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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재실, 가운데에 '비각'과 사당 내삼문, 오른쪽에 임란기념관이 보이는 북천전적지 제향 공간 전경
 왼쪽에 재실, 가운데에 '비각'과 사당 내삼문, 오른쪽에 임란기념관이 보이는 북천전적지 제향 공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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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상주시 북천전적지는 1592년 4월 25일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중앙군이 최초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 전투에서 총대장 이일은 도망쳤고, 대부분의 조선군 관군과 의병들은 장렬히 전몰했다. 하지만 앞으로든 뒤로든 '1등'만 기억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일만 약간 알 뿐 그외 이곳에서 순절한 의사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경상북도 기념물 77호인 북천전적지에는 규모는 작아도 내용은 아주 충실한 임란기념관이 있다. 임란기념관 내부의 여러 게시물과 전시 유물들은 임진왜란과 북천전투에 대해 충분한 해설을 해준다. 게시물들 중 북천 '전투 참여 인물'에 대한 소개를 읽어본다. 물론 순변사 이일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모두 임진왜란 중 상주에서 순절한 의사들이다. 김종무, 권길, 김준신, 김일, 윤섬, 이경류, 박호, 박걸, 이 여덟 분의 이력을 줄여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임진왜란 때 상주에서 순절한 분들 소개한 '전투 참여 인물'

김종무(金宗武, 1548-1592)는 1591년(선조 24) 오수도(전북 남원) 찰방에 임명되었다가 곧 사근도(경남 함양) 찰방으로 옮겼다. 다음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북상하자 역졸들을 거느리고 상주로 와서 순변사 이일 진영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상주판관 권길 등과 함께 왜적에 맞서 싸우다가 북천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권길 순국비
 권길 순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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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길(權吉, 1550-1592)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상주판관(부시장에 해당격)이었다. 권길은 한양에서 내려온 군사와 합세하여 북천전투에서 왜군의 진격에 맞서 싸웠다. 자신의 상관인 북천 전투의 총지휘관 이일과 조방장 변기, 그리고 상주목사 김해가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권길이 죽음을 무릅쓰고 왜적과 싸우자 호장 박걸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호응하였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싸웠어도 무기와 군사가 현격히 열세여서 결국 전사하였다.

김준신(金俊臣, 1561-1592)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32세였다. 그는 의병을 모아 상주읍성으로 달려갔다. 그 무렵 경북 북부 일원의 수령들은 경상감사 김수의 명령을 받고 대구 금호강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순변사 이일이 도착하기 전에 왜군부터 먼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들 겁을 먹고 흩어져버렸다. 김준신도 상주목사와 함께 칠곡까지 갔었지만 목사는 사라져버렸고, 혼자 상주 본진으로 돌아와 상주성을 지켰다. 하지만 4월 25일 북천전투에서 마침내 순국했다. 왜군들은 그 이후 김준신에게 당한 피해를 보복하기 위해 그의 생가인 화동면 판곡리로 몰려가 일가를 도륙했다.

김일(金鎰, ?-1592)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다. 상주 지방에서 의병 500명으로 창의하여 상주성 탈환 전투를 벌이다가 순국하였다. 당시 무남독녀인 딸이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낙동면 화산리에 안장했다. 뒷날 조정에서 딸에게 정려를 내렸는데, 그때의 효녀각이 낙동면 내곡리에 남아 있다.

윤섬(尹暹, 1561-1592)은 1587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가서 이성계의 조상이 이인임으로 오기된 명나라의 기록을 정정하는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녹훈되고 용양부원군에 봉해졌는데, 교리로 있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이 되어 북천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외삼문 아래에 있는 다섯 개의 비석은 왼쪽부터 윤섬을 기리는 ‘조선충신 남원윤공 휘섬 순국비’, 이경류를 기리는 ‘조선충신 한산이공 경류 순국비’, 박호를 기리는 ‘조선충신 밀양박공 휘호 순국비’, 김준신을 기리는 ‘조선의사 청도김공 휘준신 순국비’, 김일을 기리는 ‘조선의사 상산김공 휘일 순국비’ 들이다.
 외삼문 아래에 있는 다섯 개의 비석은 왼쪽부터 윤섬을 기리는 ‘조선충신 남원윤공 휘섬 순국비’, 이경류를 기리는 ‘조선충신 한산이공 경류 순국비’, 박호를 기리는 ‘조선충신 밀양박공 휘호 순국비’, 김준신을 기리는 ‘조선의사 청도김공 휘준신 순국비’, 김일을 기리는 ‘조선의사 상산김공 휘일 순국비’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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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류(李慶流, 1564-1592)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병조좌랑이었다. 그는 조방장 변기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였으나 그의 소재를 알지 못해 이일의 진중에 머물렀다. 그 후 북천전투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박호(朴箎, 1567-1592)는 1584년(선조 17) 18세의 나이로 친시문과(親試文科, 임금이 직접 시험장에 참석하여 실시하는 과거)에 장원 급제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으로서 북천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는 죽기 직전 함양 사람 인언룡(引彦龍)에게 "나는 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전세가 이처럼 불리하니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왕을 뵐 수 있겠는가!"라고 유언을 남겼다.

박걸(朴傑, 1568-1592)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상주목의 호장(戶長, 하급관리의 우두머리)으로서 목사와 판관이 감사의 영을 받아 금호강으로 출병했을 때 성을 지켰다. 이후 상주 북천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25세로 순국했다.

첫 중앙군 전투지답게 많은 비석이 세워진 북천전적지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판관 권길 사의비判官權吉死義碑'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판관 권길 사의비判官權吉死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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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전적지 경내에는 비석이 많다. 그중, 임란기념관을 둘러본 뒤 사당으로 가는 길에서는 '비각' 안에 있는 비석들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비각은 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집을 가리킨다. 즉, 특정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건립된 비각을 그저 '비각'이라 부르는 것은 조금 낯설다. 알고 보면, 이 '비각' 안에는 하나의 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의 비가 들어 있다. 비각 앞 안내판을 읽어본다.

'이 비각에는 임진왜란(1592년) 때 이곳 북천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3충신(종사관 윤섬, 박호, 이경류)과 2의사(의병장 김준신, 김일)의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한 충신의사단비(忠臣義士壇碑) 복제본과 상주판관으로 봉직 중 순국한 권길의 충절을 새겨 둔 판관권길사의비(判官權吉死義碑)가 보호되고 있다.

충신의사단비는 1793년(정조 17) 사액(賜額, 임금으로부터 이름과 재정적 지원을 받음)을 받아 충의단에 비를 세웠는데 임란북천전적지를 조성하면서 충의단에 있는 비와 똑같이 복제한 것이며, 판관권길사의비는 창석 이준 선생이 찬하여(글을 지어) 1698년(숙종 24)에 건립된 충렬사에 세웠는데 충렬사가 훼철되면서 자산 아래로 1991년 임란북천전적지를 조성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 옮겨 지음)하였다.

비각 앞 안내판의 본문에 '충의단에 있는 비와 똑같이 복제한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충신의사단비 진품이 이곳이 아니라 상주시 연원1길 10-16에 소재한다는 말이다. 기념관 내부에 게시되어 있는 충신의사단비 해설문은 아래와 같다.

충신의사단비
 충신의사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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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 때 상주 지역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가 전몰한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 3인과 이곳 출신의 의병장 김준신, 김일 등 2인 도합 5인의 공적을 현양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당시 상주 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인물로는 이들 외에 상주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등이 있었는데, 이들도 뒷날 국가에 의해 공적이 인정되어 포상을 받았다. 이에 반해 위의 5인은 포상을 받지 못하여 1738년(영조 14) 성이한, 성이항 등을 위시한 상주 사림들이 이들 중 앞의 4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무양동에 증연사(甑淵祠)를 건립하고 제향하였다.

이후 1790년(정조 14) 상주 사림들에 의해 다시 증연사의 옛터에 경절단(景節壇)이 설치되고, 이들 4인을 제향하는 동시에 이들과 함께 전몰했던 장사(將士) 및 이졸(吏卒)들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792년 상주 사림들의 청원에 의해 정조가 '충신의사단'이라는 단호(壇號, 제단의 이름)를 내리는 동시에 충절에 대한 제문을 지어 경상관찰사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정조가 이들의 공을 논한 교서를 내렸는데, 이를 바탕으로 이 비가 설립되었다.  1986년 10월 상주 시내의 도시 개발과 함께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현재의 위치(상주시 연원1길 10-16)로 이건되었다.'

북천전적지 경내에는 '비각' 내의 판관권길사의비와 충신의사단비 복제품 말고도 비석들이 많다. 외삼문 아래에 다섯 개, 상산관 뒤에 또 다섯 개가 있다. 

외삼문 아래에 있는 다섯 개의 비석은 왼쪽부터 윤섬을 기리는 '조선충신 남원윤공 휘섬 순국비', 이경류를 기리는 '조선충신 한산이공 경류 순국비', 박호를 기리는 '조선충신 밀양박공 휘호 순국비',  김준신을 기리는 '조선의사 청도김공 휘준신 순국비', 김일을 기리는 '조선의사 상산김공 휘일 순국비' 들이다. 순절 당시 관리였던 윤섬, 이경류, 박호의 비석에는 '朝鮮忠臣(조선충신)', 의병장이었던 김준신과 김일의 비석에는 '朝鮮義士(조선의사)'가 각각 새겨져 있다. 관리 아닌 의병장을 충신 아닌 의사로 규정한 것이 흥미롭다.

왼쪽부터, 충렬사 유허비(遺墟碑, 터였음을 기리는 비), 권길을 기리는 ‘임란충절 상주판관 권길공 순국비’, 김종무를 기리는 ‘충신 선산김공 종무 순국비’, 박걸을 기리는 ‘임란충절 상주호장 박걸공 순국비’와 ‘증통훈대부 장악원정 상산박공 휘걸 순절단’ 들이다.
 왼쪽부터, 충렬사 유허비(遺墟碑, 터였음을 기리는 비), 권길을 기리는 ‘임란충절 상주판관 권길공 순국비’, 김종무를 기리는 ‘충신 선산김공 종무 순국비’, 박걸을 기리는 ‘임란충절 상주호장 박걸공 순국비’와 ‘증통훈대부 장악원정 상산박공 휘걸 순절단’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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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외삼문에서 북천전적지 정문 사이에도 다섯 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왼쪽부터, 충렬사 유허비(遺墟碑, 터였음을 기리는 비), 권길을 기리는 '임란충절 상주판관 권길공 순국비', 김종무를 기리는 '충신 선산김공 종무 순국비', 박걸을 기리는 '임란충절 상주호장 박걸공 순국비'와 '증통훈대부 장악원정 상산박공 휘걸 순절단' 들이다. 임진왜란 당시 상주목 관리였던 권길과 박걸의 순국비에는 '壬亂忠節(임란충절)', 상주 아닌 타지(경남 함양) 관리였던 김종무의 순국비에는 '忠臣(충신)'이 각각 붙어 있다. 물론 두 쪽 모두 관리를 가리쳐 '임란충절' 또는 '충신'으로 나타내었으므로 그 두 표현은 사실상 같은 의미로 볼 일이다.

의병장의 비석에 새겨져 있는 '有明(유명)'은 무슨 뜻?

그런데 의병장 김준신을 기리는 비는 이 다섯 개의 비석 집합지에서 정문으로 나가다가 왼쪽, 상산관 뒤 태평루 앞에 하나 더 있다. 작은 비석에는 '有明朝鮮國賜號義士金俊臣死義碑(유명 조선국 사호 의사 김준신 사의비)' 열다섯 한자가 새겨져 있다. 

비석 앞 안내판에는 '이 비는 일제 치하 때 훼손된 것을 애석히 여겨 복원한 것입니다. 1993년 (하략)'이라는 해설이 쓰여 있다. 해설은, 조선국(朝鮮國) 임금이 의(義)로운 선비(士) 김준신(金俊臣)의 죽음(死)의 절의(義)를 기려 이름(號)을 내려준(賜) 비(碑)가 일제 때 훼손되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1993년에 새로 세우면서 '有明(유명)'이라는 두 자를 넣은 것은 '복원'을 한 탓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훼손 이전의 본래 비석에 그 두 한자가 있었기 때문에 복원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김준신을 기리는 비에 '명의 속국 조선'을 뜻하는 '有明朝鮮國'이 선명하다. 물론 이는 이 비가 처음 세워질 때 그렇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복원을 한 결과이다.
 김준신을 기리는 비에 '명의 속국 조선'을 뜻하는 '有明朝鮮國'이 선명하다. 물론 이는 이 비가 처음 세워질 때 그렇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복원을 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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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조선국'은 '명나라의 속국 조선'이다. 이는, 신라가 당나라의 속국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有唐(유당) 新羅國(신라국)'과 마찬가지 표현이다. 목숨을 던져 왜적과 싸운 조선의 1592년 전적지에서 명나라의 속국 조선의 흔적을 본다? 의병장 김준신은 외적에 의해 침탈되지 않고 자주를 누릴 수 있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왜적들과 싸우다 순절했건만, 비석은 명을 '아버지의 나라'로 섬긴 사람들이 세웠구나.

전적지를 두루 둘러보느라 피곤해진 몸과, '유명 조선국' 다섯 글자에 치여 지친 마음을 달래려고 태평루(太平樓) 그늘에 털썩 주저앉는다. 흘러가는 구름이 아득하다. 아마 1950∼1960년대에는 이 지역 중학생들도 이 누각을 오르내리며 저 푸른 하늘의 눈부신 변화를 바라보았으리라. 그때만 해도 이 태평루는 남산중학교 교사였으니까.

태평루 그늘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태평루는 1808년(순조 8)에 상주목사 정동교가 건립했다. 조선 시대에 성행한 다포식(多包式)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태평루는 본래 왕산을 중심으로 쌓은 상주읍성 관아문의 내삼문 밖에 있었는데, 동헌의 문루였다. 그 후 1920년 들어 상주향교 동편에 있는 동산으로 옮겼고, 다시 1960년 향교 서재 부근으로 옮겨 남산중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임란북천전적지를 조성하면서 1992년 현재 위치로 옮겨 왔다.

태평루
 태평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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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루 아래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우리나라에는 태평이 왔을까.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1811년 홍경래의 난, 1862년 임술 농민봉기,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10년 조선 멸망과 35년에 걸친 일제 강점기, 1945년 남북 분단, 1950년 6.25전쟁, 1960년 4.19혁명, 1961년 5.16군사정변, 1979년 12.12군사반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수많은 의사들이 목숨을 던져 멸망을 막아낸 나라 조선,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 어서 통일과 평화가 오기를…… 저 구름아, 하늘에 계시는 선열들께 좀 전해다오.


태그:#북천전적지, #김준신, #김종무, #임진왜란, #충신의사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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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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