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8시가 넘어서야 버드라칼리 학교 인근에 있는 차프라머리(Chapramari) 마을에 도착했다. 차프라머리 마을 동네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보리수나무가 서 있고 그 보리수나무를 중심으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버드러칼리 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프라사드 퍼삭(Hari Prasad Parhak) 선생님 집이다. 오래된 2층 목조 건물인데 1층은 창고 등 다용도로 사용하고 2층을 주거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몇 년 전 한국자비공덕회 회원들과 두 차례 방문을 했을 때에는 더먹에 있는 호텔에서 묵었다. 그 당시에도 당초 계획은 학부형들 집에서 민박을 하기로 했으나, 현지를 답사하던 회원들이 재래식 화장실 벽에 붙어 있는 도마뱀을 보고 모두 기겁을 하며 이런 곳에서는 죽어도 잘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더먹에 있는 호텔을 급히 수배하여 묵게 되었다. 이곳 호텔은 이름만 호텔이지 게스트하우스 수준만큼도 못한 낙후된 시설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토울라와 단둘이 왔기 때문에 학교 근처의 마을에서 묵기로 했다. 일정이 바쁘기도 하지만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현지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머물러야 후원학생들의 실상을 좀더 제대로 파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더운 열대 지방의 집들은 대부분 2층으로 되어 있다. 뱀이나 벌레들을 피하기 위해 2층을 주거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개굴~ 개굴~ 집 바로 뒤에 있는 논에서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담벼락과 천장에는 도마뱀들이 기어 다니고, 불나방들이 어른거린다. 모기들이 윙윙거리며 저공비행을 한다.
2층으로 올라가려면 가파른 목조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2층에는 방 2개, 거실, 그리고 부엌이 있다. 그래도 이 마을에 있는 집들 중에서 괜찮은 집을 골라서 우리들의 숙소를 마련해 준 것이다.
테라스에는 나무의자가 몇 개 놓여 있다. 우리가 묵을 방에는 카펫 위에 두 개의 작은 침대가 놓여 있고, 침대 옆에는 각각 작은 소파가 놓여있다. 조화로 장식해놓은 장식장에는 오래된 텔레비전과 오디오도 놓여 있다. 퍼삭 선생님 부부가 침실로 쓰고 있는 방인 것 같았다. 침대 위에 모기장이 둘둘 말아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모기들이 극성을 부리는 모양이다. 시토울라와 나는 같은 방에 여장을 풀었다.
퍼삭 선생님 가족은 아내와 딸, 그리고 늙은 노모. 큰 딸인 아니샤(Anisha)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 지역에서 환경 관련 공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들은 영국 런던에 유학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낡고 오래된 집에서 생활을 하며 아들을 영국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면 학구열이 대단하다. 퍼삭 선생님의 사모님은 온화한 인상답게 무척 싹싹하고 친절했다. 그의 딸 아니샤도 아름다운 미모만큼이나 명랑하고 싹싹했다.
무시무시한 단검이 그려진 고르카 맥주 저녁상을 차리는 동안 네팔 맥주를 한 잔씩 마셨다. 버드러칼리 샤르마(Sharma) 교장 선생님은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하셨다. 시토울라, 그리고 퍼삭 선생님과 함께 맥주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고르카(Gorkha, 구르카Gurkha라고도 함)지역의 이름을 딴 맥주병에는 고르카 용병들이 차고 다니는 '쿠크리(Khukri)'라는 무시무시한 단검이 그려져 있었다. 쿠크리 단검 두 개를 교차해 놓은 네팔 용병들의 전통 단검은 날이 안쪽으로 굽어 있다. 시토울라 말에 의하면 이 단검에 걸리면 목이 댕강 잘려나가는 건 일도 아니라고 한다.
시토울라가 들려준 고르카 용병들의 전투력은 과히 전설적이다. 오랜 세월 고산지대에서 단련된 고르카족들의 체력과 끈기를 바탕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고르카 용병들은 세계 최강의 용병으로 꼽는다. 대영제국 시절 영국이 네팔을 침공했을 때 고르카 용병은 영국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당시 영국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을 했음에도 고르카족은 쿠크리라는 단검 하나로 영국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결국 영국군은 네팔과 평화 협정을 맺고, 적군인 고르카족 전사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고르카 용병들은 영국이 개입된 갖가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1·2차 세계대전과 포클랜드 전쟁, 걸프 전쟁 등에서도 고르카 용병들은 놀라운 백병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들의 용맹성은 가히 전설적이다.
영국은 지금도 한 해 약 200명의 고르카 용병을 모집하고 있다고 한다. 고르카 용병들의 급여나 연금은 원칙적으로 영국군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일병의 연봉은 연간 1만 8000파운드(2015년 기준, 우리 돈 약 3000만 원) 수준으로 네팔의 연간 국민소득이 700달러 수준임을 감안하면 용병들의 수입은 대단하다. 최빈국 네팔에서는 엄청난 수입이다.
대신 고르카 용병에 선발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지원경쟁율이 50대 1을 상회하고, 혹독한 평가를 치러야 한다. 25kg의 돌무더기를 짊어지고 히말라야 산악지대 5km를 1시간 이내에 주파해야 하는 등, 용병들의 체력을 혹독하게 평가한다. 체력 테스트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면접 등 다양한 전형에 통과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팔의 젊은이들은 높은 급여와 노후생활이 보장되는 연금을 받는 고르카 용병에 선발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네팔의 엘리트 대학생들이 고르카 용병에 합격하기 위해 몇 년씩 시험 준비를 하는 등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을 정도다. 네팔에는 고르카 용병을 양성하는 전문학원만도 20여 개가 성업 중에 있다고 한다.
고르카 맥주는 그 용감한 용병들의 명성답게 다소 쓰고 강한 맛이 났다. 무더위에 먼지를 뒤집어쓰며 먼 길을 온 우리에게 한 잔의 시원한 고르카 맥주는 피로감을 싹 잊게 해주었다. 양고기와 당근, 오이가 안주로 올라왔다. 이어서 야채를 곁들인 쌀밥이 올라왔다. 모두가 오른손으로 밥과 반찬을 집어 먹었다. 나도 그들의 방식대로 오른손으로 식사를 했다.
네팔 사람들은 오른손을 사용하여 밥을 먹는다. 음식을 먹을 때나 물건을 주고받을 때에도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해야 한다. 네팔에서 오른손은 깨끗한 손이고, 왼손은 더러운 손이다. 이는 화장실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팔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큰 용무를 마치고 화장지 대신 물을 사용하여 왼손으로 항문을 닦는다. 그래서 왼손은 더러운 손이다.
장학금 후원 요청은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저녁밥을 먹고 나서 차 한 잔을 마시며 버드러칼리 교장선생님, 그리고 퍼삭 선생님과 함께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버드러칼리 학교는 초중고와 전문대학까지 학생수가 600명이 넘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학교로 우리가 최초로 장학금을 지원한 학교이다. 시토울라도 이 학교의 출신으로 현재 그의 동창생이 교장을 맡고 있고, 여러 명의 동창생들이 이 학교의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자비공덕회는 현재 이 학교에 65명의 장학생을 후원하고 있고, 컴퓨터도 50대 후원해 컴퓨터 교실을 열어주었다. 장학금 후원은 1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전문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2년 동안 후원하고 있다.
그런데 버드러칼리 학교 선생님들은 다른 학교에 후원을 하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도 자기네 학교에 후원을 해줄 학생들이 많은데 왜 다른 학교에 후원을 해주느냐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사실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틀린 말은 아니다. 이 학교 만해도 지원을 해주어야 할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6년 전 최초에 12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원하고, 컴퓨터 10대를 후원할 때에는 그저 감지덕지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은 6배가 넘는 학생들을 후원하고, 컴퓨터도 50대나 후원을 하고 있는데도 선생님들의 불만은 크다. 크나 작으나 사람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자꾸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절대적인 상황에서는 불만이 없다. 불만은 상대적인 비교에서 나온다.
그런데 버드러칼리 학교 주변에는 그 학교 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오지 학교들이 산재해 있다. 버드러칼리 학교가 한국에서 장학금도 후원해주고 또 컴퓨터도 배울 수 있다고 소문이 나자, 버드러칼리 학교로 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아이들은 컴퓨터도 배우고, 혹 장학금 후원을 받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 둘 학교를 옮겨 그 먼 길을 걸어서 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자비공덕회는 버드러칼리 학교보다 더 어려운 지역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장학금을 나누어서 후원해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버드러칼리보다 훨씬 오지에 있는 3개 학교를 선정을 해서 60명의 장학생을 선발하여 후원을 해주게 되었다. 컴퓨터도 5개 학교에 55대를 후원해주었다. 어린이들이 전학을 하고 먼 길을 걸어서 다니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내용을 버드러칼리학교에 자세하게 설명을 하자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버드러칼리 학교 선생님들은 서운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들은 밤 10시가 넘어서 돌아갔다.
이곳 오지에 살고 있는 네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을 엄청나게 돈이 많은 부자들로 알고 있다. 한국을 뭐든지 요구만 하면 다 해줄 수 있는 부자 나라라고 알고만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현재 100여 명의 자비공덕회 회원들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이웃을 위해 기도를 하며 근근이 성금을 모아 장학금을 후원하고 있다.
가난한 회원들도 많다. 부자라고해서 후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더 많다. 회원들은 조금만 용돈을 아끼면 네팔의 가난한 아이 한 명을 가르칠 수 있다는 보람으로 매월 조금씩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다. 후원과 관련된 업무는 회원들이 전부 무료 봉사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아진 성금은 100% 아이들을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네팔 사람들이 그 속사정을 다 알 수 있겠는가? 한국에도 끼니를 굶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우리들의 속사정을 좀 더 이해 시킬 수 있을까? 방문 마지막 날 학교 선생님들과 학부모, 학생들, 이 지역 유지와 교육청 관계들을 모아 세미나를 하기로 되어 있다. 그 자리에서 한국의 어려운 현실을 알리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해 왔다. 교육부에 부탁을 하여 한국전쟁 이후, 잿더미에서 일어선 한국의 기적을 담은 비디오도 준비해 왔다. 그런데 그 내용을 알린다고 해도 저들이 과연 이해를 해줄 수 있을까?
고르카 용병들 만큼이나 용감한 모기들
선생님들이 돌아가자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시토울라와 나는 내일 행사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각자의 침대로 들어갔다. 내일은 3개 학교를 돌아다니며 칠판과 컴퓨터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모기장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는 방은 덥다. 모기장 밖에서는 모기들이 밤새 왱왱거리며 아우성을 쳤다.
할! 이렇게 빼빼 마른 내 살 어디를 뜯어먹으려고 그럴까? 허지만 사람이 드문 지역에 사는 모기들은 필시 피에 굶주려 있을 것이다. 기어코 여러 마리의 모기들이 모기장을 뚫고 들어와 내 얼굴과 팔 다리를 뜯어 먹었다. 모기장 어딘가가 열려 있거나 찢어진 모양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모서리마다 모기장을 점검을 하고 이불로 얼굴을 뒤집어쓴 채 잠을 청했다.
배고픈 모기들은 고르카 용병만큼이나 끈질기다. 밤새 모기와 씨름을 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손등과 발등이 무척 가려웠다. 맙소사! 모기들이 뜯어먹은 자국이 손등과 발등 여기저기에 벌겋게 나 있었다. 이불로 얼굴을 가렸지만 발과 손은 내민 채 잠을 잤기 때문이다.
"아이고, 너무 많이 뜯겼네요. 나는 전혀 물린 데가 없는데…""허허, 아마 내 살이 더 맛있나보오. 모기에게 보시를 한 셈 쳐야지요."모기에 물린 자국을 보더니 시토울라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신기하게도 시토울라는 전혀 모기에 물린 자국이 없었다. 그에 비해 나는 하도 많이 뜯겨서 혹시 말라리아나 지카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모기에 물린 약을 손등과 발등에 발랐지만 여전히 가렵다.
모기에 물린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밤에 화장실을 가는 것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화장실은 1층 뒷마당에 있다. 화장실을 가려면 2층에서 그 가파른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와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더구나 문을 세 개나 열고 가야 하는데, 문마다 문고리를 꼭꼭 잠가놓고 있다. 인도 국경이 가까워 좀도둑들이 많아서 그렇단다.
어두운 밤에 문고리를 따고 가는 일이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다. 방문, 거실문, 계단통로로 연결되는 문을 따고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 뒷마당으로 가는 좁은 통로를 지나야 화장실에 도달할 수 있다. 화장실은 작은 별채로 지어져 있다.
재래식 화장실은 물론 양변기가 아니다. 앉아서 일을 보고 양동이에 담겨 있는 물을 퍼 뒷물로 씻어내야 한다. 물론 휴지도 없다. 화장실 옆에는 우물이 있고, 펌프질을 하여 물을 뽑아 올려야 한다. 먹는 우물이 화장실 바로 옆에 있어 우리네 같으면 비위생적이라고 질겁을 하겠지만 내성이 되어있는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모기들이 더 극성을 부린다. 화장실 뒤쪽은 바로 논으로 연결되어 있다. 논은 모기들의 서식지다. 맥주를 마신 탓에 밤새 여러 차례 2층에서 내려와 화장실을 드나들었는데, 그때마다 모기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어 내 마른 몸을 뜯어 먹었다. 하지만 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나고 공기는 숨쉬기에 전혀 부담이 없다. 인생사는 모든 것을 다 충족할 수는 없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이곳 사람들은 평생 이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데, 단 며칠 머무는 것을 가지고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개굴~ 개굴~ 왱~왱~ 한밤중 개구리 울음소리와 모기들의 저공비행 소리를 자연이 들려주는 이중주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지난 3월 28일부터 4월 5일까지 네팔 동부에 칸첸중가 인근에 위치한 오지학교에 낡은 칠판을 교체해주고 컴퓨터를 후원하기 위해 방문한 봉사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