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느릿느릿 산보하듯 숲길을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전엔 산 정상을 꼭 만나고 와야 했던 남편을 따라 숨가쁘게 오름짓 하기에 바빴지만 요즘은 집에서 가까운 산책로나 산 중턱으로 난 둘레길을 자주 걷는다.
산과 길을 대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사노라면 숨가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쉼을 위해 느릿느릿 걷고 싶은 때가 있는가 하면 달려가고 싶고 뛰어가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는 때도 있기 마련이다. 느리게 걷기와 산 중턱을 따라 걷기는 요즘 산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다.
지척에 있는 오봉산 둘레길이나 산책길은 요즘 늘상 만난다. 근래엔 부산 이기대 해파랑길, 황령산 편백나무 숲을 만났고 며칠 전엔 백양산 편백나무 숲을 여러 번 만났다. 부산에선 가장 많은 편백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이곳은 삼림욕을 즐기기에 딱 좋은 곳인 것 같다.
백양산(642m)은 버드나무의 일종인 흰 사시나무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북쪽으로는 금정산과 이어지고 부산 진구와 사상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부산 도심의 주요하천이자 상수도의 시초가 된 성지곡수원지가 있는데 성지곡 일대에는 어린이대공원이 있다.
언제 만나도 좋은 백양산 편백나무 숲길.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되는 것'(루쉰)이라고 했듯이 많은 사람들의 발길 닿아 난 많은 길이 있는 백양산은 어느 코스로 등산하느냐에 따라 가벼운 산책이 될 수도 있고 오름짓하는 등산도 될 수 있어 누구나 언제라도 부담없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친구랑 걸어도 좋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좋고 가족끼리 걸어도 좋고 누구라도 이 숲에 들면 숲과 하나되어 걸을 수 있으리. 그래서일까. 언제나 이곳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들의 표정은 느긋하고 밝았다.
엊그제(9.14)는 부산 만덕고등학교에서 시작해 만남의 숲을 지나 바람고개까지 갔다가 임도를 따라 걸어 순환도로를 타고 어린이대공원으로 내려왔다. 부산 만덕고등학교 뒤로 난 들머리에서 오르는 길은 곧장 숲의 속살을 만질 수 있어 좋고 만남의 숲도 가까워서 좋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날도 만남의 숲 벤치엔 사람들이 앉고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식물이 병원균과 해충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내뿜는다는 피톤치드를 산림욕하며 흠뻑 마시고 있는 사람들. 여백이 있는 숲은 오전부터 늦은 오후까지 조용한 활기로 가득하다.
우리도 나무 평상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앉았다가 누웠다. 바닥에는 비둘기들이 구구구 소리내며 먹이를 찾아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푸드득 날아 올라 편백나무 가지 위에 앉았다. 온종일 누워 있어도 지루한 줄 모를 것 같은 만남의 숲에서 평상에 누워 한동안 쉬다가 숲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고 바람 고개 가는 방향으로 걸었다. 계속 이어지는 편백나무들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굽어짐도 없이 몸을 곧추세우고 하늘 향해 높이 치솟아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곧게 자란 걸까. 살다 보면 굽이 굽이 돌아가기도 하고 생애의 어느 한 지점에서는 꺾이기도 하고 돌부리에 치어 넘어지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고 풍상을 겪은 흔적들을 남기기도 하는 법인데, 편백나무들은 저토록 곧게만 자랐을까. 한 뼘의 고민 흔적도 없이 올곧게만 올라 간 걸까.
한껏 몸을 키우고 높이 솟아오른 잘 생긴 나무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그 나무들 사이에 몇 개의 나무들이 땅 위로 드러낸 뿌리들을 보았다. 땅을 확보하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들이 고스란히 땅 위로 드러난 뿌리에 나타나 있었다. 높이 올라간 만큼 땅 속 깊이 그 만큼의 아니 그보다 더 뿌리를 힘껏 내리기 위해 몸부림쳤을 나무들의 치열함을 보았다.
보이지 않는 상흔, 보이지 않는 숨가쁜 노력이 겉으로 드러난 뿌리에서 느껴졌다. 밖으로 드러난 그 뿌리들은 버티고 이기고 살아내기 위해 사방으로 뒤틀며 몸을 꼬며 뻗어 있었다. 마치 백조가 우아하게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보이지 않는 호수에서 끊임없이 발길질을 해야 하듯이 편백나무들은 우뚝 서 있기 위해 숨가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한껏 위로 꺾어야 끝이 보이는 크고 우람한 편백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는 길... 하염없이 걸어도 좋은 길이다. 바람 고개로 가는 숲길은 편백나무 숲으로 이어지다가 소나무와 전나무 등이 우거진 길이 이어지는가 하면 다시 편백나무 숲으로 이어지면서 길은 점점 좁아졌다.
오후의 숲은 한적하면서도 이따금 오가는 사람들과 스쳐 나갔고, 우린 바람고개에서 잠시 땀을 식히고 넓은 임도를 걸어 가다가 수원지 순환도로로 접어들어 수원지를 끼고 어린이대공원으로 내려왔다. 가을이 익어가는 구월의 어느 하루, 어둠이 내려앉았다.
산행수첩1. 일시: 2016.9.14(수) 맑음.2. 산행: 짝꿍과 나3. 산행시간: 4시간 30분4. 진행: 만덕고등학교(오후1:10)-만남의 광장(1:40)-휴식-만남의 광장 출발(2:45)- 전망대(3:10)-삼거리(옥천약수터,갈림길 3:20)-삼거리 (공룡발자국유적지,3:50)- 바람고개(3:55)-정자 (4:50)-순환도로(수원지,5:05)-어린이대공원 입구(5:40)5. 만남의 숲→바람고개 (2.8km, 둘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