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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명 선생이 말에 탄 채 창의를 호소하여 쓴 <마상격문>으로, 칠백의총 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고경명 선생이 말에 탄 채 창의를 호소하여 쓴 <마상격문>으로, 칠백의총 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 칠백의총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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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6월 1일 기사는 '여러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면서 전국 각지의 창의(倡義) 소식을 전한다. 이날 기사는 전쟁 초기에 조선이 일방적으로 밀린 이유를 '당시 삼도(三道,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장수와 수령들이 모두 인심을 잃은 데다가 변란이 일어난 뒤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밉게 보아 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전쟁 예측 오판과 대비 부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기사는 의병이 일어난 까닭을 '큰 가문과 이름난 인사들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창의하자 사람들이 호응하여 멀리서 가까이서 모여들었다.'라는 문장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기술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로부터 '모든 의병들이 조정의 명을 받고 일어난 것 같이 기술하고 있으나 관군도 조정의 명령에 잘 따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의병장이나 의병들이 조정의 명령에 의하여 봉기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라는 비판에 직면한다.

의병, 한 건 없지만 덕분에 국가 명맥 유지?... 이상한 기록

<신편 한국사>는 '경상도에서는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 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서 의병이 조직되기도 하였으나 거의 자발적인 의병의 봉기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실록의 기사는 '(의병이) 크게 이룬 것은 없지만 인심을 얻었기 때문에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식으로 앞뒤가 완전히 모순되는 표현까지 하고 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의병들 덕분에 나라가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흔히 농담으로 말하는 '먹은 것도 없이 배 부르다' 부류의 잡담인 셈이다.

어쨌든 수정실록은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 호서(湖西, 충청도)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형석의 <임진전란사>에 따르면, 고경명이 의군기(義軍旗, 의병 군대의 깃발)를 높이 세워 군사들을 모으고, 의병장으로 추대된 때는 1592년 5월 29일이었다. (칠백의총 기념관의 <금산 지역 전투도>에는 고경명이 6월에 담양에서 창의했다고 표시되어 있다.)

 위의 지도는 칠백의총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임진왜란시 금산 지역 전투도>에 약간의 가필을 한 것이다. 맨 오른쪽 주황색 일대가 금산군수 권종이 전사한 최초의 전투 지역이고, 맨 왼쪽의 녹색 지역이 권율, 황진 등의 분투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이치 대첩지이다. 이치대첩 다음날 고경명의 의병군이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몰하는 곳이 빨간 동그라미 일대이고, 다시 조헌과 영규 의병군이 2차 금산성 전투 끝에 칠백의총을 낳고 마는 지역이 노란 동그라미 일대이다. 아래의 보라색 일원은 조헌 전사 소식을 들은 변응정이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전사지이다.
 위의 지도는 칠백의총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임진왜란시 금산 지역 전투도>에 약간의 가필을 한 것이다. 맨 오른쪽 주황색 일대가 금산군수 권종이 전사한 최초의 전투 지역이고, 맨 왼쪽의 녹색 지역이 권율, 황진 등의 분투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이치 대첩지이다. 이치대첩 다음날 고경명의 의병군이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몰하는 곳이 빨간 동그라미 일대이고, 다시 조헌과 영규 의병군이 2차 금산성 전투 끝에 칠백의총을 낳고 마는 지역이 노란 동그라미 일대이다. 아래의 보라색 일원은 조헌 전사 소식을 들은 변응정이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전사지이다.
ⓒ 칠백의총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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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6월 1일자는 고경명의 창의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증언해준다는 점에서 훌륭한 가치를 지닌 기록이다. 이날 기사에 따르면, 광주에 살던 전 동래부사 고경명은 '적이 경성(한양)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듣고,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일을 도모'한다. 그는 격문을 써서 전라도 백성들에게 배포한다.

'(전략) 우리 본도(전라도)는 예로부터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이성계)께서는 황산(黃山,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삼한(三韓)을 다시 일으키셨고, 선조(先朝, 고려)의 낭주(朗州, 전남 영암) 전투에서는 한 척의 배도 되돌아가지 못했다. (이런 일들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빛나게 비춰지고 있다. (그렇게) 유사시에 용맹을 뽐내며 적의 성벽에 먼저 오른 자는 이 도의 사람들이었다.'


 고경명의 후손들이 1952년에 새로 세운 <제봉 고선생 순절지 기(記)>비
 고경명의 후손들이 1952년에 새로 세운 <제봉 고선생 순절지 기(記)>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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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의로운 소문은 사라져버렸고,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무너져 한 사람도 적과 교전하는 이 없이 모두들 제 몸만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획만 하고 있다. 혹시 (남에게) 뒤질세라 머리를 움켜쥐고 쥐처럼 도망을 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본도의 사람으로서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짓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적의 형세가 크게 꺾이고 왕의 위엄이 날로 확장되니 이야말로 대장부가 공명을 세울 기회이고 군부(君父)의 은혜를 보답할 때이다.'

'경명은 장구(章句, 글)나 외는 오활한(세상 경험이 부족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인데 이렇게 단(壇)에 올라 망령되이 대장으로 추대되니 이미 흩어진 사졸의 마음을 수습하고 여러 동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까 두렵다.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 같아 금월 11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우리 도내의 모든 사람들은 아비는 그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그 동생을 도와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일어나자. 원컨대 속히 결정하여 착한 일을 따르고 미혹된 나머지 스스로를 그르치지 말라.'

60세 고령의 선비 고경명, 사람들 추대 사양 않고 의병장 수락

당시 고경명은 이미 60세의 고령이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이 맹주(盟主)로 추대하자 사양하지 않았다. 이에(고경명이 의병장을 맡자) 선비와 서민들이 많이 응모하여 군사 6천여 명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격문을 여러 도에 전하였는데 문사(文辭)가 격렬하고 절실하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외며 전하였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뒤인 7월 1일 실록에는 '의병장 고경명이 금산의 적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본문은 고경명이 '의병군 6∼7천 명을 이끌고 (임금이 계시는 쪽을 향해) 북상하여 여산(礪山, 전북 익산)에 주둔'했는데 왜적이 호남 지역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들은 '휘하 장사들이 본도를 염려하여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임금이 계시는) 북쪽으로 정벌할 것을 다투어 청하자 경명이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군사를 진산(珍山, 금산군 진산면)으로 옮겼다.'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조선 효종 때 세워졌다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 경찰에 의해 파괴된 고경명 선생 순절비를 보호하고 있는 나무 비각과, 1952년에 다시 세워진 비가 고경명 선생이 순절한 눈벌 쪽을 보라보며 서 있다.
 조선 효종 때 세워졌다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 경찰에 의해 파괴된 고경명 선생 순절비를 보호하고 있는 나무 비각과, 1952년에 다시 세워진 비가 고경명 선생이 순절한 눈벌 쪽을 보라보며 서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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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이치 전투('당신이 잘 모르는 임진왜란 속 또다른 대첩' 참조)에서 권율 군에게 대패한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성 안에서는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고경명은 이튿날 동틀녘에 다시 방어사 곽영과 함께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켰다.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고경명은 서문을 쳤다. 하지만 왜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해서 성 밖으로 나와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관군의 선봉장인 영암군수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쳤다. 그 바람에 관군이 크게 패하였다.

고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시위를 당긴 채 서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군사가 달려오며 '관군이 도망치고 있다.' 하고 황급히 외쳤다. 이어 왜적들이 밀려왔다. 놀란 의병군의 대오는 삽시간에 무너졌다. 그 와중에 고경명이 사람들에게 밀려 말에서 떨어졌다. 말은 달아나 버렸다. 종사관 안영(安瑛)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고경명에게 양보하여 타게 하고 자신은 걸어서 뒤를 따랐다. (윤근수가 쓴 '고경명 비명'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공은 일찍이 "나는 말타기에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우다 패하는 날에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오늘 죽을 수밖에 없으니 그대는 빠져 나가시오"

건장한 말을 타고 있던 종사관 유팽로가 의병장이 보이지 않자 종에게 '대장은 무사한가?' 하고 물었다. 종이 '아직 못 나오셨습니다.' 하였다. 유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전투 지점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유팽로를 발견한 고경명이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하고 외쳤다. 유팽로는 '어떻게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바라겠소.' 하고 끝까지 안영과 함께 고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중에서 모두 전사했다. 고경명의 둘째아들 고인후(高因厚)도 이날 진중에서 죽었다.

기사는 '경명은 문학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라면서 '(고경명의) 풍류와 문채는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바였다. 중년에는 벼슬길이 막혔으나 조용한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리에 임해 절개를 드러내었으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일찍 기용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경명 선생의 글과 행적이 수록된 <제봉문집>으로 칠백의총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경명 선생의 글과 행적이 수록된 <제봉문집>으로 칠백의총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칠백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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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의 장남 고종후(高從厚)는 어떻게 되었을까? <선조수정실록> 1593년(선조 26) 6월 1일자에서 '글을 잘하고, 그 아버지(고경명)의 면모가 있었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임피(臨陂, 군산) 현령으로 있었던' 고종후의 기사를 본다. 고종후는 아버지 고경명이 죽을 때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고경명이 전사한 곳에서) 뒤쪽에 멀리 처져 있었던 탓에 아버지를 따라 죽을 수 없었음을 통한해 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아우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낸 뒤 죽기로 맹세'하였는데 다른 사람에게 준 서신에 '어버이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였으니 어찌 살겠는가. 분명하게 죽기를 바랄 뿐'이라며 굳은 의지를 밝혔다.

고종후는 '부친의 남은 병사를 거두어 별군(別軍)을 만든 후 상복을 입은 채 종군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10월 1일).' 그의 마지막 전투 장소는 진주성이었다. 진주성이 곧 왜적의 포위망에 갇히려는 즈음, 김천일은 '고종후의 온가족이 모두 죽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밖에 나가기를 권했다. 하지만 고종후는 김천일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때 고경명의 얼제(孽弟, 배다른 동생) 고경형(高敬兄)도 끝까지 고종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왜적과 싸우다가 끝내는 촉석루 아래 남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형과 동생, 두 아들이 모두 죽은 고경명 집안

고경형에 대한 증직 기사는 <숙종실록> 1713년(숙종 39) 5월 25일자에 실려 있다. '진주에서 전사한 여러 사람들이 모두 포상의 은전을 입었는데, 유독 고경형만이 측미(側微, 미천)한 사람이라 하여 상을 받지 못했다. 박희진(朴熙晉)이 이 문제를 거론하자 임금이 고경형에게 증직을 하라.'는 분부를 내렸다는 내용이다.

 돌담장 안으로 보이는 고경명 선생 순절비가 보인다.
 돌담장 안으로 보이는 고경명 선생 순절비가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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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796년(정조 20) 8월 9일자에도 '사후 포상하는 은전이 베풀어지지 못하였으니, 증직을 더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고 임금에게 건의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런데 윤시동이 '임진년의 의병장 양대박(梁大樸)과 그 아들 양경우(梁慶遇)에게 증직이 내려져야 마땅합니다.' 하고 아뢰었을 때 정조의 답변이 놀랍다. 정조는 '이 사람(양대박)이 의를 부르짖은 것은 증 영상 고경명보다 앞서고, 그 용단은 충무공 이순신보다도 뛰어났으며, 자기 몸을 던져 충성을 바친 것은 이 두 사람과 같았다.'라며 최고의 찬사를 양대박에게 헌사한다.

정조는 '(양대박이 남긴) 문집을 한 번 보니 빼어난 바가 특출하여 마치 말을 올라타서는 적을 토벌하고, 말에서 내려서는 격문을 짓던 그 모습을 보는 듯하였다.'면서 양대박과 양경우의 문집을 인쇄하여 올리라는 명까지 내린다. 양대박은 당대의 이름높은 시인이자 의병장으로, 금산 전투를 앞두고 진중에서 병으로 타계했다.

고경명과 함께 죽은 김덕홍은 의병장 김덕령의 형

고경명과 함께 1차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사람 중에는 의병장 김덕령의 형 김덕홍(金德弘)도 있다. <정조실록> 1785년(정조 9) 9월 5일에 보면, '김덕홍이 임진란을 맞이하여 그 아우 김덕령과 더불어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군병을 거느리고 전주에 이르렀을 때 김덕령에게 "노모가 집에 계시고 막내아우(김덕보)는 아직 어리니 너는 돌아가 노모를 모셔야겠다.' 하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의병을 거느리고 싸움터에 나아가 고경명과 함께 죽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 후 김덕령은 '(고종후처럼) 상복 차림으로 의병을 일으켜 이름을 크게 떨쳤다. (중략) 불행히도 시기하는 자가 무고하여 죄가 없는데도 죽임을 당하였다. (중략) 김덕보는 두 형이 비명에 죽은 것을 애통히 여겨 세상일에 뜻이 없었지만, 정묘년(1627년, 인조 5) 건주위(建州衛, 만주 남쪽 여진족 거주 지역) 오랑캐의 난리 때 안방준(安邦俊)과 합심하여 의병을 일으켰는데, 마침내 노병(老病)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1712년(효종 27)에 금산군수 여필관이 세운 것으로 알려지는 고경명 선생 순절비는 1940년 일본 경찰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지금은 파괴된 빗돌들을 다시 붙여 나무 비각 안에 보호해 두었다.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522-14 소재.
 1712년(효종 27)에 금산군수 여필관이 세운 것으로 알려지는 고경명 선생 순절비는 1940년 일본 경찰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지금은 파괴된 빗돌들을 다시 붙여 나무 비각 안에 보호해 두었다.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522-14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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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522-14번지 도로변 얕은 언덕 위에 '고경명 선생 비'가 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28호인 이 비는 고경명 의병장이 순절한 눈벌 들판을 저 아래로 내려다보며 서 있다. 금산읍에서 금성면 소재지로 나아가는 1차선 차도가 급하게 휘어지는 도로변에 있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기 쉬운 곳이다. 다만 도로와 맞붙은 진입로 입구에 차 한 대를 세울 공간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현지 안내판을 읽어본다.

'(이곳의 고경명 선생 비는)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 선생이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한 사실을 새긴 비이다. 선생은 1588년(명종 13)에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에 이르렀는데 서인이 몰락할 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명종실록> 1558년 11월 2일 기사에 '문과에 고경명 등 35인을 뽑고, 무과는 남언순 등 28인을 뽑았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고경명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라는 내용은 <선조수정실록> 1589년 10월 1일자에 나온다. 고경명이 동래부사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맡고 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전쟁 발발 당시 동래부사는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장렬하게 순절한 송상현인데, 만약 고경명이 당시 동래부사 직에 있었다면 임진왜란의 역사는 어느 부분에서 얼마만큼 바뀌었을까? 적어도 '호남 의병장 고경명'은 볼 수 없었을 것 아닌가. ('왜장들까지 애도 표시한 한 선비의 죽음' 참조)

'(고경명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모집한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1592년 7월 10일에 금산에 침입한 일본군과 싸우다 눈벌(臥殷坪)에서 전사하였다. 효종 때 금산군수 여필관(呂必寬)이 비문을 지어 선생이 전사한 곳의 건너편 산기슭에 순절비를 세웠으나, 1940년 일본 경찰의 만행으로 비가 파괴되었다.'

'(우리가 지금 보는 모습은) 비석의 파편을 한식(韓式) 비각 안에 정리하였고, 2002년 파비(破碑, 부서진 비석)를 복원하였다. 1952년 후손들이 여필관의 비문을 다시 새겨 그 비를 1962년에 세워진 석조(石造) 비각 안에 보존하였다.'

 고경명 선생의 순절을 기려 1952년에 세워진  <제봉 고선생 순절지 기(記)>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1962년 건립된 석조 비각이 이채롭다.
 고경명 선생의 순절을 기려 1952년에 세워진 <제봉 고선생 순절지 기(記)>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1962년 건립된 석조 비각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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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의 설명처럼, 이곳의 고경명 선생 비의 비각은 무엇보다도 석조(石造)라는 점에서 아주 특이하다. 아마도 후손들은 이 비가 앞으로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고 잘 보존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돌로 비각을 지었을 것이다.

비각의 네 기둥은 마치 고경명, 고경형, 고종후, 고인후 네 사람을 기리는 듯 비를 감싸고 서 있다. 사방 어디에도 기둥을 잇는 벽이 없어 동서남북으로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고, 하늘의 흰구름도 거리낌없이 한가롭게 흘러간다. 바람도 막힘 없이 기둥 사이를 시원하게 지나간다.

문득 바람소리가 조헌의 울음찬 목소리로 바뀌어 귀를 파고든다. 조헌은 고경명과 합세하여 금산의 왜적을 공격하기로 했었지만 그때까지 의병을 못 모아 1차 금산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 조헌은 고경명이 전사한 후 승병장 영규와 힘을 합쳐 2차 금산 전투를 벌였지만 고경명의 원수를 갚지 못한 채 그 역시 전몰했다. 조헌은 청주성을 되찾은 후 금산으로 남하하면서, 고경명과 함께 금산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홀로 나아가는 아픈 마음을 시로 나타내었다.  

東土豼貅百萬師 표범처럼 날쌘 동방의 백만 병사들이
如何無術濟艱危 어찌 이 난간의 위기를 구하지 못한단 말인가
荊江有約人何去 형강(금강)을 함께 넘자 했던 그대는 어디 가고
擊楫秋風獨渡時 이제 나 홀로 건너니 찬바람이 노를 치누나

 조헌은 고경명과 함께 금산의 왜적들을 공격하기로 했었지만 미처 의병을 모으지 못해 1차 금산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 조헌은 고경명이 전사한 이후 영규대사와 함께 2차 금산 전투를 치르다가 전몰했다. 조헌은 2차 금산 전투를 위해 청주에서 남하하여 형강(대청댐 아래, 신탄진에서 문의면으로 가는 도중의 금강 일부)을 건너면서 고경명을 그리워하는 시를 남겼다(본문 내 참조). 사진은 대청댐 아래 오가삼거리(사진 오른쪽의 강물이 쑥 들어간 곳)와 대청문화전시관 사이의 형강의 풍경.
 조헌은 고경명과 함께 금산의 왜적들을 공격하기로 했었지만 미처 의병을 모으지 못해 1차 금산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 조헌은 고경명이 전사한 이후 영규대사와 함께 2차 금산 전투를 치르다가 전몰했다. 조헌은 2차 금산 전투를 위해 청주에서 남하하여 형강(대청댐 아래, 신탄진에서 문의면으로 가는 도중의 금강 일부)을 건너면서 고경명을 그리워하는 시를 남겼다(본문 내 참조). 사진은 대청댐 아래 오가삼거리(사진 오른쪽의 강물이 쑥 들어간 곳)와 대청문화전시관 사이의 형강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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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임진왜란#고종후#금산전투#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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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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