 반대하고,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하고, 가정이 무너진다며 북을 두들긴다.

나는 퀴어 퍼레이드만큼이나 독특한 '맞불시위'를 보며 꽤 흥미로운 연구자료라는 인상을 받았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반공주의, 보수 개신교와 정상가정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융합됐는지 알 수 있는 인상을 받았다. 이것도 퀴어 축제의 한 부분이었다. 

그나마 종교 다원주의가 평화롭게(?) 유지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신교는 소수 종교였다. 해방 직후 활발한 정치활동을 펼쳤던 천도교, 문화의 바탕처럼 각인된 유교, 여전히 제1종교인 불교 등의 틈바구니에서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몸집이 작은 종교였다.

지금과 같이 거대한 개신교, 특히 보수 개신교의 맹아(萌芽)를 터트린 건 다름 아닌 이승만 정권 때였다.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과 크게 협력해 미국 발 보수 개신교를 장려한다. 헌법에 정교분리의 원칙을 명시한 건 실상 개신교와 같은 소수 종교가 국가의 탄압에서 보호받기 위함이었다. 개신교는 3공 때 가장 먼저 군종제도에 들어섰고, 미군정 때 개신교 종교법인 등에 대한 비과세, 감세 혜택이 주어졌다. 한편 이승만 정권에서는 사찰령 체제를 지속하고 다수였던 대처 불교를 견제해 소수인 비구파를 지원하는 등 제1종교였던 불교내 분쟁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종교계 또한 막강한 국가권력에 자발적으로 예속하는 흑역사를 써왔다. 우세한 종교세력이 없는 와중에 독재정권이 지속됐던 시기, 보수 개신교는 설교단상에서도 반공주의를 주창했다. 애초에 반공주의로 사회를 대통합했던 당시 정권을 떠올리면 권력에 잘 보이기 위해선 이만큼 효과적인 일도 없었다.

이들은 청와대에 국가조찬기도회를 마련하고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진보 개신교 단체에게 정교분리를 어긴 채 종교의 본질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국가권력에 기대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던, 나아가 세력을 안정적으로 확장할 수 있던 때 보수 개신교계는 주저 없이 부정한 세태에 무비판으로 일관했다.

이런 그들을 광장으로 불러들인 건 다름 아닌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었다. 자신들과 결탁한 보수 인사와 대척점에 서서 북한에 쌀을 주는 등 불경한(!) 실책을 일삼는 정권을 보며 보수 개신교계는 분연히 일어났다. 낙선 운동도 하고 탄핵 운동도 하면서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성을 보였다.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기독교 진영에게 가했던 비판을 깡그리 뒤엎으며 그들은 국가를 위해, 교회를 위해 부르짖으며 통성기도를 벌였다. 보수 개신교계는 해방 이래 반공주의, 국가주의를 핏줄에 세기고 시류를 따라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퀴어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

하지만 이것만으론 맞불시위를 완벽히 이해하기 어렵다. 분명 거시적 관점에서 이들에게 국가주의 내지 이상한 민족주의의 표피가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 그들의 문구를 모두 이해할 수 없다. "에이즈로 인해 국가의 혈세가 낭비된다", "나라가 망조에 들었다", "나라에 혼란이 온다"는 문구에서 '나라'를 '가정'으로 바꾸면 다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에게 반공주의만큼 중요한 건 가정이다. 그것도 아빠, 엄마, 자식으로 이뤄진 '정상적인' 가정. 국가만큼 지켜야 할 천명이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확립됐다. 남자 아버지는 밖에 나가 일을 하고 여자 어머니는 집안을 살피며 아이는 국가의 교육을 받고 자라 훌륭한 인적 자원이 된다. 자본이 자본을 부르고 국가가 그걸 장려하기에 이만큼 좋은 단위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의 유지를 위해 정상가정은 필수적이다. 역할이 제대로 나뉜 채 일사분란하게 행복(이라고 쓰고 부유함이라고 읽는다)으로 나아가는 설명 체계가 자본주의를 신명나게 지탱해왔다.

반공주의를 주창해온 보수 개신교는 실상 미국에서 수혈 받은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둘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의 맞수로 뿌리내린 자본주의 덕분에 지금 개신교가 교세를 늘리고 안착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받았다.

더불어 유교적 배경으로 인해 남존여비 사상이 공고한 한국 보수 개신교는 교회 공적인 일에 앞장서는 건 남자(혹은 장로), 식당에서 음식 준비하는 건 여자(혹은 권사나 집사)라고 은연중에 가른다.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이 내걸었던 금욕주의는 오간 데 없고 복을 달라는 기도가 한국 교회 연단을 수놓는다. 자본주의의 덕을 보며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따라온 보수 개신교계는 이미 자본주의 자체를 긍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들 눈에 도통 퀴어라는 존재들은 정상 가족을 이룰 구석이 없어 보인다. 사회를 소란스럽게 만들 뿐 아니라 성 역할을 흐트러트리고 세상을 문란하게(?) 만든다. 보수 개신교계 입장에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퀴어 축제 앞에서 전통 퍼포먼스를 펼치며 민족과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정상적인 가정을 염원하는 이들의 무의식은 가히 퀴어를 빨갱이, 조국을 어지럽히는 위험분자들로 보는 반공적 습관에 젖어있다. 그들의 문구에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광적으로 목숨을 거는, 실상 탄탄한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이 사회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병적인 집착이 읽힌다. 이 같이 국가주의와 반공주의(자본주의 긍정),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교집합에 보수 개신교가 박혀있다.

보수 개신교가 다양성 자체를 옹호할 수 없는 건 이들이 그나마 가진 기득권을 안전하게 끌고 가기 위함이다. 다양성이라 하면 아무리 소수라 해도 그들을 배려하는, 보편적 인권 개념을 지켜나가는 토양을 불러올 텐데 그렇다면 보수 개신교계가 붙잡고 있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반공주의, 국가주의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슬람교를 믿는 인종까지 받아들이는 순간, 성소수자들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외에 그들이 버려뒀던 여러 소수자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짐짓 알고 있었다. 하나만 용납하고 다른 하나를 자의적으로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물 밀 듯 밀려드는 다양성의 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이전처럼 하나의 소수 종교화 할 것을 우려하는 건 그들에게 생존의 문제와 같다.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2016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2016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 이희훈

허나 변화는 걷잡을 수 없다. 이미 5만 명의 인파가 거리에 나와 무지개를 펄럭이며 평화를 외쳤다. 아무리 동성애가 죄라고, 예수님께 돌아오라고, 에이즈에 걸린다고 다그쳐도 이들은 이성애가 저지르는 숱한 가정폭력, 에이즈 발병 가능성을 들며 예수님의 정신에 대해 논한다.

'정상적'인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도 좋지만 온갖 사람들의 곁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고 일컫는다. 진정 예수의 정신을 고민하는 근본주의자는 누구일까.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역사, 공간 맥락 속에서 버텨온 보수 개신교는 과연 얼마나 '근본'에 가까울까. 맞불시위에서 그들이 부르짖은 국가 안정과 사회 통합, 정상가족의 기준은 세월과 투쟁을 따라 변해왔음을 상기해본다.

문란하게 헐벗은 몸보다, 있는 그대로 인정받으려는 그 마음 때문에 민주주의는 다수의 정치에서 다양성의 정치로 진화하고 있다. 이번 맞불시위는 너무도 명료하게, 그걸 막고자 애쓰고 있었다.


#퀴어축제#퀴어#맞불시위#퀴어퍼레이드#보수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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