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사라진 세상에서라면 인간 자신이 신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다른 방법이 없다. 세월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모든 것이 남김없이 드러날 수 있도록 세월호에 무한의 빛을 보내는 것, 그것을 '지금 여기'의 우리가 떠맡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절대 지평을 열어야 한다." - 본문 126쪽오죽하면 신이 되기를 자처할까. 신의 영역을 넘나들까. 신의 절대 지평에 서려 할까. 이토록 절대자에로 희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숨막힘이 세월호 참사에 있다는 뜻이다. '절대와 영원의 빛 아래서' 만이 세월호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금 여기(now and here)'에 우리는 산다. 물론 신도 '지금 여기'에 계시다(being). 하지만 세월호 사건 전에도, 사건이 난 시각에도, 지금도 신은 여전히 침묵하고 계시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는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심화시켜야' 하기에 '절대자의 눈으로 세월호를 봐야 하는' 당위가 존재한다.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니지만...철학자 이충진 교수는 철학하는 눈으로 세월호 참사를 짚어준다. 헤겔과 칸트 철학을 전공한 이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철학의 실천화에 힘쓰는 지식인이다. 전작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2015, 이학사)를 통해 이미 세월호 참사가 철학적 사유의 단초가 될 수 있음을 말했다.
이번에 내놓은 <가만히 있는 자들의 비극>을 통해서는 한층 심화된 세월호 참사의 숨은 의미들에 천착한다.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불합리하고 무의미한 시스템의 필연적 결과 중 하나가 세월호 참사라고 말한다.
특히 '가만있으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철학적 의미는 이 사회의 무의미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며, 이제 '가만있으라'는 말에 기만당하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이 침묵하더라도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이 침묵하지 않으면 된다. '이제 됐다'는 사람들을 향한 일침으로는 이 책 만 한 게 없을 듯싶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지금 여기'만이 모든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종교인들이 세월호 참사를 알리는(가만히 있지 않는) 집회의 맨 앞에 선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종교인들이 "눈앞의 세월호를 피안의 세계가 존재함을 드러내는 표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으로 본다.
저자는 세월호에 대하여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야말로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며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구원받는 길, 영생을 얻는 길'이란 뜻이다. 정통 기독교 신앙으로 보면 무슨 사이비 이론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태복음 18장18절)예수 역시 저자와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고 있다. 땅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면서 하늘의 보좌를 운운한다면 그것은 종교 사기극이다. 오늘날 기독교나 타 종교가 비난받아야 한다면 현실을 외면한 채 피안의 세계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땅과 하늘은 닿아있다. 천국도 극락도 현재의 연장선에 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죽었다는 증거저자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피안의 세계를 말하는 혜안을 가졌다.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니지만, '지금 여기'에서 충실해야 '그때 거기'도 있음을 조명해 주고 있다. 저자는 그래서 '가만있으라'는 말을 토했던 그날의 세월호를 야만의 표상으로 본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 다시 말해, '사회적 강자가 사회적 약자에게 불합리하게 행사하는 폭력'이라 말한다.
세월호 참사는 한 사건을 넘어 야만의 사회인 헬조선의 바로미터다. 그렇게 된 이유는 권력을 감시하고 자본을 비판하던 지식인이 이 땅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지식인들은 권력과 한 몸이 되어 힘없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올바로 보고 자성하고 있다.
나 또한 종교인으로 같은 생각이다. 이 땅의 헬조선화는 종교인들이 권력에 빌붙었기 때문이다. 피안의 세계만 말하지 현재 어떻게 살아야 정당한 건지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의 맘몬이즘을 섬기느라 진정한 신을 외면했다.
저자는 책에서 세월호 발생 때 보여준 한국사회의 야만적 민낯과 사건 이후에 나타난 아픈 자들의 인권, 이후 공동체의 움직임을 통한 자율적 연대 그리고 세월호를 진정으로 만나기 위한 '영원의 빛'을 말한다. 저자의 철학적 고뇌는 결국 신에게 닿아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며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저자는 이리 주문한다. 먼저 법치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시장 활동의 야만성을 극복하고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약자 친화적 감성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감성은 오래 가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감성은 아무리 강렬해도 지속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흔적은 남아도 강도는 약해지고 망각되진 않아도 일상 속에 묻혀버린다. 예민해진 감성이 내게 가져온 충격,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려면 감성과는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유능력이다." - 본문 36쪽철학자다운 지적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무사유, 무뇌의 인간으로 남는다면 헬조선은 영원할 것이다. 세월호의 눈으로 인권을 들여다봐야 한다. 세월호로 아파하는 이들을 '대한민국을 반국가 세력에 넘기려는 주범'으로 내모는 권력, 진상규명 요구가 친북좌파 짓으로 규정되는 사회, 이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인권 친화적 생각이다.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는 인간은 죽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는 사회는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의미를 사유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끔직한 것은 없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생각하지 않음, 즉 무사유 때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 있는 이유다.
세월호를 빨리 잊고 미래로 가자는 이들의 무뇌적 발언이 난무하지만 그건 바른 생각이 아니다. 저자는 "망각의 속도는 참으로 빠르다"며 안타까워한다. 세월호는 장은주(<세월호 이후의 한국교육>에서)의 지적처럼 "메리토크라시, 곧 능력자 지배체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광범위하고 강고한 공감대" 때문이다.
"가만있으라"는 말에 순종하도록 배운 학생들이 순종했다 희생되었다. 이젠 가만있으라는 말에 순종할 게 아니라 생각해야 한다. 희생자 가족을 종북으로 모는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타인의 생각과 행동에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 못하는 사람들"(148쪽)이라며, 저자는 공감능력이 아니라 사유능력을 주문한다.
자, 이제 세월호를 잊지 말고 생각하자. 사유하자. "무엇이라도 해주셔야 합니다,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잊지 않겠다고 말해주십시오"라고 부르짖는 희생자 유가족의 절규를 잊지 말자.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덧붙이는 글 | <가만히 있는 자들의 비극> (이충진 지음 / 컵앤캡 펴냄 / 2016. 3 / 159쪽 / 9000 원)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