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에서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3일째(9일)를 맞은 일행의 오후 일정은 충청수영성 답사다. 연 이틀간 발표와 토론을 마치고 오전 굴포운하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보존센터를 구경한 일행은 충청수영성으로 이동하는 버스 속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피곤해 잠이 든 일행을 깨운 건 눈앞에 펼쳐진 충청수영성 서문 모습. 커다란 나뭇가지에 반쯤 가린 성문이 참 아름다웠다. 서문은 9개의 홍예용 무사석(武砂石)으로 아치를 이루었다. 문루는 없다. 문의 폭은 3.1m, 높이는 2.75m이다.
동문지는 능선위에 있어 마을주민의 통로로, 저지대에 있는 남문은 마을 도로로 사용되지만 소서문(小西門)지는 1970년대 석유비축장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흔적이 사라졌다.
중국 '소주'의 아름다운 '고소성'과 비견된 충청수영성... 훼손돼 복원 공사 중고려말 조선초기 왜구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태조 5년(1396년) '홍자해 '를 고만의 첨사로 임명한 것이 시초가 된 충청수영은 초기에 고만에 설치되었지만 얼마 후 오천으로 옮겼다.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번지에 있는 충청수영성은 충청남도기념물 제9호에서 사적 제501호(2009.8.24)로 지정됐다. 1510년(중종5)에 이장생 수사에 의해 축성됐다는 기록이 적혀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보령현 관방조 내용이다.
"정덕(正德), 경오년에 비로소 돌성을 쌓았는데, 그 주위는 3174척이며, 높이는 11척이고, 그 안에 4개의 우물과 1개의 못이 있다"
1650m의 성벽이 남아있는 충청수영성은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 북벽과 동벽 등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성됐고 남벽 일부와 남문도 마을 통행로를 만들며 흔적이 사라졌다. 훼손된 남벽과 서벽을 제외하고 나머지 성벽들은 토성형태로 남아있다. 군선을 정박하던 곳은 절반 이상이 매립되어 시가지가 되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충청수영 내에 30개의 영사(營舍) 시설이 있었지만, 1895년 폐영과 함께 모두 소실되고 객사, 공해관의 삼문, 진휼청의 3개가 남아있다.
오천초등학교 자리에서 옮겨진 충청수영 객사는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린 곳이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 숙소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진휼청은 흉년에 수영관내 빈민구제를 담당한 곳이다. 수영 폐지 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해 보존하고 있다.
천하명승 영보정, 임란시절 광해군을 모시던 이항복... 아름다운 성이라 광해군이 방탕할까 방문을 말렸다1504년 수사 이량이 축조한 영보정은 천하명승으로 알려져 유명 관료와 문인들이 방문해 시문을 남긴 곳이다. 오죽했으면 이항복 이야기가 회자될까?
임진왜란 시절 백사 이항복은 세자인 광해군을 모시고 홍주에 머물렀다. 당시 광해군이 "충청수영에서 머물고 싶다"고 하자 충청수영을 먼저 답사했다. 영보정 경치가 뛰어난 것을 본 이항복은 이로 인해 세자가 방탕에 빠질까 염려해 불충함을 무릅쓰고 머무르는 것을 막았다.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친필현판이 걸려 있는 공해관 삼문
수군절도사가 집무하던 공해관 입구에는 독립운동가 김가진이 친필로 쓴 '공해관(控海館)'이라는 글귀가 선명히 걸려 있다. 김가진은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조선귀족으로 지정되어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으나 거절했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의친왕을 중화민국의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아들 김의한은 김일성과 회담할 때 김구선생을 수행한 분이다.
명나라 수군장수 유격장군 계금청덕비성과 맞닿아 있는 오천초등학교 뒷산에는 명나라 수군장수 유격장군 계금청덕비가 있다. 중국 명나라 수군장수 계금은 절강성 수군장으로 임진왜란 때 3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오천으로 상륙 후 전라도로 이동해 왜군을 토벌했다.
비신 높이 104㎝, 폭 48㎝, 두께 14.3㎝인 대리석 비석은 이수는 반원형으로, 지붕받침은 생략돼 있다. 청덕비에는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친 명나라 수군과는 달리 주민들 피해를 입히지 않아 장군을 칭송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일행을 안내한 보령문화원 황의호 부원장은 "충청도 수군은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이 감옥에 가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일 때 남해로 출동했으나 칠천량전투에서 전멸당했다"고 전했다.
역사의식을 확립해 유적보호에 힘써야수영이 폐지되어 진휼청이 민가로 사용되기도 하고, '소서문지'가 석유비축장소로 사용되어 흔적이 사라져버린 모습은 비단 이곳 뿐만은 아니다. 이순신장군이 진두지휘를 했던 여수진남관 주위에는 3킬로미터에 달하는 '좌수영성'이 있었다.
여수에 사는 나이든 분들 얘기에 의하면 공부할 교실이 부족하던 시절에 진남관 마루를 교실로 사용하기도 했고, 일제강점기 시절에 성벽을 허물어 바다를 매립하기도 하고 가정집 돌담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여수에 수원화성 같은 멋드러진 좌수영성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았다.
독일에 가면 13세기에 지어진 성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로텐부르크 성이 있다. 중세 유럽 모습을 간직한 동화같은 성모습을 보기 위해 세계각국에서 연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역사의식 확립에 힘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