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전라도로 들어가려 했다. 넓은 평야의 곡창 지대를 차지함으로써 군량미 걱정을 해소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 육지에서는 곽재우 등 의병들의 분전에 밀려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일본군 7군사령관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은 당시 한성(서울)에 있던 안국사혜경(安國寺惠瓊, 안코쿠지 에케이)을 남쪽으로 내려보내어 재차 전라도 점령을 시도했다. 전라감사를 자칭한 안국사혜경은 먼저 남원을 점령한 다음 전주로 올라가려 했다. 그래서 창원에 주둔 중이던 별군을 북상시켰지만 의령에서 곽재우 군에게 막혔다.
권종 |
권종(權悰, ?~ 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3월 금산군수로 부임하였다. 당시 광주목사는 권율이었고, 권율은 권종의 사촌동생이었다. 권종은 권율과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국난에 대처할 것을 다짐했다.
일본군이 한성에서 남하하여 전라도로 진격하고 있다는 속보를 들은 권종은 군사를 이끌고 전주에 갔다. 그런데 관찰사는 그가 고령에 무장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군사를 빼앗고, 군량 관리의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일본군이 옥천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선군은 저절로 무너졌다.
곡식을 나르던 권종은 "왜적이 본도(本道, 전라도)를 침범하려고 하는데 감사와 장수들이 모두 도망가 여러 고을이 텅 비어 사람이 없다. 나는 공무로 여기(전주)에 있으므로 본군(本郡, 금산군)이 왜적에게 함락되더라도 할 말이 있다. 그러나 의리상 본군을 버리고 존망(存亡, 살고죽음)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나에게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국조인물고>의 표현)"라고 결의를 나타낸 후 금산으로 돌아와 황급히 군사를 모집했다. 그러나 모인 군사들은 2백 명도 채 되지 않았고, 그나마 병약하고 나약한 사람들뿐이었다.
6월 22일 일본군이 금산으로 쳐들어왔다. 권종은 약간의 역졸을 거느리고 있던 제원찰방(濟源察訪) 이극경(李克絅)과 합세하여 적과 싸웠다. 하루 종일 혈전을 벌였지만 워낙 중과부적 상태였으므로 불가항력이었다. 이튿날 권종은 아들 준(晙)과 함께 순국하였다.
권종은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832년 '충민(忠愍)'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시호는 국왕이 업적이나 학문 등을 참작하여 죽은이에게 내리는 칭호로, 서경(署經, 신하들의 의견을 구함)을 거쳐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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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를 바꾼 안국사혜경의 별군은 군대를 나누어 1군은 성주로 진격했다가, 이어서 지례와 거창을 쳤다. 2군은 황간과 순양(영동군 양산면)을 거쳐 무주로 침입했다. 이들은 모두 금산으로 몰려들었고, 청주를 거쳐 남하한 안국사혜경도 금산으로 왔다.
6월 22일 안국사혜경의 대군을 맞이한 금산군수 권종(權悰)은 이틀에 걸쳐 혈전을 벌였지만 끝내 아들 준(晙)과 함께 순절했다. 이제 금산은 적의 출발지가 되었고, 목적지는 여전히 전주였다. 안국사혜경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1군은 용담과 진안을 거쳐 웅치를 넘어 전주로, 2군은 진산을 친 다음 이치를 넘어 전주로 진입할 작전을 짰다.
이윽고 1592년 7월 8일과 9일, 이틀 동안 '임진전란사에 손꼽히는 대혈전'이 웅치에서 벌어졌다. '임진전란사에 손꼽히는 대혈전'은 웅치 정상에 세워져 있는 <웅치 전적비> 비문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는 1969년에 이 전적비를 건립한 전라북도 측의 '팔은 안으로 굽는다'식 과장일지도 모른다. 웅치 전투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알아보기 위해 믿을 만한 여러 자료들을 읽어본다.
김형석은 <임진전란사>에서 '이 (웅치) 전투는 이치와 같이 완전히 적을 물리치지는 못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뒤에 일본군이 전주성을 역공(力攻, 힘껏 공격)하여 함성(陷城, 성을 함락)할 생각을 버리게 된 것은 이 일전(一戰, 한 번의 큰 전투)에서 조선군의 저항력이 얼마나 강하였고, 사수(死守, 죽음으로써 지킴) 관념이 얼마나 굳었던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았기 때문에 (전주)읍성 공위(攻圍, 포위하여 공격)를 주저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이 일전의 공이 얼마나 컸던가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도 '웅치에서 안덕원까지 이어진 일련의 전투는 후일에 벌어진 이치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초기 호남 방어에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웅치 전투를 통해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전열을 가다듬어 왜군의 호남 점령 시도를 무산시켰다. 호남 지역의 곡창을 보존함으로써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는 인적·물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평가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도 '웅치, 이치, 금산에서의 전투에 의하여 일본군은 열기가 꺾여 전라도 침입을 단념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전라도는 전화를 면하게 되었다.'라고 기술한다. <신편 한국사>는 또 '(1592년) 8, 9월 중에 전개된 공방전에서 가장 큰 성과는 전라도에 쳐들어 온 일본군을 격퇴하여 곡창 호남 지방을 지킨 일이었다.'면서 '이치 전투와 거의 동시에 진안의 웅치에서는 김제군수 정담, 의병장 황박 등이 합세하여 사력을 다해 전투를 하였다.'라고 평한다.
임진왜란 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미를 지닌 웅치 전투의 전적지, 국사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은 꼭 찾아볼 곳이다. 웅치가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과 완주군 소양면을 잇는 고개라는 배경지식만 믿고 길을 나서고, 잘 닦여진 대도로를 따라 오르막 정점에 오른다. 소태정 휴게소가 있고, '더 밝은 미소로 다시 만나요! 진안'과 '홍삼 한방의 고장, 진안'을 앞뒤로 커다랗게 써 붙인 대형 아치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아치 아래 좌우에는 '진안군 부귀면'과 '완주군 소양면' 표지판이 각각 설치되어 있다. 웅치 전적비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곳은 웅치가 아니다. 진안군 부귀면과 완주군 소양면의 경계 지점인 것은 사실이지만 웅치, 즉 임진왜란 당시 우리 군사와 일본군이 격전을 벌인 현장은 아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걸어서 넘은 이가 단 한 명도 없는 곳이니 고개도 아니다. 당연히 '○○재'식의 고개 이름도 없고, 그저 '전진로'의 일부일 따름이다. 이 대도로는 1997년에 개통되었다.
전진로가 개통되기 이전까지는 이곳에서 1km 가량 서쪽에 있는 모래재가 산맥을 넘나드는 통로였다. 소태정휴게소를 넘는 전진로와 모래재휴게소를 넘는 모래재가 얼마나 가까운 이웃사촌인가는 그 두 길이 모두 부귀면 신정리와 소양면 신촌리를 이어주는 연결로라는 사실이 증명해준다. 하지만 모래재도 1972년에 개통된, 터널까지 거느린 신작로일 뿐 전통적 의미의 고개는 아니다. 일본군들이 전주성으로 진격하기 위해 터널 안을 통과하는 광경은 결코 가능한 상상이 못 된다.
웅치 전적지 곰티로, 내내 숲속 걷는 멋진 역사 산책길
검색으로 웅치전적비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웅치전적비의 주소로 알려지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18-1'이 너무나 넓은데다, 깊은 산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서울 가서 김 서방을 찾는 편이 쉬울 것이다.
검색으로 전적비를 답사하려는 분을 위해 주소 둘을 소개한다. 완주군 곰티로 430(동원리마을)과 진안군 곰티로 1202(장승초등학교 뒤편)이다. 둘 중 어느 쪽에서 출발하든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 가면 웅치전적비 안내판과 만나게 된다. 물론 그 곳에는 부귀면과 소양면의 경계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완주군 곰티로 430에서 출발하여 산길을 오른다. 여기서 전적비까지는 약 4km나 된다. 그래도 이 길은 차량이 거의 다니지 않는 비포장 1차선인 까닭에 숲속을 거니는 여유와 한정(閑情)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보기드문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도 이 길을 지나갔다. 침략군 6천여 명이 조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짓밟았던 전쟁길이다. 그 사실조차 깜빡 잊었는지, 지금 내 마음은 너무나 평화롭다. 장승초등학교에서 올라오는 4km길이 대부분 땡볕에 노출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이 길은 줄곧 숲길이다. 게다가 조금도 숨이 가빠지지 않을 만큼 평이한 오르막이다. 임진왜란 전쟁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전투 장소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연결짓지 않더라도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널리 알려 마땅한 '상품'이다.
전적비까지 가려면 이제 1/3 가량 왔을까?...... 문득 온몸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 길은 일본군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렸던 살육의 현장이다. 지금 나는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 머리 위로는 전북 익산과 경북 포항을 잇는 고속도로의 만덕교가 가설되고 있다. 어머어마한 교각들 때문에 하늘이 갈라져 있다.
날카롭게 찢어진 하늘이 마치 우리 겨레의 역사를 고스란히 상징하는 듯 느껴졌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우리는 다른 세력도 아닌 바로 그들에게 나라를 온통 빼앗기는 최대의 치욕을 당했다.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었고, 지금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이곳 웅치 전적지에 찾아오는 사람도 드물고, 웅치 전투의 의의를 되새겨주는 기념관도 없다.
고개 꼭대기에 닿으니, 진안군 부귀면과 완주군 소양면의 경계 지점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그 표지판의 20배쯤 되는 '웅치 전적비(熊峙戰蹟地)' 안내판도 "이곳이 웅치전적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하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제목(웅치 전적지) 아래에는 '전라북도 기념물 25호'가 명기되어 있다. 전적비가 아니라 전적지가 문화재라는 설명이다. 소재지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로만 적고 지번은 생략했다. 어차피 신촌리 18-1로는 전적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인 듯하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우리의 조상들이 왜적에 맞서 전투를 벌인 현장이다. 왜군은 해로를 통해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장악하려고 했으나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로가 막히자 육로로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왜적은 무주, 금산, 진안 등지에 근대를 집결시키고 선조 25년(1592) 7월 8, 9일에 웅치로 쳐들어 왔다. 김제군수 정담(鄭湛),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등이 왜적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였다. 왜군은 우리 군의 충성심과 용맹함에 감탄하여, 우리 병사의 시신을 묻고 추모하는 뜻을 담아 '弔 朝鮮國 忠肝 義膽'이라고 쓴 푯말을 세워 두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열들의 혼이 가슴 깊이 느껴지는 곳이다.'
'조 조선국 충간 의담'은 조선국의 충신들을 위로한다 정도의 뜻이다. 충간은 충성스러운 간, 의담은 의로운 쓸개이므로 충간의담은 곧 충신, 의사를 의미한다. 김형석은 적들이 조선군 전사자들의 시신을 땅에 묻고 푯말까지 세운 것을 두고 '적장 안국사(寺는 사찰)혜경이 승려 출신인 까닭도 있겠으나, 싸우는 마당에서도 이같이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좋고, 또 오죽 격전을 하였으면 그랬으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피차 무슨 원수가 있어서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라와 겨레의 영광을 위하는 지성(至誠, 지극한 정성)으로서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보면 항자불살(降者不殺, 항복한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은 전쟁도(戰爭道, 전쟁 원칙)의 기본 윤리라 할 것이다.' 하고 해석한다.
안내판의 글을 읽은 뒤 곰티로 왼쪽으로 난 포장길을 오른다. 200미터 가량 걸어가니 찾아온 나그네가 그토록 반가운지 웅치전적비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마중해준다. 높은 지대에 우뚝 서서 저 아래 신촌리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전적비 뒤로는 온통 푸른 하늘이 해맑다. 얼른 뛰어서 비 앞으로 달려가려다가, 출입문 쪽만 제외하고 사방으로 둘러쳐진 철책에 노란 나비들이 가득 앉아 있는 정경에 사로잡혀 문득 발걸음을 멈춘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단체로 찾아왔던 모양이다. 노란 리본에는 '웅치 전투, 잊지 않겠습니다!' 등이 고불고불한 글씨로 적혀 있다.
전적비 철책에 빼꼭하게 매달려 있는 노란 리본들아이들은 전적비의 비문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채 돌아갔으리라. 이곳까지 올라와 '웅치 전투,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글을 남기고 간 아이들인데 비문도 마음에 넣지 못한 채 산을 내려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미안했다. 그래서 사진으로 담아온 비문을 컴퓨터에 크게 띄워 해독(?)한 다음, 오늘 이 글 속에 전문을 공개(?)한다. 사실 나도 전적비 앞에서는 비문의 글자들을 읽을 수 없었다. 나의 이 하찮은 수고도 웅치 전투 순절 선열들을 기리는 작은 현창이 되리라 스스로 믿을 뿐이다.
'임진왜란은 미리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당하게 된 왜군의 침략 전쟁이다. 개전 초부터 적의 침략 공격에 밀리어 국운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고 국토와 백성은 적의 만행에 유린되는 처참한 국난을 겪었다.
그러나 7년의 긴 전쟁 와중에서도 적에게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온 겨레의 호국 의지는 노도와 같이 불타올라 전국 각처에서 봉기한 의병과 관군은 줄기찬 항전을 계속하여 마침내 침략 왜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국가를 보존케 하였으니 임란의 참된 민족사적 의의는 온 겨레가 살신보국의 충의로 굳게 뭉쳐 국난을 극복하였던 호국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이곳 웅치는 임진년에 우리 용감한 관군과 의병이 장렬무비(無比, 비교할 데 없는)한 혈전을 전개한 호국의 전적지이다. 임란 개전 초년에 전라도 침략을 맡은 왜군은 의령에서 곽재우 장군에게 진로가 차단되자 금산에 집결한 다음, 2진으로 나누어 이치와 웅치를 넘어 전주성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 적정을 탐지한 광주목사 권율 장군은 전라도 도절제사가 되어 이치를 막고 김제군수 정담에게 웅치를 방어케 하였다.'전투 초기의 경과에 대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당시 권율은 전라 감사 이광의 지시에 따라 남원에서 영호(嶺湖)의 경계를 지키고 있었고, 황진은 남원에서 돌아오는 중이었으므로 웅치에서는 김제 군수 정담·나주 판관 이복남·의병장 황박 등이 왜군과 싸우게 되었다. 전장에서는 의병장 황박이 최전방을, 나주 판관 이복남이 제2선을, 김제 군수 정담이 정상에서 최후 방어를 담당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치와 웅치 수비군은 호남 사수의 중대한 임무를 지고 적의 대군을 맞아 장렬한 대 공방전을 전개하게 되었으니 이 싸움은 실로 임진전란사에 손꼽히는 대 혈전이었다. 이치에서 권율 장군은 적을 무찔러 승전하였으나 웅치전에서는 3일간의 대혈전이 전개되어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지막 고지까지 밀리게 되었다. 이때 정담은 일시 후퇴 권유를 물리치고 차라리 왜적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단 일보도 후퇴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끝까지 싸워 화살이 떨어지자 백병전으로 적을 무찌르다 장렬하게 전몰하였다. 이때 종사관 이봉과 비장 강운, 박형길 두 사람도 전사하였으며 해남현감 변응정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왜군도 웅치 수비군의 용전상에 감복하고 전몰용사의 영을 조상하였다.웅치 수비는 비록 무너졌지만 적도 큰 타격을 받아 그들의 목표였던 전주성은 직접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가 호남이 보존되는 큰 전과를 거양했으니 웅치수비군은 실로 죽음으로써 그 소임을 다하였던 것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왜군은 1592년 7월 8일 본격적으로 웅치를 공격하였으나, 전라도 관군과 의병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웅치를 넘은 왜군은 안덕원까지 진출하였으나, 동복현감 황진이 이를 격퇴하고 전주 부성과 전라도 방어에 성공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웅치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산화한 호국 의사들의 위업을 드높이고자 옛 전적지에 이 비석을 세우니 우리 모두 웅치 준령에 깃들어 있는 호국정신을 계승하여 국토방위의 결의를 다짐하자. 1969년 12월 전라북도 세움'
정담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가마실길 23-4 장열공사당(莊烈公祠堂, 문화재자료 77호)에 모셔지고 있다.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구암리 381에는 '황박 정려'가 세워졌고, 뒷날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 때 장렬히 전사한 이복남은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636 남원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웅치 전적비 비문에 중상을 입고 후송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변응정은 7백의총 종용사에도 모셔져 있지만, 1930년대에 충장사(忠壯祠, 세종시 전동면 동막골길 73-41), 1988년에 추모비(청람리 전동면 운주산로 836 개미고개)가 세워졌다. 그런데 충장사 앞 안내판에는 변응정이 웅치 전투에서 순절한 것으로 적혀 있다.
안내판은 '변응정은 (웅치 전투) 출전에 앞서 동생을 통해 홀로 남으실 노모에게 작별의 뜻으로 입던 옷과 머리카락, 손톱을 함께 보내드리고, 죽으면 이것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부탁하였다. 전투에 앞선 그의 비장한 각오를 엿볼 수 있다.'면서 '웅령(웅치)에서 전사'했다고 말한다. 웅치전적비의 내용과 전혀 다르다.
변응정은 중상? 전사?문중에서는 안내판의 내용을 왜 이렇게 웅치전적비와 다르게 밝혀두었을까? 물론 중상이 아니라 전사로 적은 것은 문중이 임의로 그렇게 한 일은 아니다. 류성룡의 <징비록>, 송시열이 쓴 '묘표(墓表, 변응정 묘소 앞의 비문)'에서부터 최근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에 이르기까지 변응정은 웅치 전투에서 전사한 인물로 기술되어 있다.
<선조실록> 1594년(선조 27) 4월 3일 기사에도 변응정은 웅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실록은 '전라도 웅치 싸움에서 김제군수 정담이 온종일 힘을 다하여 적을 무수히 죽였으나 결국 화살이 떨어져 군대는 패하고 자신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전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정담이 힘껏 싸워 적을 꺾은 공이 큽니다. 해남현감 변응정도 강개한 마음으로 죽기를 맹세하고 싸우다가 역시 웅치 싸움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못내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조정에서 미처 알지 못하지만 나라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선조실록> 1596년(선조 29) 4월 6일 기사에는 변응정이 금산에서 죽은 것으로 나오고,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8월 1일 기사에도 '해남현감 변응정이 (중략) 조헌과 함께 금산을 공격하기로 약속한 바 있었는데, 관군과 함께 기일에 늦게 되었다. 변응정이 조헌의 패사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어찌 의병장과 약속을 하고서도 지키지 못해 함께 죽지 못했단 말인가." 하며 즉시 군사를 이끌고 단독으로 진군하여 성 아래에서 격투하다가 전사하였다. 변응정의 부친 변협(邊恊)은 대장으로서 위엄과 명망이 있었는데, 왜난(倭難)이 있기 전에 사망하였다. 변응정은 강개하고 지조가 있었는데, 벼슬한 지 오래 되지 않아 순국하였으므로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겼다.'라고 되어 있다. 웅치가 아니라 금산에서 전사했다는 내용이다.
이형석은 "우리의 전사(戰史) 기록이 대개 이 정도이니 한심한 노릇이다.' 하고 한탄했다. 물론 그렇다. 그래서 오늘 나는 임진왜란 주요 전투 장소 중 한 곳인 웅치 전적지의 기념비, 변응성 장군 사당과 추모비를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길안내를 하느라 하루를 보냈다. 요약하자면, "오늘도 보람 있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