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각장애 '6급'으로 등급(사람에게도 등급 매기는 이상한 사회) 매겨진 사람이다. 장애가 경증이기 때문에 큰 불편함은 없지만 전화 통화를 하려면 난감하다. 사람의 입모양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따라 모임이 두 개가 겹쳐 있다. 하나쯤은 포기해도 되는지 물어보면 좋은데…. 일일이 문자로 소통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지난 16일 아침, 신문을 보니 '휴먼테크놀로지 어워드 2016' 수상작이 실렸다. "체온이 흐르는 디지털 세상을 지향하며 만들어진…"이라고 하는, 처음 들어보는 시상식이다. "올해 선정된 기술·서비스들의 핵심 가치는 격차해소, 공개, 연결"이란다. 이에 걸맞게 영예의 대상을 차지한 서비스는 엔씨소프트문화재단의 '보완대체의사소통(AAC)'이었다.
당연히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서비스다. 다행히도 청각장애인을 돕는 앱 '손말이음센터'가 우수상을 받았다. 이미 어딘가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앱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지만 나는 경증 장애이기 때문에 찾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을 받은 앱이라니 '상'이라는 말에 얇은 귀가 솔깃해져 즉시 앱을 깔고 사용해봤다. "오늘 OO에서 모임이 있어요, 제가 다른 일이 있어서 오늘 못갈 것 같은데 꼭 오늘 가야만 하는지 물어봐주세요"라고 앱을 이용해 쪽지를 보냈다.
"꼭 오늘 안 와도 된다고 합니다." 문자로 답이 왔다. 오, 괜찮은데. 그동안 전화통화 할 일이 생기면 어쩔줄 몰라하며 난감해 했는데 이런 서비스가 있다니 신기했다. 이 앱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영상으로 수화 통역도 해주기도 한다. 무척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앱 개발자인 김도엽님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나만을 위한 전용좌석? 다 이유가 있었다
결국 두 개의 모임 중 오늘 꼭 안 와도 된다던 모임에 가기로 했다. 그곳은 며칠 전 술자리에서 우연히 조합원으로 가입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줄여서 살림의료사협)이라는 곳이다. 오늘은 정식 조합원이 되기 위해 꼭 들어야 하는 교육(살림에서는 이걸 '살림파티'라고 한다)이 있는 날이다.
의료협동조합의 활동은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협동조합 활동을 하려면 기본은 돼 있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겼기 때문에 가기로 했다. 누군가 '협동조합은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을 때, 최소한 '제대로' 알고 말해줘야 무식이 탄로나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처음이라 장소를 찾느라 조금 늦었다. 다른 신입 조합원 예닐곱 명이 벌써 교육장에 와 있었다. 깔끔하고 아담하게 생긴 교육장의 테이블에는 노란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직접 만든 미니 샐러드빵, 과일이 놓여 있었다. 저녁을 먹지 못한 조합원을 위한 배려인 듯하다.
아침에 전화했던 조합원이라고 말하고 인사했다. 그런데 내게 특별히 자리를 안내해주면서 "여기 앉으세요"란다. 아니, 내 자리가 따로 있었나? 의아해하면서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았다.
아뿔싸! 정면을 바라보니 다른 한 사람이 노트북에 빔을 연결해서 자막으로 통역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난 부탁한 적 없는데….' 그 순간 아침에 청각장애인용 앱을 사용한 게 생각났다. 혹시 그 회사에서 내가 여기에 오는 걸 알고 통역해 주러 온 건가? 설마 이렇게까지 친절할 리가? 혼자 소설을 썼다.
"혹시, <손말이음> 앱에서 나오셨어요?""아닙니다. 저는 여기 조합원이고요…."벽쪽을 가리키는 듯해서 쳐다봤다. 벽면에 비치는 자막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청각장애인 조합원을 위한 자막중계"에 난 깜짝 놀랐다.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감동이었다
세상에, 살림의료사협이라고 하더니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자발적으로 자막 중계할 생각을 하고…. 완전 감동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사실, 나는 청력이 많이 나쁘지는 않아서 큰 불편한 점이 없지만 여러 명이 함께 모여서 얘기 하는 자리에서는 완벽하게 듣기가 힘들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말을 하기 때문에 말하는 쪽을 정신없이 쳐다봐야 하고 집중해야만 겨우 들을 수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자막 중계를 하지 않았더라면 처음 보는 여러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알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소개를 하기위해 각자 실명이 아닌, 불리고 싶은 이름을 써서 가슴에 붙였다. 몸 지도가 그려진 종이 위에 '내 몸 중 가장 고마운 곳'을 표시하고 그 이유를 말했다. 참석한 사람들 모두 고마운 곳을 한 곳씩 적었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손'에다 동그라미를 그렸다.
'살림의료사협'은 2009년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준비모임으로 출발해 2012년 2월 살림의료생협으로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미 여러 언론에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 대해서 다뤘다. 현재 약 1743명이 조합원으로 가입돼 있고, 이들은 첫 출자금을 비롯해 매월 정기출자금을 낸다. 그 덕분에 빚을 내지 않고 의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개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가 있었는지 조합원 교육인 '살림파티'의 영상을 보며 알 수 있었다.
현재 전국에 380여 개의 의료생협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주의'로 시작한 의료생협은 이곳이 처음일 것이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가정의학을 기본진료로 하고 있다. 8월에는 3번째 사업소인 치과가 생긴다. 또 하나 주목할한 점은 '건강다짐'이라는 2번째 사업소에서는 운동클리닉, 복싱서킷, 노년근력운동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각종 소모임 활동을 한다는 점이다. 내 주목을 끈 소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산에 가는 산행모임 '오투'와 반찬 만들기 모임인 '밥 앤 찬'이다.
비록 술자리에서 어떨결에 조합원이 되었지만 첫 조합원 교육에서 진한 '감동'을 받고 보니 훨씬 매력적으로 보인다. 다만, 아쉬운 점은 내가 사는 곳과 좀 멀다는 점이다. 몸이 아프면 나만 고생하는 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까지 피곤하게 하지 않으려면 나처럼 든든한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보험(?) 하나쯤은 들어야 하지 않을까? 첫 출자금은 5만 원부터 낼 수 있고, 탈퇴하면 돌려받는다.
참! 생각해보니 나를 위해 기꺼이 수고를 아끼지 않은 그 어여쁜 여인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이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15년 전에 '언니네'에서 활동한 OO님 아니세요?" "네, 맞아요. 반가워요. 저는 스머프(온라인에서 불리는 내 닉네임)님인 줄 알고 있었어요" 헉! 이런 날을 두고 '님도 보고 뽕도 딴다'고 했던가. 내 님은 酒(주)님 밖에 없지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 블로그에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