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4일 세종로 사거리 주변에는 경찰버스 700여대와 차벽 트럭 20대가 동원되었고, 240여개 중대 2만2천명의 경찰병력이 시위대를 막아섰다. 물대포를 앞세워 종로 거리에 펼쳐진 차벽 앞에는 쉬운 해고 반대, 재벌책임강화, 농산물 적정가격 보장, 노점 단속 중단, 공안탑안 중지, 반인권행보 중단, 사드 배치 반대, 대학구조조정 반대,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노후원전 폐기, 공공의료 확충을 요구하는 이들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69세의 노인이 직선으로 날아오는 물줄기에 맞아 쓰러졌다. 백남기씨다. 이후 317일 동안의 사투 끝에 지난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 한 사람이 공권력에 의해 사망했는데도, 그의 사망사실이 알려진 25일에도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의 유감은 야당이 통과시킨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에서만 나왔다. 장관의 해임을 건의한 것은 유감이고, 공권력에 의한 국민의 사망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백남기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경찰은 더 했다. 명백한 사인에도 부검을 시도하다 법원에서 영장이 기각됐지만, 결국 받아냈다. 서울대학병원을 둘러싼 경찰력에는 백남기씨에 대한 애도도, 직사로 쏘아댄 물대포에 대한 반성도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자가 당초 밝혀진 사인을 다시 밝히겠다고 으름장이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현 정부와 경찰의 태도는 2005년 경찰의 시위진압 과정에서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사망하자, 대통령의 즉각 사과와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태도와 비교되며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 정부의 책임을 요구했던 이들이 막상 책임을 가진 자리에 오르자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내내 가장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비판했던 이들은 후에 손쉽게 정권을 잡았음에도 2009년의 용산참사, 2014년의 세월호 참사, 2015년의 백남기 농민에 대한 물대포 참사에서 책임있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만일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의 정부와 여당처럼 했다면 그들은 뭐라고 비난했을까?
기록을 정쟁의 도구로 삼은 정부들
적반하장의 역사는 이뿐만이 아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적반하장에도 역사가 있다. 최근 출판된 <대통령 기록전쟁>(전진한 저, 한티재 출판)이라는 책에는 기록을 둘러싼 적반하장의 역사가 담겨 있다.
퇴임 후 거대한 촛불시위에 직면한 이명박 정부는 도무지 '배후'를 찾을 수 없자, 지목해 버린다.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다. 촛불시위가 절정을 향해가던 2008년 6월, 중앙일보는 참여정부의 e지원 자료가 봉하마을로 유출되었다는 기사를 보도한다. 이명박 정부 또한 "노무현 정부 청와대 관계자들이 지난 2월 퇴임 전 청와대 비서동에 있던 청와대 컴퓨터 메인 서버의 하드디스크 전체를 봉하마을로 옮겼고, 대신 새로 들여온 하드디스크엔 극소수 자료들만 옮겨 놓고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치열한 공박과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의도적인 모욕이 이어졌고 국가기록원은 참여정부의 비서진을 고발하기도 했다. 이 장면만 본다면, 그들은 '기록'의 가치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그랬을까?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그들의 또 다시 이미 숨진 노무현 대통령을 물고 늘어졌다. 여당 정치인들이 유세장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그대로 떠벌린 것이다. 본인들은 그 내용을 '찌라시'에서 봤다고 하지만, 그 말을 누가 믿을 텐가? 설령 사실이더라도, 비밀로 분류된 대통령지정기록물이 어떻게 찌라시로 흘러갔는가? 당시 대통령기록관장은 이명박 정부의 비서진 출신으로 2010년 3월 15일 임명된 김선진이었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내용을 기자회견 등을 통해 여기 저기 이야기하고 다닌 정문헌 의원은 2005년 대통령기록물법의 뼈대를 제공한 예문춘추관법을 대표발의한 사람이다. 그는 대화록 공포로 인해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벌금 천만 원을 선고 받았지만,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2013년 6월 24일, 1급 비밀로 관리되어 오던 대화록 전문이 공개되었는데, 이를 공개한 곳은 다름 아닌 국가의 기밀을 지킨다는 국정원이었다.
갑자기 에드워드 스노든이라도 된 듯 행동한 국정원이 어떤 곳인가? 저자 전진한에 따르면 국정원은 아주 간단한 정보공개청구에 대해서도 늘 비공개로 대응해오던 기관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통계치에 대한 공개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2005년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이 연도별·급수별 비밀기록의 '건수'만 공개해달라고 요구했을 때도 "국가안보상 중대한 이익을 해할 우려가 있다"며 전부 비공개했던 것이 단적인 예다.
기록을 둘러싼 적반하장의 역사<대통령 기록전쟁>에 따르면 2000년 이전까지는 우리나라 국가기록이 외부로 반출되거나 무단파기 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100대 과제 중 하나로 국가 기록물관리제도의 법제화를 제시해 초석을 놓았고,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말기인 2007년 4월 대통령기록물법을 국회 통과시켜 자신부터 적용시켰다. 이렇게 국가와 대통령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대통령이, 퇴임 후에 그 기록으로 인해 공격받은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기록'으로 집요하게 공격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 후에 비밀 기록을 모두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묶어 후임 정권이 중요 정보를 쉽게 볼 수 없도록 만들었지만, 자신의 자서전에서 온갖 비밀 내용을 다루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알다시피 국정교과서 집필진을 비공개했음은 물론 각종 의혹이 넘치는 사안에 대해 묵묵부답하고 있다.
온 국민을 비탄에 빠지게 한 세월호 참사의 경우에도 사태가 발생한 2014년 4월 정보목록 중 71.6%(343건)이 비공개목록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는 2015년 8월, 공공기관의 기록을 민간 기업에 위탁·보존할 수 있도록 공공기록물법을 개정하는 "기록 민영화" 추진을 시도하다 중단하기도 했다.
소중한 국가 기록을 제대로 보관하려 했던 대통령을 바로 그 '기록'으로 공격하고, 막상 자신은 그 기록을 정치적 의도에 따라 이리 저리 휘두르는 정권. 이런 적반하장의 모습은 고 백남기씨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15년 간 우리나라의 기록관리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활동해온 필자는 기록을 둘러싼 대통령들의 전쟁을 그려내며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맺는다.
"이제 정치권은 대통령기록을 이용한 정쟁을 없애야 한다. 향후 대통령이 될 사람들은 충실히 대통령기록을 생산하고 대통령기록관은 이를 독립적으로 관리해, 기록으로 평가받는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이 당연한 말을 '소망'으로 바꿔 말해야 하는 사회. 우리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적반하장의 역사를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국정교과서에 실리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손우정 기자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네트워크형 사회진보프로젝트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의 상임이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