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회 입법조사처는 올해 4월 이색적인 보고서 하나를 내놨다. <기본소득 도입 논의 및 시사점>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에는 이제 한국에서도 노동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소득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입법조사처는 "한국의 경우 제조업 비중이 50%에 육박해 자동화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는 반면 일자리 감소에 따른 대량실업에 대응할 사회보장제도가 취약하다"고 설명했다.
일하지 않는데 나라에서 월급을 준다? 사람에 따라 황당하게 들릴 수 있는 주장이지만 세계적 관점에서는 그다지 생경한 얘기만은 아니다. 미국, 독일, 캐나다, 브라질 등 여러 나라가 이미 지난 반세기에 걸쳐 이에 대한 실험과 논의를 꾸준히 진행해왔다. 핀란드는 오는 2017년부터 전국 130여 만 가구 중 1만 가구를 뽑아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제도를 시범 실시할 예정이다.
1982년 기본소득 도입한 알래스카, 빈곤률·소득불평등 최저
기본소득 제도의 가장 기본적인 취지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 보장이다. 최소한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소득이 있어야 하니 그것을 국가가 보장하자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흑인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필두로 기본적인 소득보장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실제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닉슨은 1969년 최저 가족소득을 1600달러로 정하고 가구 소득이 이에 미달하면 국가에서 보조금을 지급하는 '가족보조 프로그램'을 발의했다. 이 제도는 미 하원을 통과한 후 상원에서 부결됐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자는 취지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노동의욕 저하 등 제도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꾸준했다. 일하지 않아도 돈을 준다면 누가 열심히 일을 하겠느냐는 우려였다.
197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이를 규명하기 위한 사회적 실험이 집중적으로 진행됐다. 뉴저지에서는 1357가구를 대상으로 3년 동안, 게리에서는 1800가구를 대상으로 3년 동안, 캐나다 매니토바에서는 1300가구를 대상으로 3년 동안 실험이 진행됐다. 특히 시애틀과 덴버에서는 809가구를 대상으로 길게는 20년까지 기본소득의 영향을 조사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노동 감소 효과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노동시간이 줄어든 것도 남자는 해고를 대비한 직업교육 훈련이 늘어서, 여자는 육아를 위해서였다. 학교 출석률, 주택 소유율, 영양 개선 등의 긍정적인 효과도 관측됐지만 실험 결과가 제도 도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북미의 기본소득 운동이 아예 실패한 것은 아니다. 알래스카 주에서는 석유 등 주내 천연자원 채취로부터 발생하는 수입을 기금으로 만들어서 그 투자 수익을 지난 1982년부터 지금까지 알래스카 주민들에게 매년 배당하고 있다. 알래스카 주민들에게 주어지는 배당액은 그것만으로 생활이 해결될 만큼 많은 금액은 아니다. 1982년 배당액이 1000달러였고, 가장 배당액이 많았던 2008년에도 3269달러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그 효과는 컸다. 현재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가장 빈곤율이 낮고 소득불평등이 적은 주로 꼽힌다.
핀란드 등 우파정부 "복지정책 없애는 대신 기본소득"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진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기본소득 담론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빠지면서 다시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오미타라 지역에서는 민간단체들이 합작해 2008년 1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지역주민 930명에게 매달 100나미비아 달러(1만4000~1만5000원)를 지급하는 기본소득 실험이 실시됐다. 결과는 북미 지역과 비슷했다.
빈곤율과 실업률이 큰 폭으로 낮아졌고 소득 상승률이 증가했다. 임금(19%)과 농업생산량(31%), 자영업 소득(301%)도 크게 증가했다. 어느 정도 안정된 소득환경이 더욱 활발한 경제활동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파 정부에서도 좌파들의 전유물이던 기본소득 개념을 차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핀란드는 지난해 12월 전 국민을 대상으로 매달 800유로(한화 약 100만 원) 정도를 지급하는 기본소득 제도를 빠르면 오는 2017년부터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중도 우파 성향의 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핀란드가 기본소득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는 높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다. 핀란드의 실업률은 최근 15년 사이 최고 수준인 9.53%. 실업자를 위한 복지정책이 워낙 잘 갖춰져 있다 보니 국민들이 저임금 일자리에서 일하기보다는 실업수당을 받는 것을 선호하는데,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대신 복지정책을 줄여 사람들의 취업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유하 시필레 핀란드 총리는 영국 텔레그라프지와의 인터뷰에서 "기본소득은 사회보장체계의 간소화를 뜻한다"고 말했다. 재원적인 측면을 따져보면 더 명확해진다. 핀란드의 모든 성인들에게 매달 800유로를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돈은 약 467억 유로로 추산되는데, 2016년 핀란드 정부의 예상 세수는 491억 유로 정도다. 국민들에게 월 100만 원씩 주는 대신 최저생계비와 연금 등을 포함한 모든 복지혜택을 퉁치겠다는 계산인 셈이다.
재원 마련이 가장 큰 현실 장벽핀란드는 학계의 타당성 조사를 거쳐 올해 4월 기본소득을 부분적으로 시행하기로 한발 물러섰다. 최저생계비 등 기본적인 보장은 월 550유로의 기본소득으로 지급하고 소득과 관련한 연금 등은 개인별로 차등 지급하는 방식이다. 결국 막대한 예산 부담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올해 6월 스위스에서 실시된 기본소득 도입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도 기본소득 제도에 비슷한 물음을 던졌다. '무슨 돈으로 기본소득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충당할 것이냐'는 것이다.
스위스 성인에게는 매달 2500스위스프랑(약 289만 원), 미성년자에겐 650스위스프랑(약 75만 원)을 지급하자는 개정안 내용에 대해 스위스 국민 23%는 찬성, 76.9%는 반대표를 던졌는데,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전면적인 기본소득 시행이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내용의 안에 국민 1/4 가량이 찬성표를 던졌다는 점에 더 의의를 두기도 한다. 스위스처럼 국민 소득이 높은 편인 유럽 국가에서도 기본소득이 설득력 있는 의제라는 것이다.
현재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등 지방정부에서는 월 980달러(약 112만 원) 정도를 조건으로 하는 기본소득 제도 시범 실시를 준비 중이다. 영국 왕립예술협회는 매달 308파운드(약 46만 원)를 지급하는 기본소득안을 제안한 바 있다.
"기본소득, 사회복지체제 대체 개념 아냐"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좌파 진영은 우파들의 이 같은 기본소득 개념 차용에 대해 우려를 보낸다. '인간다운 삶'이라는 기본 전제를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기본소득 담론을 오랫동안 발전시켜 온 독일 좌파당 등은 기본소득이 기존의 사회복지체제를 대체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사회복지 체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빈부격차와 민주주의 참여를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카티야 키핑 독일 좌파당 공동대표는 서울에서 열린 2016 세계기본소득 총회에 참석해 "기본소득은 실업대책을 넘어 위협받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형식적 권리를 갖고 있지만 물질적 뒷받침이 없다면 형식적 권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예를 들면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굉장히 중요한 권리지만, 시청 앞에서 집회가 열리는데 사람들이 거기까지 타고 갈 교통수단에 대한 요금을 지불할 수 없는 상태라면 이 모든 집회와 시위의 권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날 총회에서 소개된 인도의 기본소득 실험 사례도 이 같은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소개됐다. 지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총인원 6000명인 두 개의 인도 마을에서 매달 성인에게는 200루피(약 3400원), 어린이에게는 100루피의 기본소득을 지급했는데 빈곤율 저하 등 기존에 관찰되던 효과들과 함께 가족 관계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라트 다발라 기본소득인도네트워크 활동가는 "아빠, 왜 내 기본소득으로 술을 마셔요?"라고 따지는 어린이를 소개하며 "(인도의 가부장 문화가 강력하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여성과 어린이의 발언권이 강화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본소득의 해방적 가치는 금전적 가치보다 훨씬 높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동환님은 오마이뉴스 기자입니다. 월간 <참여사회> 편집위원를 맡고 있습니다. 이글은 월간 <참여사회>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