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동행 인권동아리 '그런사람'을 아이들과 함께 시작한 지 어느덧 두 달 정도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세 차례의 발표와 토론, 한 차례의 1박 2일 체험학습을 다녀왔다.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기간 동안 꽤나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인문계 고등학생들은 정말 바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그날(2016년 6월 9일) 밤을 잊을 수 없다. 혼란스러웠던 밤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 당시의 나의 반응과 지금 문단의 서두가 포함하는 정서를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만남과 세 번째 만남에 대한 글을 쓰지 않고 이번 만남에 대한 글을 서둘러 쓰는 이유는, 아이들이 그 날 있었던 대화와 감정의 역동을 잊기 전에 이 글을 읽고 그들의 가치관에 적절한 영향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시작은 밝고 경쾌했다. 석식의 제공이 어떠한 이유로 불가피하게 없어지게 되어 학교의 모든 학생이 야간자율학습 없이 하교하게 된 날이었다. 원래 잡혔던 우리의 모임을 미루어야 하나 잠깐 고민을 하다가 이내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단 한 명의 반대 없이 우리는 치킨 파티를 하게 된 것이다.
전주로 옮겨오면서 생긴 단골집에서 치킨을 주문했다. 단골집이 된 이유는 당연히 치킨이 맛있었기 때문이었고 아이들의 입맛 또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발표를 해야 할 두 명의 학생들은 다소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모두들 신나게, 열심히 치킨 상자를 비워나갔다.
그날의 발표 주제는 인물 탐구였다. 우리 동아리의 목표를 다시 간단히 소개하자면 '환경과 인권에 대한 의식을 지닌 선한 지식인 양성'인데, 인권을 신장시킨 지도자를 구체적으로 탐구하여 그들의 선행과 의식있는 행동에 본을 받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첫 번째 발표자는 넬슨 만델라에 대하여, 두 번째 발표자는 마틴 루터 킹에 대하여 발표를 진행했다.
"넬슨 만델라에 대해 발표를 준비하고 있는 소감은 어때?"
"아우. 진짜 힘들어요."
"왜?"
"이 분이 너무 하신 게 많아요. 이걸 어떻게 다 발표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오래 사셔서 더 많아요."발표자와 몇 주 전 나누었던 짧은 대화이다. 아직 발표의 주제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넬슨 만델라'라는 어마어마한 소재를 놓고 주제를 정하지 못했으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이대로 두면 모든 것을 나열하는, 방대하면서도 의미없는 발표가 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어떠한 언질도 주지 않았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어야 배움이 빠른 법이다. 그리고 그는 오늘 여지없이 그 과정을 겪었다.
그의 발표는 참 성실했다. 빼곡한 슬라이드와 발표 노트를 보니 노력이 가상했고 기특했다. 하지만 주제가 없다 보니 당연히 자료의 재구성 또한 없었다. 목소리는 힘이 있었으나 말이 너무 빨랐다. 거진 100년을 살다 가신 분의 모든 부분을 조명하다 보니 할 말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발표를 다 마치고 잠깐 나누었던 소감에서는 진정성이 엿보여서 좋았다. 사실은 그 '소감'에서부터 발표의 기획이 시작되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두 번째 발표는 마틴 루터 킹이었다. 이 발표는 다소 간결했다. 마틴 루터 킹의 위인전을 기준으로 삼고 그의 삶과 업적을 발표했다. 발표자의 목소리치고는 작은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발표를 마무리해 나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시 앞의 발표와 마찬가지로 해당 인물에 대한 본인의 해석은 없었다. '전기'보다는 '평전'을 읽었어야 했을까?
발표의 마지막은 그의 유명한 어록인 'I have a dreem!'을 남긴 마틴 루터 킹의 연설 중 일부를 상영하는 것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그 날의 진기한 현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그 날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청소년들, 그들이 하는 공부의 양상이 그러했고 그들에게 타인의 삶이 주는 의미가 그러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나는 이 글의 서두에 '나는 아직도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라고 썼을까.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은 정말이지 누가 보아도 훌륭했다. 흑인과 백인이 평등해지는 그 날을 위한 그의 열망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나머지 흘러넘치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이 연설에 대한 아이들의 감상평이었다. 발표자를 포함한 세 명의 아이들에게 소감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답변으로 인해 잠시동안 멍한 상태가 되었다.
대학생 때 바이크를 타고 시속 100km 가까이 달리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적이 있다. 공기의 흐름 때문이었는지 숨을 아무리 들이켜도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동안의 진공상태라고 해야 할까? 그 순간 겪었던 당황스러움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은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이 정말 멋있다고 했다. 다소 상기된 듯한 얼굴을 하고서 그의 열정 어린 목소리와 사람들을 집중시키기에 탁월한 성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뜻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놀라운 비유법에 탄복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세 명 모두 그러한 감상평을 말했다.
우리는 인권과 환경에 대한 의식을 키우기 위해서 모인 동아리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그 당시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흑인차별 문제를 부르짖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상황에 저런 답변을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도 매우 진지하게 말이다.
아이들은 비유법의 훌륭함을 느끼기 이전에 연설의 주제를 마음 깊이 공감하지 않았던 것일까? 멋진 목소리와 넘치는 에너지를 발견하기 전에 그분의 가치관과 평등의 당위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만약 유년기 소년의 답변이었다면 미소를 한 번 띤 후 하나부터 천천히 가르치면 된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18세의 어엿한 청소년들이 아닌가.
아이들의 답변은 마치 국어 시험 비문학 지문에 딸려있는 문제에 대해 정답을 풀어낸 듯 했다. 누군가는 이런 식의 연설과 화술을 통해 면접을 성공리에 치르고도 싶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슬프게도, 40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루어졌던 한 인물에 대한 발표와 그에 대한 피드백 속에 그 인물이 살고자 했던 인생의 철학이나 목적을 위해 치렀던 거룩한 희생, 그 인물로 인해 권리를 되찾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등은 없었다.
차별받았던 사람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잠시나마 그들이 되어보는 것이 간접 체험일 것인데, 이 아이들에게는 '체험'이 아닌 '해석'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해석' 또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발표와 피드백이 끝난 후 마지막 정리를 위해 교탁 앞에 섰다. 모두들 수고했다는 첫 마디를 마친 후 잠시 말을 잊지 못했다. 어떤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야 할지, 무슨 말로 이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한 인물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그 목적을 '그 인물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알게 되는 것'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 '알게된 것'을 무언가에 이용하려는 본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본능은 결국 요즘 학생들의 공부 양상과 일맥상통한다. 공부는 사실 아이들에게 '의무'가 아닌 '권리'라는 것을, 공부는 무언가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지식을 쌓는 것 자체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목적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시와 스펙 쌓기에 찌들었으며 자신이 찌들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부가 입시와 취직의 수단이 되며 사회, 봉사 정신도, 인권의식도 결국은 대학을 가기 위한 스펙이 되는 사회. 누구의 책임인 것인가. 사실 공부의 원동력은 '호기심'이 아니었던가. 물론 공부가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집트에서 측량이 발달하게 된 원인은 항상 범람했던 나일강 때문이었고, 그들에게 측량에 대한 공부는 생존과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수단으로서의 공부 또한 명확한 방향과 목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학생들은 많은 것을 배운다. 국어를 통해 우리 말을 정확하게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배우며 문학작품을 통해 아름다움과 창의성 등을 배운다. 수학을 통해 논리력을 키우고 영어를 통해 세계공용어에 대한 감각을 익힌다. 과학을 통해 우주와 지구에 대한 자연적인 원리를 배우고 가설과 검증을 통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해 탐구하는 방법을 배운다. 인문사회 및 자연지리를 통해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과 자연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배운다.
이 과목을 통해 우리는 이런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부의 목적이 아닐까. 더 나아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타인이 살아가는 그들의 원칙, 즉 다른 이들의 가치관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하며 비판하고 공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공부의 목적일 것이다.
우리에게 공부란 충분히 누려야 하는 권리이며,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공부의 가장 큰 결과이자 성취임을, 공부가 더 큰 가치의 수단이 될 때는 반드시 그 목적에서 사람이 배제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우리 아이들이 차차 깨달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만약 이 글을 읽고 누군가가 '알고 있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걸요'라고 말한다면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는 아직 알지 못한 거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