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호루를 지나 남쪽으로 가면 그 앞으로 하화각(荷花閣)이 나온다. 연지가 있는 이 건물을 지나면, 남쪽으로 장제스(蔣介石)가 근무하고 잠도 잤던 오간청이 나온다. 그리고 서쪽에는 그가 목욕했던 건물인 양비지(楊妃池)가 나온다. 동쪽에는 장제스의 수행원들이 묵었던 세 칸짜리 건물인 동음헌(桐陰軒)이 있다. 그러므로 이 세 건물은 오간청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오간청은 환원의 중심건물이다. 뒤쪽에 5칸의 방을 배치하고 앞쪽에 전랑(前廊)을 설치한 사무용 건물이다. 전랑의 앞에는 6개의 붉은 기둥을 세워 현관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 건물은 서안사변시 장개석의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되었다.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비서실, 장제스 침실, 장제스 집무실, 응접실 겸 회의실, 비서실장인 첸따진(錢大鈞) 사무실이 있었다.
양비지는 양귀비가 목욕했던 건물인 귀비지를 모방해 청나라 때 만들었다. 그래서 양비지라는 이름이 붙었고, 강희제, 자희태후 등이 이곳에서 목욕했다고 한다. 서안사변시에는 장제스의 목욕실로 사용되었다. 동음헌은 오간청과 양식이 같으나 방이 3칸이다. 장제스의 수행원들이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했다고 한다. 이들을 보고 나면 백련사(白蓮榭) 앞으로 해서 망호루를 통해 환원을 나오게 된다.
잠시 시간을 내 보게 된 우왕전과 진보관 이야기
여행을 하다 보면 약속시간과 장소를 잊는 사람이 가끔 나온다. 화청궁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했다. 우리 일행은 어탕 유지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한 회원이 들어오는 입구인 구룡호 앞으로 잘못 간 것이다. 현지 가이드가 나가는 길이 들어오는 길과 다르다는 사실을 주지시켰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 발생한 일이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20분 정도 흘러갔다.
나는 잠시 시간을 내 우왕전(禹王殿)과 진보관(珍寶館)을 살펴볼 수 있었다. 우왕전에는 대우기념관(大禹紀念館)이 마련되어 있다.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전반에 중국 역사상 현군(賢君)인 우왕의 치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치수란 비와 관련된 것이어서, 우왕을 기림으로써 비바람이 순조롭게 불고 또 내리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고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가운데 우왕의 청동상이 있고, 좌우로 주련이 걸려 있다. '백성을 다스리기 전에 물을 먼저 다스렸고, 온 세상의 공(公)을 우선시했고, 마음은 요임금 순임금과 같았다'는 내용이다. 중국 역사에서 높이 평가하는 현군이 바로 요, 순, 우, 탕이다.
다음으로 찾아간 진보관은 화청궁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이다. 화청궁 유지, 어탕 유지, 고성 유지에서 발굴된 3000여 점의 유물 중 대표적인 것들이 이곳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시물 중 특별한 것은 없다. 화청궁과 관련 있는 당나라 황제들의 초상화와 당나라 여산궁도(驪山宮圖)가 있다. 이 궁도에 보면 화청궁을 평지궁과 산지궁으로 나누고, 200채 이상의 전각과 누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양귀비가 목욕하고 나와서 옷을 입는 그림인 '태진출욕도(太眞出浴圖)가 있다. 이 그림은 청나라 때 그린 것으로 당나라 때와는 다른 미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귀비의 얼굴이 얄상하고 몸매가 호리호리하기 때문이다. 또 원나라, 청나라, 중화민국 시기에 그린 화청궁도도 걸려 있다. 이들 그림을 통해 화청궁의 변화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출토 유물로는 벽돌과 기와가 있다. 벽돌에는 건축한 연도와 건축주 그리고 감독관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예를 들면 '청나라 가경(嘉慶) 무인(戊寅) 중춘(仲春) 길일(吉日) 지임동현사(知臨潼縣事) 심종(沈琮)이 건축했고 설몽빈(薛夢斌)이 감독했다'는 식이다. 가경 무인은 1818년이다. 그렇다면 200년 밖에 안 된 벽돌이다.
기와는 박물관에서 여러 번 본 사신 기와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양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신의 정교성이나 예술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연화문 기와도 보인다. 그렇지만 이들을 기와가 아닌 판석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네모지고 평평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청나라 때 유물로 보인다. 그리고 화청궁 전각의 내력을 적은 비기(碑記)도 보인다.
토성의 흔적과 화청방 식당가
이들을 보고 나서 진양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동쪽으로 토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궁성을 감싸고 있는 외곽성으로 나성(羅城)이라 불린다. 토성에 판축기법이 보이고, 일부 구간에서는 3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토성을 따라 동쪽으로 간 다음 계단을 올라가면 과거 경산사(慶山寺) 터에 만들어진 임동박물관이 있다. 경산사는 화청궁의 나성과 연결된 산록에 위치한 절로, 화청궁의 원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임동박물관은 점심식사를 하고 방문할 예정이어서 우리는 화청궁 북쪽에 조성된 식당가로 간다. 이곳의 이름은 화청방(華淸坊)이다. 길거리에는 중국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조각품들이 세워져 있다. 나팔을 부는 아이들, 키와 바구니를 만드는 장인, 수레를 끌며 어디론가 가는 가족 등 다양하다. 벽에는 전통복장을 한 중국 여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우리는 채선당(菜鮮堂)이라는 중국식 샤브샤브 집으로 간다. 회전자조(回轉自助)라 해서 중국식으로 재료들이 계속해서 돌아가는 형식이다. 그러면 고객이 먹고 싶은 것을 자신의 훠궈(火鍋)에 넣어 익혀 먹는 방식이다. 훠궈는 냄비, 작은 솥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고객이 재료를 가지러 왔다갔다 할 필요가 없어 편리한 점이 있다. 고기도 필요한 만큼 계속 먹을 수 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무한리필이다.
이곳이 우리나라 체인점 채선당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하다. 제휴관계인지, 이름만 같은 건지, 아니면 모방을 한 건지... 이번 중국여행에서 식사는 괜찮은 편이었다. 호텔에서의 아침식사는 중식과 양식 모두를 뷔페식으로 선택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점심과 저녁은 비교적 유명한 식당이나 독특한 식당을 찾아 우리 취향에 맞는 편이었다. 그 때문인지 음식으로 인해 고생한 사람은 없었다.
그럼 경산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경산사는 수나라 문제 때 건립되어 영엄사(靈嚴寺)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당나라 무측천 때 중건해 황실사원으로 삼으며 이름을 경산사로 바꿨다. 당시 건지궁(建地宮), 아육왕탑(阿育王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사리보장(舍利寶帳)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종 때인 840년 회창법난으로 크게 훼손되어 역사 속에서 거의 잊혀졌다.
경산사가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1985년 5월 이곳 신풍진(新豊鎭)에 사는 농민이 봉황문 벽돌기와(磚瓦)와 옛날 무덤을 발견하면서다. 전문가들이 이 고묘를 발굴하게 되었고, 그 결과 1200년 전 당나라 때 진귀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리보장 안에 있는 은곽(銀椁)이었다. 이것을 열어보니 그 안에 금관이, 금관 안에 사리병이, 사리병 안에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석비가 나왔는데, 그곳에 '대당개원경산사지탑'이라는 제액과 사리탑기가 적혀 있었다. 이를 통해 이것이 당 현종 때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사리탑기 끝부분에 개원 29년 4월 8일이라는 명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석비는 741년에 세워진 것이다. 당나라 때 황실사원으로는 서안 동쪽의 경산사와 서쪽의 법문사가 가장 유명했다. 그것이 이들 절에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을 보기 위해 임동박물관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5얼 18일에는 법문사도 찾아갈 예정이다. 경산사는 사라지고 없지만, 법문사는 당나라 때보다 더 큰 규모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경산사와 법문사는 일반 패키지 여행에서는 가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어, 불교신자들은 순례차원에서 꼭 찾아가는 곳이다. 1979년 경산사터에 만들어진 임동박물관, 그곳의 사리장엄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