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받았다. 내가 읽으면 좋아할 것 같다며 지인이 건네준 책이었다. 제목부터 남달랐다. <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 표지 그림 역시 심상치 않았다. 남자 머리를 향해 총구가 드리워진 작은 권총이 눈에 띄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중 나는 어느 쪽일까. "구제불능의 비관론자"나 "고질적인 낙관주의자" 중 어디에 속할까. 답은 어렵지 않았다. 순간 감출 수 없는 무언가를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문을 열고 탄 택시에 파란색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택시운전사 할머니가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사람의 눈빛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읽어내는 초능력을 이모로부터 배웠다고 거짓말 하는 할머니라면. 양 손목에 시계를 차고, 운전석 옆 재떨이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 괴상한 버릇을 가진 할머니가 떼를 쓰듯 놀러가자고 꼬신다면.
죽고 싶은 의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 수상한 할머니의 정체는 뭘까. "살다가 누군가 손을 내밀거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붙잡으라고." 이건 죽은 아내가 그에게 남긴 말이기도 했다. 옥신각신 끝에 의사와 할머니는 일주일간 '자살방지체험프로젝트'에 함께 승차하기로 한다. 할머니의 택시는 그에게 어떤 풍경을 보여줄까.
죽으려는 의사의 속사정택시가 향한 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다. 외곽의 공동묘지나 장례용품매장, 장례식장 등 살면서 한 번쯤 둘러봤을 평범한 장소다. 하지만 할머니는 둘러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공동묘지를 몇 바퀴씩 달리게 하고, 무덤으로 파놓은 구덩이 속으로 의사를 밀어 넣는다. 마음에 드는 관 속에 미리 누워보게 한다. 아홉 살 아이의 장례식장에서 "아이가 거부당한 무한한 기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곧 주인을 잃게 될 집안 물건들을 처분하고, 의사의 몸에 난 털을 몽땅 밀어버린다. 머리카락마저도. 기껏 숙제로 해온 버킷리스트를 북북 찢어 하수구에 날려 보낸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강간을 당했다고 소리지를 거라면서 의사를 협박한다. 금연구역 표지판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신비한 마법을 가르쳐준 이모가 열 명도 더 된다고 호들갑을 떤다.
잘 씻지도 먹지도 않은 의사에게 달리기는 지저분한 땀 냄새와 허기진 식욕을 일깨워주었다. 한 오라기의 털도 없는 몸뚱이는 갓 태어난 신생아처럼 보드라웠다. 할머니가 의사에게 날린 뺨따귀는 생생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의 몸은 아직 죽지 않았다.
몸의 세포들은 달라진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몸이 일으키는 반응은 의사의 통제권 밖이었다. 몸은 몸대로 어떤 신호를 보냈다. 일그러지듯이 혹은 쥐어짜듯이 더러는 화끈거리듯이. 몸은 '살아있음'에 성실하게 답장을 썼다.
아내의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종종 아내는 몸이 이상하다고 했다. 그 신호를 무시하고 무단횡단한 건 남편으로서도, 의사로서도 용납되지 않았다. 바쁜 의사 생활은 핑곗거리가 되지 못했다. 할머니가 일깨워주는 몸의 감각에 환호성을 보낼 수 없는 이유다. 단 한 번의 신호를 놓쳐버린 이후로 의사는 삶의 감각들을 닫아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매번 옳은 말씀만 하세요"인간의 마음 속에는 물고기가 산다. 내면의 물고기. 할머니는 서글픈 내면의 물고기는 입 밖으로 뱉어내야 한다고 충고한다. 어쩌면 무너지지 않고서는 서글픔을 토해낼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엔 무너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건 "개인의 신화를 집단의 이야기로 짓누르는" 억압적인 사회 때문이 아닐까.
할머니와 함께 찾아간 대학 모교에서 의사는 대학 시절 수업을 받았던 강의실에 앉게 된다. 젊은 시절, 의사의 꿈을 키워왔던 곳이다. 심리학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교수는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스토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스토리를 우리 대신 이야기해주는 사회 속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숙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숙명을 되찾고 우리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의무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219쪽)의사가 토해내지 못한 내면의 물고기는 무엇일까. 사회가 끊임없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도덕관념과 뿌리 깊은 죄의식은 아닐까. 몸이라는 감각적인 신호체계를 무시하고, 내면의 물고기로만 눈을 돌리려는 의사의 태도에는 죄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 부도덕한 남편과 의사였다는 자책감으로 스스로 짐 지우려는 자기 형벌.
정형외과 의사가 되려했지만 그는 성형외과 의사가 되었다. 어느 날 응급환자를 대하는 정형외과 담당의사에게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해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담당의사는 서류상 부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구급차에 환자의 가족을 태우지 않았다. 구급차에 오른 담당의사가 말했다. "늙은 레즈비언 같으니라구!"
그런 상황에 대한 묵인은 당장 시급한 담당의사의 추천서 때문이었다. 비굴하게 참은 대가로 추천서는 그의 손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다. 방관자로 침묵한 자신에게 내린 벌이었다.
장례식을 치르기 전날. 내일 밤 정각 11시 31분 12초에 죽기로 한 계획은 아직 유효하다. 거침없는 유머와 파격적인 액션을 선보인 할머니의 노력에도 의사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일이면 세상과 작별할 의사는 할머니에게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매번 옳은 말만 하실 수 있는 거예요.""나도 틀릴 때가 있어.""이거 보세요. 그것도 옳은 말이잖아요." (250쪽)지독한 죄책감이 의사의 숨통을 조른다. 사랑을 잃은 상실감이 의사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과연 할머니는 의사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의 초특급 반전이 독자들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다. 살짝 귀띔하자면, 막바지에 다다른 소설은 깊숙한 내면을 건드린다. "대단한 건 없지만, 이야기는 있다"는 자기 소설에 대한 작가의 자평은 제대로 빗나간 듯하다.
이 소설의 작가 바티스트 보리유는 실제 의사다. 작가가 글을 쓰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다. 인턴들의 전국적인 파업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사회 시선 때문이었다. 그 방편으로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그 글이 대중적인 인기로 이어지면서 <불새 여인이 죽기 전에 죽도록 웃겨줄 생각이야>라는 실화소설로 묶어졌다.
책장을 덮는 순간, 이 책을 전해준 지인에게 고마웠다. 어쩌면 지인에게 들켜버린 나의 그 무엇은 관심이 없었다면 알아채지 못할 것이었다. 내 속에 사는 어떤 물고기의 파닥거림을 알아본 것일 게다.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서로의 가슴에 어떤 물고기가 살고 있는지 훤히 보이는 것일까.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물고기를 토해낸다. 좁은 방에 틀어박혀 파닥파닥 노트북 자판을 두드린다. 무엇인가를 꾸역꾸역 게워낸다. 장폴 샤르트르의 <구토>에서 로캉탱이 바닷가 조약돌을 보면서 구토를 느끼듯이. 그 순간 로캉탱의 내면에서도 사나운 물고기가 파닥거렸을 것이다. 서글픔이든, 존재에 대한 불확실함이든 무늬는 다르지만 모양은 같은 '내면의 물고기'. 당신의 가슴 속에는 어떤 물고기가 살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 <죽고 싶은 의사, 거짓말쟁이 할머니> 바티스트 보리유/ 이승재 옮김/ arte / 1만 4000원 / 2016.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