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 '당장 버려라, 그러면 구원 받을 것이다'에서 이어집니다.올 여름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덥다. 주변이 논밭인 우리 집은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밤에는 찬바람이 불어 창문을 닫고 자야 할 정도로 선선했는데 올해는 창문을 활짝 열고 자도 좀처럼 실내 온도가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열돔(Heat Dome) 현상 때문이라고 하는데 죽을 것 같은 더위에 인터넷으로 에어컨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비싼 가격과 계속되는 '전기세 폭탄' 뉴스를 보며 선풍기로 버텨보기로 했다.
너무 더워서 정리하고 버려야 하는 미니멀리스트의 길은 조금 멀어졌다. 대신 더울수록 집을 비워 한 줄기 바람이라도 더 닿을 길을 터주고, 쾌적한 집에서 지내보고자 소소하게나마 '버리기'를 시작해봤다.
1. 옷, 꼭 버려야 할까?
옷은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미니멀리스트의 '적'이다. 동시에 정리하기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계절이 있기 때문에 계절별로 옷이 필요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 정리도 다시 해야 한다.
'옷은 많은데 입을 게 없다'는 말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중요한 약속이 생길 때마다 하게 된다. 새 옷을 구입하지만 그렇다고 입을 만한 옷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선택지가 늘어날 뿐 여전히 '입을 옷'은 없는 악순환이 계속될 뿐이다. 그렇다면 '입을 옷'은 없고 자리만 차지하는 옷은 버리는 게 맞는 것 아닐까.
2. 내 옷들의 역사
초등학교 때는 흔히 그렇듯 엄마가 사주는 옷, 혹은 친척이나 이웃에게서 물려받은 옷을 입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옷 욕심이 생기기 전까지 '취향'이란 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취향'이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유행을 따라가야 옷을 잘 입는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와 친구들이 입는 옷, 신는 신발은 모두 비슷했다. 한때는 청바지, 단색 셔츠, 모카신이 유행하기도 했고, 카고 바지와 알 수 없는 영어가 잔뜩 쓰인 티셔츠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옷들은 대부분 유행이 지나고 나면 집에서 막 입는 옷이 되거나 버려지고 말았다.
성인이 되고나서부터는 '실험'과도 같은 옷 입기가 시작됐다. 나는 이 시기를 '패션 과도기'라 부른다. 갑작스러운 주변 상황의 변화와 함께 어울리지 않는 어른스러운 옷을 입어보기도 하고, 에스닉한 스타일, 옷가게 세일 코너를 누비며 고른 서로 어울리지 않는 옷들로 맞춰 입기에 애를 먹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앞선 '실험'의 실패인지 결과인지 모를 패션인 청바지에 후드티를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그리고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청바지에 후드티를 더 이상 고집 할 수만은 없어 정장과 일상복 사이의 어중간한, 어른처럼 보일만한 옷을 고민하며 고르게 됐다. 옷을 고르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예전처럼 실험적이거나 유행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편안함'과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는'것이 되었다.
한때는 옷이 그 사람을 표현해주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옷은 사람에 따라 그냥 '옷'일 뿐이기도 하다.
3. 옷을 버리는 일, 옷을 사는 일
얼마 전 여름 티셔츠를 5개 정도 샀다. 내가 입던 여름 상의가 낡아서이기도 하고, 일할 때도 놀러 갈 때도 입을 수 있는 '다용도'의 옷으로 짐을 좀 덜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단순한 디자인의 티셔츠와 셔츠를 여름 세일 시즌을 맞아 저렴하게 구입 할 수 있었다.
그리고 5개를 샀으니 5개를 버려야 하는 때가 왔다. 아, 새로 산 물건 개수만큼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버리는 것은 미니멀리스트들이 말하는 버리기 법칙 중 하나다. 나는 '면이니까 잘 때 입어야지' 하며 가지고 있었던 행사 기념 티셔츠 4장과 낡아서 잘 때만 입던 티셔츠 1장, 그리고 목둘레가 좁아 불편해서 손이 잘 가지 않던 티셔츠 1장을 과감하게 버렸다.
사실 낡은 티셔츠 한 장을 제외하면 옷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나는 이미 잠옷을 가지고 있으니 버리는 게 맞다. 5개를 사고 6개를 버렸으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시작이 아닌가 싶다.
최근 1~2년 동안은 단순한 디자인의 옷을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미니멀리스트 생활과도 잘 맞아 떨어져서 옷 입는 즐거움도 느끼고 있다. 초여름에 구입한 편안한 여름 바지 두 벌은 일할 때, 친구들 만나 놀 때도 입을 수 있고 시원하기도 해서 올 여름 내내 교복처럼 돌려 입고 있고, 위에 단색이나 줄무늬 티셔츠 등 내가 갖고 있는 상의와도 잘 어울린다.
4. 갈 길이 먼, 생초보 미니멀리스트
버려야 하는 걸 알고 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한 옷이 한참 남았고, 신발장에 사놓고 신지 않는 새 신발은 또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다. 인터넷 광고 창에서 예쁜 옷을 보거나 SPA 브랜드 매장 앞을 지나가게 될 때면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어쩔 줄 모르는 일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을 꽤나 좋아하는 내가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는 것은 '옷'이 아니라 '내가' 내 방의 주인이 되고, 내 몸의 주인이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다. 큰 고민 없이 자리에 맞는 옷을 척척 골라 입고, 편안한 옷을 입고 편안한 몸짓과 생각을 하고 싶다. 또 옷의 가짓수가 줄어들면 빨래도, 옷 정리도 조금 더 편해지지 않을까.
미니멀리스트로 알려진 스티브 잡스의 패션은 유명하다. 청바지에 검은색 티셔츠 그리고 러닝화. 우리가 알고 있는 애플의 신제품들을 모두 그 옷을 입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미니멀리스트가 단순한 디자인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입고 외출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고 그런 행복감은 의외로 쉽게 가질 수 없는 거니까. 단지 '옷'에 치여 살지 말아야겠다는 거다. 최근에는 해외, 국내 SPA 브랜드들이 트랜디한 의류를 대량으로 생산·유통하면서 예쁜 옷을 보다 싸고 쉽게 구입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매일매일 입고 내 집, 혹은 내 방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게 옷인 만큼 유행 따라 한 철 입고 버리게 될 옷 보다는 정말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덧글. 이 글을 쓰고 입지는 않지만 버리기 아깝던 티셔츠 4개를 더 버렸다. 아! 개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