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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는 영웅과 권력의 역사다. 교과서에는 전쟁 시에 어떤 영웅이 나타나서 적을 무찔렀고, 영토를 확장하거나 외적을 방어했는지 서술된다. 혹은 누가 군주가 되어 나라를 전성기로 이끌고 중흥시켰는지 언급된다. 역사를 배우는 학생은 각국의 주요 인물들의 업적을 외우는데 집중하게 된다. 왕권 강화를 이루거나 중앙 집권을 이룬 군주의 특징을 암기하거나, 인물의 단편적 특징만 알아가는 식이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조선의 뒷골목 풍경 ⓒ 강명관, 푸른역사
정치사에서는 어떤 당파가 나라를 이끌었고, 어떤 정치적 사건을 통해 당파가 권력을 얻거나 잃었는지가 주요하게 다뤄진다. 권력을 쥔 이들이 훈구파인지 사림파인지, 사림 중에서는 동인인지 서인인지가 암기 대상이다. 조선시대에 발생한 사화의 순서를 묻는 문제가 출제되기도 한다.

실상이 이렇다보니 과거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조선시대에 어떤 군주가 환국을 통해 집권 당파를 바꾸었는지는 배워도, 그 군주가 집권한 시기에 사람들이 무슨 도박을 하고 술은 뭘 마셨으며 어떤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는지는 알기 어려운 것이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에 속하는, 반촌의 백정이나 탕자의 삶 역시 주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자가 아닌, 주류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모습을 맛깔나게 구성하여, 살아 움직였던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 있다. 바로 강명관 교수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은 말 그대로 역사의 주류, 무대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아닌 역사 뒷골목의 등장인물을 다룬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남기는 어의가 아닌 이름없는 의사인 민중의들, 생활이 어려울 땐 도적이면서 사실은 백성이기도 한 군도들, 수도 한양에서 고기를 잡던 반촌 백정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냥 단순한 악한이나 별종으로 취급되던 탕자나 왈자의 이야기도 있다.

이 책의 첫 장은 의료에 관한 내용이다. 향약집성방과 동의보감의 의의가 아닌 민중의의 이야기를 다룬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 속의 의료는 일반 백성들이 받는 의료에 관한 것이 아니다. 국가에서 사람을 모아 펴낸 의료서적이 언제 만들어졌고, 허준의 업적은 무엇인지가 중요시 여겨진다. 따라서 허준과 같은 어의를 둔 왕이 아닌, 실제 민중들이 어떻게 치료를 받았는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저자는 직접 약을 싸들고 민중을 직접 치료하러 다녔던 민중의에 대해서 다룬다. 근대적인 의료 기술이 보급되기 이전, 고약을 들고 백성을 치료하러 전국을 돌아다녔던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고급 의료 서적을 저술하거나, 궁중에서 좋은 재료로 왕을 진찰하던 이들이 아닌, 직접 민중들에게 도움을 요청받고 그들과 교류했던 의사들의 이야기다.

'불쌍하고 딱한 사람은 저 시정의 궁핍한 백성들입니다. 내가 침을 잡고 사람들 속에 돌아다닌 지 십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살려낸 사람은 아무리 못 잡아도 수천 명은 될 것입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니 다시 십년이 지난다면 아마도 만 명은 살려낼 수 있을 것이고, 만 명을 살려내면 내 일도 끝이 날 것입니다. -26P

저자는 술과 도박과 같은 조선의 유흥문화도 언급한다. 조선시대에는 술이 정부의 주된 통제 대상이었다. 술을 빚는 과정에 곡식이 들어가기 때문에 정부는 잦은 통제를 내렸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문화는 점점 발전했고 폭음이 끊이지 않았다. 술과 함께 쌍륙, 투전, 골패와 같은 도박 문화 역시 발전했다. 훗날 우의정에 이르는 인물까지 도박에 골몰할 정도였다. 별감들은 이런 유흥 문화에 빠져서 방탕한 삶을 살기도 했다.

이 책은 비주류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5장은 과거에 대해서 다루는데, 과거의 공정한 인재 선발 제도로서의 의의나 과목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이 아니다.

글씨를 대신 써주고 문장을 지어주는 이들, 미리 시험장의 좋은 자리를 잡아주는 이들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내어 얼마나 과거 시험이 엉망진창이었고 부정행위가 일상화되어 있었는지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기형적인 선발을 통해 유지되는 관료체제 역시 건강하지 않았음을 보인다.

저자는 이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던 현실의 모습을 조망함으로써 조선의 부조리와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서 접근한다. 이 책이 보이는 문제의식 중 상당수는 현재의 우리나라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공무원 선발에 골몰해야 하고, 부정행위를 통해서라도 성공하고 싶어하는 조선 젊은이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모습과도 닮았다. 폭음과 도박의 문제 역시 먼 이야기가 아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닌, 시끌벅적한 조선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사회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2003)


#조선#비주류#강명관#역사#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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