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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의사 가문의 재실 우경재
삼의사 가문의 재실 우경재 ⓒ 정만진

경산시 옥실길 100-5에 우경재(寓敬齋)라는 재실이 있다. 재실이 자리잡고 있는 터는 성암산 아래로 들어가는 막다른 길의 끝으로, 삼의정(三義亭)과 거의 붙어 있다. 이 재실은 정언후(鄭彦垕)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우경재는 정언후의 증손자 정동민(鄭東珉)과 관련이 있는 집이다. 그렇지만 정동민이 건립한 것은 아니다. 정동민은 선조들의 묘소가 있는 덕등 기슭에 재실을 겸해 독서도 할 수 있는 병사(丙舍, 묘소를 관리하는 산지기 집) 한 채를 마련하는 것이 평소 소원이었다. 그러나 미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했다.

그후 정동민의 장남 정태연(鄭兌淵)이 선친의 유지를 받들고자 경비를 부담하여 재실 건축에 나섰다. 그러자 일가친척들도 성의와 힘을 다하여 도왔고, 1913년 섣달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914년 가을에 완공되었다.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준 아들의 효성이 깃들어 있는 우경재

우경재 앞에는 그보다 90년 가량 뒤인 2003년에 '탁와(琢窩) 정기연(鄭璣淵) 선생 시비'도 세워졌다. 정기연은 정동민의 차남으로, 34세 때 나라가 망하자 그 비통한 심정을 세 편의 시에 담았다. 그가 남긴 한시 세 편이 새겨져 있는 검은 빗돌을 바라본다.

我安之我安之 나는 어디로 갈꼬 나는 어디로 갈꼬
五江冷日己移 한강은 차갑고 해는 이미 기운 가운데
抱麟經行且泣 망국의 슬픔 안고 길 가면서 울먹인다
非首陽我安之 수양산 아니면 나는 어디로 갈꼬

誰與歸誰與歸 누구랑 같이 가리 누구랑 같이 가리
望路人空倚扉 행인을 바라보며 사립문에 기대선다
梅菊乎從我久 매화야 국화야 날 따른 지 오래구나
不與汝誰與歸 너희를 버리고 누구랑 같이 가리

奈若何奈若何 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좋을까
寧踽凉矢靡他 차라리 홀로 가지 딴마음 없건만
二千萬讐人役 이천만 우리 겨레 왜적에게 시달려도
天不吊奈若何 하늘은 무심하니 어찌하면 좋을까 

정기연의 '술지삼수(述志三首, 마음을 적은 세 편의 시)'는 그가 과연 삼의사(三義士)의 후손답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삼의사는 누구인가? <경산 시지>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서 새겨놓은 '草溪鄭氏(초계정씨) 三義士(삼의사)' 빗돌이 2002년 이래 삼의정 입구에 세워져 있다.

'경산시 상방동은 고려 말 양헌공(良獻公) 정연(鄭珚)이 은거한 곳인데 그 5세손에 삼의사가 있었다. 삼의사는 변함, 변호 형제와 그 종제(4촌) 변문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변함, 변호 형제는 일찍이 서로 이어 김제 훈도로 재임한 바 있으며 향내 사림과 힘을 합쳐 고산서당을 창건하였다. 

1952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이들 삼형제는 솔선하여 창의하였다. 박응성, 최응담, 진섬 등과 의병을 모아서 금성산과 망월산성에서 항전하였다. 조령(朝令, 조정의 명령)에 따라 성주 사원으로 이진(군대를 옮김)하여 거기서 적의 대군과 격전 끝에 박응성 4부자는 순절하고(<세 아들과 함께 같은 날 전사한 박응성 의병장> 기사 참조) 3형제는 잔병을 모아 곽망우당(홍의장군 곽재우) 진영에 합류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도 화왕산성에서 망우당을 도와 크게 활약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는 그간의 전공을 앞세우지 않고 초연히 향리로 돌아왔다. 고산서당을 재건하여 매 춘추(봄과 가을)에 인근 사우(선비)들과 회강(會講, 모여 공부)하고 후진 양성을 천직으로 여기면서 여생을 보냈으니 세인(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삼의사로 높이 추앙하였다.'

 삼의정 오른쪽으로 삼의사유허비각이 보이는 모습
삼의정 오른쪽으로 삼의사유허비각이 보이는 모습 ⓒ 정만진

후문 입구에는 '三義亭(삼의정)' 빗돌이 서서 안내판 역할을 해준다. 빗돌은 '이 정각(亭閣)은 임진왜란 때에 향우(鄕友, 지역의 벗)들과 의병을 일으켜 현민(縣民, 경산 시민)을 구하고 나아가서 화왕산성 전역(戰役, 전투)에 동참한 삼의사 정변함(鄭變咸), 변호(變頀), 변문(變文)을 기리기 위하여 1948년 후손들이 성력(誠力, 성의와 힘)을 모아 건립한 것'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안내문 아래에는 삼의정을 낙성(落成, 준공)한 기념으로 정기연이 읊은(韻) 시도 한 수 새겨져 있다. 제목이 '낙성운(落成韻)'이다.

三義亭閣玉水邊 삼의정 누각이 옥 같은 물가에 세워졌네
龍蛇風浪幾何年 임진왜란 겪고 얼마나 많은 세월 흘렀나
束牲金幕聯盟重 금성산에 장막 치고 창의 맹약 다졌으며
執策山堂見義先 고산서당에서 학문의 길 깨우쳤도다
東出腥塵今退宿 동쪽에서 번진 전쟁 먼지 물러갔지만
西來淸信尙遲延 서쪽에서 오는 맑은 기운 아직 더디구나
堪憐往蹟無人續 안타깝구나 지난 공적 잇는 사람 없으니
嘯倚方欄月上圓 난간에 기대어 옲조릴 제 둥근 달이 떠 있네

삼의정 2층에는 당연히 '삼의정기(記)' 편액이 걸려 있다. 기(記)는 일반적으로도 기록한다는 뜻이지만, 서원이나 정자 등에서는 그 곳의 역사를 적은 글을 말한다. 

고산서당 이름과 외삼문 이름 구도문, 모두 이황이 지었다

'求道(구도)' 두 글자로 된 편액도 눈길을 끈다. 도를 구한다? 1569년 무렵, 고산서당을 창건하는 선비들에게 이황은 이 두 글자를 문호(門號, 문의 이름)로 써 주었다. 학문에 정진하고, 선비의 올바른 길을 찾는 데 전념하라는 지침일 것이다. 이 두 글자를 삼의사의 후손들이 이 누각에 걸어둔 것은 삼의사가 바로 고산서당 창건의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2층 누각 외에도 삼의정 경내에는 유허비와 '문 이등박문 의사 살 이등박문' 시비가 있다. 유허비는 1948년에 세워진 것으로, 빗돌은 정상훈, 비각은 정시찬과 정홍덕이 제작과 건립 경비를 부담하였다. 정문인 감룡문은 정수열이 지었다.

 삼의정. 왼쪽 뒤로 대문채가 보인다.
삼의정. 왼쪽 뒤로 대문채가 보인다. ⓒ 정만진

이제 마지막으로 '聞安重根義士殺伊藤博文(문안중근의사살이등박문)' 시비를 본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기연은 기쁨에 흥겨워 시를 지었다. 그 시가 돌에 새겨져 뜰에 서 있다.  

封狐渡海禍俱臻 벼슬한 여우가 바다를 건너오니 재앙도 함께 따라왔구나
抱劒躊躇幾個人 응징할 칼을 들고 망설인 사람 얼마이던고
有一少年伸大手 한 젊은이가 있어 큰 손을 내밀어 쏘아 죽이니
東天快嘯動西隣 동녘 하늘엔 쾌재소리 들리고 서녘 이웃들은 감동하였도다

 이황과 정경세를 기려 세워진 유허비가 고산서당의 사당 터에 세워져 있다. 오른쪽에 있는 두 그루 느티나무가 이황나무와 정경세나무이다. 서당 강당 지붕 위로 금호강, 교각, 팔공산 자락이 보인다.
이황과 정경세를 기려 세워진 유허비가 고산서당의 사당 터에 세워져 있다. 오른쪽에 있는 두 그루 느티나무가 이황나무와 정경세나무이다. 서당 강당 지붕 위로 금호강, 교각, 팔공산 자락이 보인다. ⓒ 정만진

고산서당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로37길 39-3(구주소: 성동 172)에 있다. 서원이 아니라 서당인 것을 보면 이곳에는 현재 사당 건물이 없다. 하지만 본래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타고,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을 맞아 다시 소멸되는 바람에 그렇게 되고 말았다.

고산서당은 언제 지어졌는지 그 시기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1569년(선조 2) 무렵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창건 시기도 불분명하고, 사당도 다시 갖추지 못할 만큼 쇠락한 상태를 모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고산서당은 이름만큼은 꽤 널리 알려져 있다.

규모가 작은 고산서당이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 까닭

고산서당이 유명세를 떨치게 되는 데에는 두 사람이 크게 기여했다. 이황과 정경세이다. 이황은 고산서당이 창건될 때에 '고산(孤山)'이라는 재호(齋號, 집 이름)를 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구도(求道)'라는 문호(門號, 문 이름)도 직접 써서 주었다. 고산은 지역의 이름을 딴 재호이고, 문이름 구도는 '도를 구하라'는 뜻이다.

 고산서당 강당 뒤편 사당 터에 세워져 있는 이황과 정경세 유허비
고산서당 강당 뒤편 사당 터에 세워져 있는 이황과 정경세 유허비 ⓒ 정만진
고산서당은 임진왜란 때 화를 입지만 1605년 중건된다. 그후 1607년에는 대구부사 정경세가 서당을 찾아 직접 강의도 했다. 정경세의 몇 차례 강의에는 명군 도독 이성삼(李省三)이 참석하여 배웠다는 말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때는 명군이 자기 나라로 돌아간 뒤이므로 '이성삼 청강(聽講, 강의를 들음)설'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이성삼 청강설은 정경세의 강학이 그만큼 고산서당의 존재감을 당시 사회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래서 지금도 고산서당 바로 뒤에 있는 두 그루 큰 고목에는 '이황 나무'와 '정경세 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고산서당에 깃든 이황과 정경세의 애정을 후세인들은 변함없이 기리고 싶은 것이다.

아무튼 서당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선비들은 고산서당의 서원 승격 운동을 시작했다. 1644년(인조 22) 이래 뜻을 모은 선비들은 1690년(숙종 16) 이황과 정경세를 모시는 사당을 지었고, 마침내 1697년(숙종 23) 고산서원으로 승격되는 경사를 누렸다.

1734년(영조 10)에는 번듯한 강당과 동재, 서재가 완공되었고, 1776년(영조 52)에는 크게 수리를 하는 공사도 진행되었다. 그리고 1789년(정조 13)에는 문루(門樓)도 건립되어 서원의 규모와 품위가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해졌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 때 고산서원도 훼철의 운명을 맞았다. 1872년(고종 9) 경산현령 이현소가 사당 터에 '퇴도(退陶, 퇴계 도산) 이선생 우복 정선생 강학 유허비'를 세웠다. 다시 1876년(고종 13) 퇴계의 후손 이만승이 옥산현령으로 부임해 와 서원 복원 운동의 불을 지폈고, 1879년(고종 16) 이윽고 작은 건물 하나를 완공했다. 서원에 미치는 규모가 못 되었으므로 현판에는 '고산서당'(대구시 문화재자료 15호)이라 걸었다. 

 사진 왼쪽 끝에 충의추모비가 보이는 고산서당 전경
사진 왼쪽 끝에 충의추모비가 보이는 고산서당 전경 ⓒ 정만진

그런데 고산서당 창건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산현령 윤희렴이 창건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정변함 등 경산 지역 선비들이 세웠다는 설이다. 윤희렴 창건설은 관공서가 발간하는 공식 간행물인 <경산 읍지>에 줄곧 실려 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향교를 책임져야 하는 지방 수령이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을, 그것도 아주 외딴 자리에 세웠다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는 점과, 선비들이 설립한 것을 관청에서 자신들의 공적으로 치부한 게 아닐까 하는 점에서 의문을 사기도 한다.

고산서당을 창건한 사람은 누구일까

정변함 창건설은 <옥산삼강록(玉山三綱錄)> 등에 실려 있다. 이 가설의 핵심은 정변함이 자신의 선조 정연이 유배 생활을 했던 성산(城山, 현 고산서당 일대 야산)에 서원을 세우면서 경산현령 유희렴의 협조를 얻었다는 것이다.

한편 <경산시사>는 '(정변함 형제가) 사림과 힘을 합쳐 고산서당을 창건했다'와 '정변함이 도감(都監, 책임자)이 되어 소실된 고산서당을 재건했다'라는 두 문장을 통해 삼의사가 고산서당의 창건과 재건을 모두 주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삼의사가 고산서당 건립에 크게 기여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고산서당 뒤의 이황나무와 정경세나무
고산서당 뒤의 이황나무와 정경세나무 ⓒ 정만진



#고산서당#삼의사#삼의정#정변함#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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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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