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영덕 영해의 물은 송천이다. 창수면에서 시작하여 영해들을 적시고 동해로 빠져나간다. 괴시마을에서 송천을 거슬러 오르면 창수면. 송천 북쪽에 인량마을, 남쪽에 원구마을이 있다. 인량은 창수면, 원구는 영해면에 속해있어도 예전에는 모두 영해고을이었다. 모두 고색창연한 골기와가 물결을 이루고 골기와 골마다 무거운 세월이 내려앉았다.
반쯤 누워있는 팔풍정 느티나무에 끌려 들어선 마을은 인량마을. 어진 사람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름이 어질고 어진 '인량(仁良)'일까? 삼한시대 우시국 도읍지여서 예전에는 나라골이라 불렸다. 아직도 마을사람들은 나라골을 더 좋아한다.
'8성씨 12종가'가 몰려 들었으니 두말하지 않아도 세상 살기 좋은 땅이다. 팔성씨를 두고 사람마다 입이 다르나, 재령이씨, 안동권씨, 대흥백씨, 영양남씨, 무안박씨, 영천이씨, 야성정씨, 함양박씨, 평산신씨, 선산김씨는 누구 하나 빼놓지 않는다.
종택들은 산 아래 높은 곳에 있고 그 아래 각 종가 후손집들이 들어섰다. 동쪽에 삼벽당, 용암종택이 한자리 차지했고 가운데에 만괴헌과 안동권씨 집안인 오봉종택과 강파헌정침, 지족당이 있다. 서쪽에 재령이씨 집안 충효당과 그 아래에 우계종택, 갈암종택이 자리 잡았다.
'8성씨 12종가' 들어선 인량마을과 종택들
삼벽당은 영천이씨 농암 이현보(1467-1555) 아들, 이중량(1504-1582)의 종택이다. 삼벽(三碧), 대나무와 소나무, 벽오동이 푸르다는 건데 벽오동은 보이지 않고 솔밭 아래 대밭이 바람에 술렁댄다. 술렁대는 대숲에 홀려 안채 굴뚝은 보지 못하고 왔다. 안채굴뚝이 기이하게 생겼다는 소문은 진작 들었는데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 굴뚝을 보고 왔어야 했다. 아쉬운 마음에 연락이 닿을 만한 분을 찾아보니, 다행히 <오마이뉴스> 김환대 시민기자가 남긴 사진이 있었다. 굴뚝은 아궁이 옆에 탑 모양으로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덩치가 크고 두툼해 뵈는 보기 드문 굴뚝이다.
마을길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용암종택 평대문을 보니 눈과 마음이 편하다. 솟을대문에 없는 평안함이다. 선산김씨 용암종택은 1728년, 용암 김익중(1678-1740)이 지었다. 사랑채 토방(흙마루)에 있는 굴뚝이 이채롭다. 고개를 쳐든 바다표범 닮았다. 바다사자로 의심도 해보았지만 뭉뚝한 주둥이로 봐서는 바다표범에 가깝다.
보라색 도라지밭길 따라 서쪽으로 가보았다. 멀리 뵈는 만괴헌 고택이 아늑하다. 내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채마밭에서 반갑게 맞이하는 마을분이 있었다. 평산신씨 만괴헌 신재수(1798-1855)의 후손이고 만괴헌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예전에는 영덕보다 영해가 더 큰 고을이었지요?' 분위기로 좀 생뚱맞았지만 말문이 막히면 물으려고 미리 준비해놓은 질문이었다. 이 분의 말이 청산유수다. 두 해에 걸쳐 영해에 흉년이 들었을 때 신재수어른이 4000냥 어치 구휼미를 내놓은 얘기부터 시작하였다.
의병부대의 재정을 맡아본 신의영, 영해3.18독립만세운동 선봉에 섰던 신상문을 비롯한 평산신씨 인량문중 후손 얘기까지 늘어놓으며 영해에는 신씨문중 외에 의병활동과 항일운동을 한 인물이 수두룩하다하였다. 이에 영해가 영덕보다 더 큰 고을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영해혼'을 지우려는 일본의 의도로 영덕으로 편입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만괴헌 아랫집이 신상문 집, 상지재(尙志齋)다. 집 구경하고 있는데 집 어른이 다가와 저 쪽 오봉종택이 더 좋다며 그쪽부터 가보라고 한다. 항일운동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만한데 개의치 않는 눈치다. 힐끗 보니 과연 오봉종택의 자태가 근사하다.
안동권씨 오봉 권책의 종택이다.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종족이 모두 극형에 처해졌을 때 당시 13세인 오봉은 나이가 어려 극형만은 면하고 영해로 유배 오면서 눌러앉게 된 것이다.
1900년대 초에 고쳐지은 것으로 보인다. 집채의 크기나 꾸밈새로만 보면 쓸쓸히 이곳에 들어온 권책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사당을 감싼 용비늘무늬 꽃담이 꿈틀대고 지은 지 얼마 안 된 벽산정은 아직 골기와 날이 서있다. 안동권씨 권위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장계향의 시댁, 충효당해는 서쪽하늘로 기울어 400년 묵은 은행나무에 걸렸다. 곁에 있는 충효당은 이함이 지은 재령이씨 영해파 종택이다. 입향조는 이애로 이함은 이애의 손자다. 이함은 은행나무 가지만큼이나 자손이 번성하여 청계 이시청, 우계 이시형, 석계 이시명과 이시성, 이시진까지 5남을 두었다.
충효당은 장계향(1598-1680)의 시댁이다. 장계향은 석계 이시명의 아내로 19세에 시집와 43세 때 영양 두들마을로 분가하기까지 충효당에서 살았다. 조선사회에서 여성성을 극복하고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한 여성으로서 두각을 나타내 '조선 유일의 여성군자'라 불렸다.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을 남겼다.
장계향은 이시명의 전처에서 난 1남 1녀를 포함, 7남 3녀를 두었다. '학문에 힘쓰고 이욕의 길로 내달리지 말라'는 이함의 유훈을 따른 것인가, 일곱 아들은 학문이 뛰어나 7현자소리를 들었다. 석계 이시명과 아들 존재 이휘일, 갈암 이현일, 항재 이숭일과 손자 밀암 이재는 가학을 전승하며 큰 학자로 성장했다.
장계향은 인정 많은 여성이었다. 시아버지 이함의 문집에 '장계향은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대문 밖에 큰 솥을 걸고 도토리 죽을 쒀 300명이나 되는 걸인을 먹였다고'하였다. 또 끼니 때 연기가 안 나는 집에 사람을 보내 양식을 주었다는 일화는 장계향의 인정이 얼마나 두터운 것이지 읽히는 대목이다.
충효당에 들었다. 충효당 대청마루 서까래는 마감질 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미완의 철학이다. 괴시마을 주곡댁에서 본 '미재(未齋)와 통한다. 완벽을 구하다 상처 입는 우리에게 경계의 종을 울리고 있다. 집 맨 위에 사당이 있다. 다리 벌리고 있는 회화나무가 놀랍다. 후손들 얘기로, 왼쪽가지가 무성하면 영양파 후손이, 오른쪽 가지가 무성하면 영해파 후손이 잘 된다나.
충효당 굴뚝 모두 처마를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동쪽에 있는 굴뚝은 연기구멍을 길게 빼긴 했어도 세 번 꺾어 기어코 처마를 넘지 않았다. 내 눈에는 이욕(利慾)을 세 번 꺾은 굴뚝으로 보였다. 이익과 욕심에 '목숨 걸지 말라'는 선조의 생각을 담은 거겠지.
장계향은 이시명 첫째부인이 난 이상일을 업고 5리 떨어져 있는 원구마을 남경훈 집을 찾아 교육을 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남경훈의 아들 남길은 원구마을에 난고종택을 지었다. 이제 장계향이 업고 걸었던 길을 따라 원구마을 난고종택에 가볼까 한다.
덧붙이는 글 | 6/27~29에 청송, 영덕, 영덕(영해)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