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숭산(嵩山), 무림에서 숭산하면 누구나 소림(小林)을 떠올리지만, 저자거리의 장삼이사에게 숭산이란 오악(五岳) 중의 하나인 중악(中岳)으로 통한다. 동악 태산(泰山), 서악 화산(華山), 북악 항산(恒山), 남악 형산(衡山)이 중원을 팽팽히 잡아당기자 가운데 볼록 솟아나는 곳이 있으니 바로 중악 숭산이라.
세속의 권위는 태산을 으뜸으로 치지만, 세속 너머를 보는 자는 숭산을 흠모하였다. 숭산은 예로부터 출가자, 도망자, 패배자, 추방자, 은둔자들이 스며들었고 숭산은 또 그들을 넉넉히 품어주었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절연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열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위자연을 노래하지 않고 권토중래를 뇌까렸다.
부리부리한 눈의 서역 승려가 숭산 소림사에서 선풍(禪風)을 일으킨 지 어느덧 천년. 천년 세월 동안 부처의 깨달음은 늙은 조사의 화두 속에서 피었다 지었고, 젊은 승(僧)의 무예 속에서 살아났다 죽었다를 반복했다. 달마조사의 뜻은 선(禪)과 무(武)의 갈래로 뻗어갔으니, 선은 드넓은 세상을 향해 소림을 떠났고, 무는 단단히 응결시키며 소림에 남았다.
소림사는 소실봉에서 뻗어내린 줄기가 여인네 치마폭을 펼치듯 완만하고도 너른 지형을 이루어 접근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뒤로 웅장한 산세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마치 중생의 번뇌를 짊어진 고행승처럼 결연하였다.
해가 중천에서 스스로를 과시하는 오시(午時) 경, 소림의 입구에 훤칠한 남녀가 조용한 걸음으로 산문을 넘어 갔다. 일주문, 천왕문을 지나 해탈문에 이를 무렵 어린 사미(沙彌)가 나타나 남녀를 제지했다.
"시주님들은 어인 일로 저희 산문을 넘으려시는지요?"사미는 낭랑한 목소리로 남녀의 용건을 물었다. 소림은 일반인들의 왕래를 철저히 통제하고 사전에 통보, 승인받은 사람들만 방문을 허용했다.
"우리는 묘적암이란 암자를 찾으러 왔어요. 혹시 사미께서는 아시는지요?"혁련지가 상냥하게 물었다.
"묘적암이라………,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사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해탈문 옆에 있는 전각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이십 대 중반의 젊은 승려 하나가 나타났다. 단단한 체구에 눈에 정기가 어린 걸로 보아 소림 무학(武學) 제자인 것 같았다.
"잠깐 들어오시죠. 시주님들."젊은 무승이 소림의 예법대로 한 손 합장을 하며 남녀를 안내했다. 전각은 방문하는 사람들의 절차를 밟기 위해 대기하는 곳이었다. 누군가에게 통기를 하고, 누군가로부터의 답을 전하고, 이러저러한 절차가 완료되었다고 해서 방문자가 임의대로 행동할 순 없었다. 산문 안에서 안내하는 승려가 마중 나와야 비로소 경내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소림이었다.
젊은 무승은 탁자에 앉으며 관조운과 혁련지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소승이 과문한 탓인지 묘적이라는 당호를 가진 암자는 들어본 적이 없군요."무승은 남녀를 일별한 후 말을 이었다.
"소림사에는 백이십여 개의 크고 작은 암자가 있습니다. 그것도 소림총림에서 인정된 정식 암자만 그렇다는 거지, 인가 받지 않은 암자까지 치면 삼백여 개가 넘습니다. 이백 리 숭산 자락 곳곳에 숨어 있는 암자를 본산에서 다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아미타불."젊은 무승은 염불을 덧붙이는 걸로 남녀를 위로했다.
관조운은 난감했다. 소림이 큰 사찰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으나 그에 딸린 암자도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정식 인가 받지 않은 암자까지 치면 삼백여 개라니. 칠십이봉 숭산의 품을 샅샅이 뒤진다면 과연 얼마나 걸릴까 한 달? 두 달? 그런다고 묘적암을 찾을 수 있을까. 다쓰러져 가는 움막에 편액만 걸어놓은 토굴일 수도 있고, 산속의 초옥이나 다름없는 외양 때문에 스쳐지나갈 수도 있다.
이때 산문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노스님이 들어왔다. 안면이 붉고 볼에 살집이 잡혀 푸근한 느낌인데 눈썹이 눈꼬리까지 길게 내려와 무척 인상적이었다.
"제자 보희(普稀), 큰스님께 인사드립니다."젊은 무승은 일어나서 공손히 합장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노스님은 보희에게 개의치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큰스님께선 대처에 다녀오시는 지요?"보희가 출입부에 기록을 하기 위해 붓을 들며 물었다.
"금릉에서 손님이 오셔서 마중 나갔다 오는 길이다. 늙은 당나귀가 오랜만에 산문 밖을 나서니 세사가 번거롭구나.""중생의 모습이 곧 부처의 모습이라고 들었습니다. 큰스님의 행차가 어찌 번거롭기만 하시겠습니까."노스님은 보희의 대꾸에서 산문의 갑갑함을 벗어나고픈 젊은 혈기를 느꼈다. 노스님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희야, 사판(事判) 또한 수행 방편이니 번다를 외면치 말고 수고를 다하거라."노스님은 젊은 제자가 출입을 관리하는 잡다한 사무에 행여 마음이 상할까봐 부드럽게 타일렀다.
"큰스님, 혹시 묘적암이라고 아시는지요?"보희가 노스님의 마음을 얻으려는 듯 방문자의 용무를 꺼냈다.
"묘적암? ……시주님들은 뉘신지요?"노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조운과 혁련지를 쳐다보았다. 눈꼬리에 매달린 흰눈썹이 벌썩 일어나는 것 같았다.
"저희는 허산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허…산…이라."노승은 허산의 법호를 뇌까리며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이 늙은이와 얘기 좀 나눕시다."노승이 접객소 안의 또 다른 방으로 관조운과 혁련지를 안내했다.
"일단 소림사에서 묘적암이란 암자는 없소이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이름을 바꿨다고 해야겠지. 그래서 밖에 있는 접객승 보희가 몰랐던 것이오. 묘적이란 당호는 현재 향적암이란 명칭으로 바꿔었소. ……그래, 허산에게는 무슨 볼 일이 있으시오.""저희들은 비영문 일운상인의 제자입니다."관조운이 답했다. 이어 그는 스승님의 갑작스런 횡액과 그의 유언에 따른 여정을 따랐더니 이곳 소림사까지 오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암시로 가득 찬 시문집의 자세한 내용은 설명하지 않고 그저 스승님의 유지로 볼 때 허산스님을 뵙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서 찾아 왔다고 했다. 노승은 모충연이 암습을 받아 운명했다는 대목에서 저런, 하고 혀를 찼다.
"나 원명(原明)은 일운상인과 직접 대면한 인연은 없지만 그가 강호에 남긴 발자취는 익히 알고 있다네. 의인이 비명에 가시다니 안타깝지 그지없군… 쯧쯧."노승 원명은 관조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허나, 안타깝게도 허산스님은 삼년 전에 입적(入寂)하셨다네."원명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관조운은 흠칫 놀랐다. 은화사와 금의위의 눈을 피해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이 모든 수수께끼를 해결해 줄 허산스님이 돌아가셨다니 온 몸에 힘이 빠졌다.
"그러면 현재 묘적암 아니 향적암엔 누가 계신지요?""허산의 제자가 있지, 아마?""대사님께서는 허산스님과는 어떤 인연이시온지……"혁련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산의 본래 법명은 원희(圓熙)였다네, 자배(字輩)로 짐작하겠지만 나와 같은 원(圓) 자(字) 항렬의 동배(同輩)이지. 원 자 동문 중 가장 뛰어난 무승이었는데, 이십여 년 전 강호를 주유하고 돌아오더니 돌연 무(武)를 버리고 선(禪)을 취하겠다며 묘적암을 짓고는 산문을 닫아걸었다네, 그렇게 십년을 무문(無門)하다가 팔년 전 다시 개문(開門)을 하고 제자도 받아들였다네."원명대사는 다탁 앞에 높인 차를 한 잔 마시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허산 입적 후 본산에서 묘적암의 당호를 향적암으로 바꾸었다네.""당호를 바꿀만한 이유가 있었는지요?"관조운이 물었다.
"다비식 후 허산의 사리를 어디로 안치할 것인가를 놓고 원로들의 의견이 분분했지. 공덕이 높은 스님은 탑을 세워 탑림(塔林) 안에 모시는 것이 소림의 전통이지만, 허산의 건탑을 놓고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네. 무의 성취나 소림의 위상을 높인 공으로 볼 땐 아홉자 탑을 세워도 모자람이 없다는 의견과 소림의 길을 벗어났기 때문에 탑을 세울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이 팽팽했지."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혁련지가 조급하게 물었다.
"일단 사리를 보관할 가묘탑을 세우고 향후 다시 의논하기로 했다네. 가탑(假塔)은 삼년 이내에 존속 여부를 다시 추인하기로 되어있지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대개 진탑(眞塔)으로 인정받고 넘어가지. 대신 당호를 향적암으로 바꾸었다네.""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혁련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더 이상은 묻지 않기 바라네. 본 절 내부의 일이니까."원명이 단호한 말투로 답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갈 순 없고, 향적암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겠습니까?"관조운이 물었다.
"본당 안의 장경각을 지나 태실봉으로 오른 다음 그 너머 자실봉으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지만 권하고 싶지 않은 길이구먼."원명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남녀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빈승은 과거 도반 시절부터 허산의 높은 경지를 흠모하였고, 일운상인 모대협 또한 그 의기를 높이 사고 있었다네. 자네들이 모대협의 제자들이라서 특별히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니만큼 허산의 입적과 관련한 사연은 함구해 주기 바라네. 솔직히 말하자면 현 소림에서 허산을 입에 올리는 건 금기가 되어 있다네. 자네들은 이 길로 조용히 산문을 내려가 다른 길로 우회하여 자실봉으로 가게."원명대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자기로서는 할 말을 다했다는 표정이었다.
"대사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희로서는 캄캄한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관조운과 혁련지가 포권을 취하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허산과 빈승 사이에 맺어진 삼세의 연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고 봐야겠지. 부처님의 가호가 있기를, 아미타불!" 대사는 해탈문 입구까지 나와 한 손으로 합장을 하며 남녀를 배웅했다.
숭산은 태실봉을 주봉으로 하여 좌우로 서른다섯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얼핏 봐서 서른다섯이지 봉우리 안에 높낮이가 다른 새끼 봉우리를 품고 있는 봉이 많아 자세히 살피면 칠십이봉이다. 자실봉은 태실봉에서 우측으로 세 번째 봉우리였다. 서북으로 능선이 뻗어 낙양에 좀 더 가깝고 정주와 등평 쪽으론 멀어졌다.
중악이란 별호가 말해주듯 숭산은 봉우리마다 바위가 나한처럼 우뚝우뚝하다. 허나 자실봉(慈悉峰)만큼은 험상궂은 사내 속에서 다소곳이 서 있는 새악시처럼 흙으로 덮여 있는 토산이다. 토산답게 산세가 가파르지 않고 품이 넓었다.
향적암은 자실봉의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서 산세가 막 가팔라지기 시작할 지점의 널찍한 공터에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과 나한전 그리고 요사채로 이루어진 소박한 암자였다. 관조운과 혁련지가 인기척을 냈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사위는 조용하다 못해 괴괴하였다. 늦봄의 햇살만이 심심풀이로 마당을 데우고 있었다.
관조운이 마당을 가로질러 대웅전을 열어보았으나 잠겨 있다. 나한전에도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남은 요새채를 쪽으로 돌아가던 관조운이 깜짝 놀랐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누군가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앉은 사람은 이쪽의 기척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땅만 보고 있다. 잿빛 무명옷에 때가 낀 두건을 썼다. 스님은 아닌 것 같았다. 농인(聾人)인가? 관조운이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실례합니다."관조운이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앉아 있는 사람이 갑자기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관조운은 그가 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사마귀와 작은 도마뱀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덩치로 보면 사마귀가 더 컸다. 사마귀는 상체를 세운 채 앞발을 허공에 번갈아 긁으며 위협을 하고 도마뱀은 대가리만 곧추 세운 채 사지를 땅에 대고 엎어져 있다. 사마귀가 도마뱀의 대가리를 앞발로 툭 쳤다. 도마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마귀가 도마뱀의 면상 앞에서 좌우 앞발로 연이어 휘두르자 도마뱀이 위협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사마귀가 입을 쩍 벌리고 도마뱀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날카로운 엄니로 도마뱀의 목을 노린 것 같았다. 그러나 도마뱀의 순간 동작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새 몸통을 돌려서 대가리가 반대 방향으로 향함과 동시에 꼬리를 사마귀를 향해 휘둘렀다.
휘청, 꼬리에 몸통을 맞은 사마귀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도마뱀은 꼬리를 휘두른 관성을 이용해 다시 한번 반원을 그리며 대가리가 사마귀 쪽으로 향했다. 이어 순식간에 튀어올라 사마귀의 목을 물었다. 가느다란 사마귀의 목이 툭, 떨어졌다. 이 모든 것이 한 동작에 이뤄졌다. 도마뱀은 사마귀의 몸통을 물고 풀숲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도마뱀과 사마귀의 싸움이 끝나자 앉은 이가 비로소 관조운을 쳐다보았다. 노인이다. 막 갈은 밭처럼 얼굴에 주름이 자글하다. 콧날이 고집스레 서고 광대뼈는 약간 튀어나왔지만 턱이 둥그스름해 사나워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눈이었다. 텅 빈 느낌이다. 공허라고 표현할 수 없는 끝 모를 심연이 담긴 눈이었다.
눈이 마주쳤건만 노인이 자신을 쳐다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관조운의 시선은 노인의 눈길 안에서 영원히 닿지 못할 허공을 헤매는 것 같았다. 노인이 서서히 일어났다. 아무런 말도 없고 표정도 없었다. 보통 키에 소박한 복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