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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과학관 전경
 최무선과학관 전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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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1325~1395)은 임진왜란보다 200년 이상 앞선 시대를 살았던 과학자이다. 즉, 최무선과 임진왜란 사이에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임진왜란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역사적 인물로 생각한다.

<세종실록> 1430년(세종 12) 4월 14일자에 병조참의 박안신이 임금에게 올린 글이 실려 있다. 박안신은 '나라를 위하는 도리는 지난 일을 거울삼아 뒷일을 염려함으로써 오래 편안하기를 도모하는 데 있습니다'라면서 '왜적이 크게 배를 몰고 와서 곤남(경남 사천시 곤양면)에 닿았을 때 정지·최무선·나서 등이 병선 10여 척을 거느리고 막아서자, 적들은 저희가 많고 우리는 적어 상대가 안 된다고 흥겨워하며 도전하였습니다. 우리 배들이 분연히 공격하여 화포를 던져 적선을 태워버리자 적들은 도망쳤고 (중략) 그 이후로는 우리 병선에 대항하지 못했으며, 이따금 해변을 침범하였으나 좀도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다로 쳐들어 온 대규모 왜구를 불과 10여 척의 우리 수군이 화포(대포)를 활용하여 대파했고, 그 후로는 왜적들이 감히 군대를 일으켜 바다로 공격해오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박안신은 "육병(육군) 수십 만이 적을 방어하는 것이 병선 수 척으로 적을 다스리는 것보다 못함은 그 밝은 효험과 큰 경험으로 거울로 삼을 만합니다" 하고 결론을 내린다. 박안신의 건의는,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의 위력과 아군의 함포 해전 능력을 조선 초기 군사 전문가(병조참의)들이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최무선 과학관 내부에 게시되어 있는 최무선의 초상
 최무선 과학관 내부에 게시되어 있는 최무선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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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이 화포를 동원하여 대규모 왜구들을 크게 격파한 가장 중요한 전투는 1380년(고려 우왕 6)과 1383년(우왕 9)의 일이다. 박안신의 상소는 최무선의 대승보다 50년 가량 뒤인 1430년에 작성되었다. 50년이라는 시간은, 왜적을 상대할 때에는 육군 수십 만보다 몇 척의 전함이 더 요긴하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릴 만큼 그렇게 오랜 세월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27년이 더 지난 1457년, 조선의 지도부는 황당한 판단력을 보여준다. <세조실록> 1457년(세조 3) 1월 16일자의 기록이다. 이날 기사에는 '남쪽 변방에 수군은 많이 설치하고 육병(육군)은 너무 적게 배치했다. 도이(島夷, 섬오랑캐)는 수전(水戰)에 능숙한 반면 기전(騎戰, 말 타고 싸우는 육지 전투)에 서툴고, 우리나라는 기전에 장점이 있어도 수전에는 단점이 있다. 적들이 비록 수전을 잘하지만 우리가 전함으로 맞싸우지 않고 지는 체하며 그들을 육지에 끌어들인 다음 기병으로 공격하면 거의 물리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일본이 쳐들어오면 바다에서 싸우지 말고, 육지에 상륙시킨 다음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안신의 판단과는 놀라울 만큼 정반대의 인식이다. 

그 결과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바로 그날 <선조수정실록>에는 수군을 없앤다는 명령이 수사(水使)들에게 떨어졌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는 '해도(海道, 바다를 끼고 있는 도)의 주사(舟師, 수군)를 없애고 장사(將士, 장수와 병사)들은 육지에 올라와 싸우고 지키도록 명했는데, 전라수사 이순신이 "수륙(水陸)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 하고 반대하여 호남의 주사만 홀로 온전히 남았다'라고 증언한다.

임진왜란 바로 직전에 수군 해체 결정하는 조선의 지도부

<세종실록> 1430년 4월 14일과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약 160년의 시간 차이는 있지만 기이하게도 날짜조차 같다. 조선 수군은 매우 강하다는 1430년 실록의 인식이 1592년 때까지 줄곧 이어졌더라면 선조를 비롯한 조선 지도부가 수군을 폐지한다는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우수사 원균, 경상좌수사 박홍 등이 스스로 전함들의 밑창을 뚫어 바닷물에 침몰시킨 뒤 도주하는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지도부들은 어째서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인식의 변환을 일으켰던 것일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최무선 과학관 계단에 부착되어 있는 최무선 부조
 최무선 과학관 계단에 부착되어 있는 최무선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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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박안신의 상소문은 최무선 등의 고려 수군이 대규모 왜구들을 간단히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이 화포의 위력 덕분이었음을 조선 지도부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화포를 던져 적선을 태워버리자 적들은 도망쳤다'라는 표현은 그 단적인 증거이다. 그런데 어째서 임진왜란 발발 초기 경상좌도와 우도의 수군들은 '적들은 저희가 많고 우리는 적어 상대가 안 된다고 흥겨워하며 도전한' 왜적들을 소수의 전함을 거느리고도 화포를 쏘아 가볍게 무찌른 고려 말기 수군들처럼 그렇게 전투를 진행하지 못했던 것일까.

오직 이순신만이 그렇게 싸울 줄 알았다는 것이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의 비극이었다.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을 기록하고 있는 <선조실록> 6월 21일자 기록은 이순신이 일본 수군의 약점과 우리 수군의 장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사는 '5월 6일, 적선 26척을 불살랐다(焚賊船二十六艘). (중략)  29일, 적선을 모두 불살랐다(盡燒其船). (중략) 6월 2일, 적선 밑을 들이받아 부수었다(直衝其下撞破其船). (중략) 5일, 적선 1백여 척을 불살랐다(焚賊船一百餘艘). (중략) 7월 6일, 적선 63척을 불살랐다(焚賊船六十三艘).' 5회의 승전을 설명하는데 분(焚)이 3회, 소(燒)가 1회, 충(衝)이 1회 등장한다. 분(焚)과 소(燒)는 '불사르다', 충(衝)은 '박아서 부수다'이다. 기사는, 화력이 우세하고 배가 훨씬 견고한 조선 수군의 장점을 이순신이 정확하게 전투에 활용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 수군의 강점과 일본 수군의 약점 꿰뚫어본 이순신

뿐만 아니라, 이순신은 첫 출정인 5월 4일과, 첫 승전인 5월 6일보다도 앞선 4월 30일 이미 해전에서 왜적을 제압해야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날 조정에 장계를 보내어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세력이 이처럼 왕성하여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모두 해전으로 막아내지 못하고 적을 마음대로 상륙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부산과 동래의 연해안 여러 장수들이 배를 잘 정비하고 바다에서 가득 진을 벌여 엄격한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를 보아 전선을 병법대로 알맞게 진퇴하여 적을 육지에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런데도 조정은 수군을 없애고, 육군이 되어 일본군과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최무선과학관 뜰에는 15종의 현대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최무선과학관 뜰에는 15종의 현대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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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 중 관련 부분을 읽어본다. 이 책은 일본 수군이 옥포의 서전에서부터 연전연패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의 하나로 '전선과 화력의 열세'를 든다. '선체가 좁고 낮았을 뿐 아니라 매우 취약하여 풍랑을 만나면 곧장 해체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고, 돛대 또한 순풍이 아니면 사용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당시 일본 전함은 '조선의 판옥선과 비교할 경우 마치 완구와 실물의 차이 정도로 비유될 만큼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또 '양측 화력의 우열도 현저하였다. 일본 수군이 전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경쾌한 유람선이라고 해도 좋을 선박에 조총을 주무기로 한 데 비해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선체가 높고 크고 육중한데다가 선상에 대구경(大口徑)의 각종 화포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수군은 원격전(遠隔戰, 거리가 떨어진 전투)에서는 화포를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고 근접전에서는 전선으로 적의 전선을 부딪쳐 깨뜨리는 전법을 구사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이순신의 전술을 그대로 소개해주고 있는 듯한 표현이다. 이순신은 먼 거리에서 화포를 쏘아 일본 전선에 불을 지르고, 가까우면 들이박아 부수었다.

멀면 화포로 공격하고, 가까우면 들이박아 부수다

최무선을 기려 세워진 비가 과학관 뜰 앞에 있다.
 최무선을 기려 세워진 비가 과학관 뜰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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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책은 1592년 6월 21일자 <선조실록> 수군 승전 기사에 분(焚)과 소(燒), 그리고 충(衝)이 주로 등장하는 까닭을 세세히 설명해주는 듯하다. 무려 100년에 걸쳐 통일전쟁을 수행한 덕분에 육지전과 백병전에 출중한 능력을 갖춘 일본군은 해전에서도 항상 상대의 배 위로 뛰어들어 칼싸움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200년 평화를 누려온 조선군은 칼싸움에 익숙하지 못했다. 당연히 조선군은 불리한 백병전을 피하고, 우세한 화포를 동원해 멀리서 적선을 불바다로 만들고, 가까이 접근하게 되면 튼튼하고 큰 판옥선의 장점을 활용해 그냥 박아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흥미로운 기술도 발견된다. '종래 해전 승첩의 주된 요인의 하나로 인식되어 온 거북선의 위력은 사실과 달랐다'라는 부분이 바로 그 대목이다. 책은 첫째, '우선 그것은 모두 3척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중에서도 초기 해전에 동원된 것은 2척에 불과했다'라고 설명한다.

둘째, '거북선은 장갑선(裝甲船, 지붕이 있는 배)이란 점에서 사부(활쏘는 군사)들이 전투하는 데 불편했으며 판옥선에 탑승한 군사들에 비하여 사상자도 많았다. 만일 거북선의 위력이 대단했다면 정유재란 이전 휴전기에 단 한 척이라도 더 건조되었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으며, 명량해전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던 사실만으로도 그것의 위력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이 부분은, 이이화가 <한국사 이야기>에서 '거북선은 한 번 출전할 때 한 척 정도를 동원했다'라고 기술한 것과 같은 맥락의 견해로 보인다.

최무선과학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잠수함 최무선호의 사진. 1200톤급의 이 잠수함은 1993년 8월 7일 진수식을 가졌는데, 어뢰 및 기뢰를 장착하고 있다.
 최무선과학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잠수함 최무선호의 사진. 1200톤급의 이 잠수함은 1993년 8월 7일 진수식을 가졌는데, 어뢰 및 기뢰를 장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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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조선왕조실록>은 최무선이 화포를 동원해 가볍게 왜선들을 격파한 교훈이 1430년에는 조선 지도부 인사들에게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는데, 그로부터 불과 27년 뒤인 1457년에는 잊혀버렸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또,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일본 수군에 맞설 만한 경쟁력이 없는 조선 수군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는 식의, 전혀 실제와 다른 잘못된 인식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지도부 인사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알게 해준다.

최무선이 과학으로 남긴 교훈 잊어버린 조선 지도부

이는 결국 과학자 최무선의 놀라운 업적과 교훈이 200여 년 만에 실종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화포의 성능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함포(배에 설치한 대포) 해전'(경상북도 영천 최무선과학관의 게시 표현)을 상상에서 현실로 창조해낸 최무선의 상대가 애당초 될 수 없었던 풍신수길(豐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일본 지도부! 그러나 그 교훈을 잊은 조선 지도부는 바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땅에서 싸우면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오판을 했고, 결국 7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백성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게시물 중 하나인 '진포 해전의 승리'와 '최무선과 화통도감'
 게시물 중 하나인 '진포 해전의 승리'와 '최무선과 화통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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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경북 영천시 금호읍 창산길 100-29에 있는 '최무선 과학관'은 임진왜란 답사 유적지로서 손색이 없다. '육병(육군) 수십 만이 적을 방어하는 것이 병선 수 척으로 적을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박안신의 1430년 발언을 진리로 만들어준 이가 최무선이라는 사실을 헤아려보면, 또 최무선이 남겨준 교훈을 지킬 줄 모른 후대 조선 지도부들 탓에  임진왜란 당시 그토록 많은 백성들이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최무선 과학관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임진왜란은 물론 우리나라 전쟁사의 중요 답사지이기 때문이다.

최무선과학관은 2012년 4월 20일에 개관했다. 내부에는 화포 관련 복제 유물, 영상물, 전시물 등을 구비하고 있고, 외부 뜰에는 전차, 경장갑차, 8인치 견인포, 수륙장갑차, 팬텀기, 나이키유도탄, 40㎜함포, 20㎜함포 등이 놓여 있다. 물론 뜰에 있는 그것들은 최무선은 말할 것도 없고 임진왜란과도 아무 관련이 없다.

게시물 중 하나인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
 게시물 중 하나인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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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관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본 후, 내부 전시물들과 과학관 누리집의 내용들을 정리한다. 최무선과학관에 가보지 못했거나, 입장해본 경험이 있더라도 하나하나 살펴가며 뜻을 헤아려본 바는 없는 이들을 위해 학습 자료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정리를 하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최무선이 화포를 활용하여 보여준 우리 수군의 함포 해전 능력을 이순신만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조선 지도부들이 한결같이 인식하고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일본군의 도발은 전쟁 초기에 제압되었을 것이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허다한 백성들의 비참한 죽음과 고통은 사전에 예방될 수 있었을 텐데…….

최무선과학관, 찾아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야 마땅

물론 최무선과학관과 같은 시설이 만들어진 것은 '나라를 위하는 도리는 지난 일을 거울삼아 뒷일을 염려함으로써 오래 편안하기를 도모하는 데 있다'라는 박안신의 1430년 발언을 잊지 않으려는 후세인들의 마음가짐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 최무선은 임진왜란 발발보다 200년 가량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최무선과학관은 틀림없는 임진왜란 유적지이고, 찾아온 사람들로 최무선과학관이 인산인해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의 역사관은 반듯하게 정립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과학관 안에는 사람이 없다.     

최무선과 최무선과학관
(아래는 최무선과학관 내부와 누리집의 게시물들을 정리한 자료들임)     

최무선 :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과 화약무기를 개발 활용한 과학기술자. (간략 소개) 최무선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화약을 만들고 화약 무기를 개발한 고려 말의 장군이자 과학자이다. 그는 당시 첨단기술이었던 화약제조법을 오랜 연구와 노력 끝에 자체 개발을 해냈으며,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무기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당시 최무선이 개발하고 제작한 화약과 무기는 왜구 격퇴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생애와 경력)
1325년 : 최동순의 아들로 경북 영천에서 출생 (본관 : 영천)
1376년 : 염초 제조법을 알아냄
1377년 :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 제조 및 각종 화약무기 연구 개발 착수
1380년 : 진포대첩에 부원수로서 참전,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왜선 500여 척을 격파
1389년 : <화약수련법>, <화포법>을 저술
1395년 : 4월 19일(음력)에 세상을 떠남

(주요 업적)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 개발고려 말기에 화약제조법은 오로지 중국만이 가진 첨단 군사기술이자 국가기밀이었다. 최무선은 중국인 기술자 이원에게서 화약의 주원료인 염초 제조 핵심기술을 알아내고, 숱한 실험을 거쳐 염초를 흙에서 추출하는 데 성공해 마침내 화약 제조 기술을 완성했다.
화통도감을 세워 첨단 화약무기들을 연구 개발화약 개발에 성공한 후, 최무선은 화약과 화약무기 제조를 정부에 적극 건의하여 1377년 정부 공식기관인 화통도감을 발족시켰다. 이후 최무선의 주도로 화통도감에서는 대장군, 이장군, 화전, 주화 등 20여 가지의 각종 첨단 화약무기를 개발해냈다.
진포대첩에서 왜구와 싸워 승리고려 군대는 화통방사군이라는 화약무기 발사 전문부대를 편성하여 막강한 위력을 지니게 됐다. 1380년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오자, 최무선은 부원수로 참전하여 화약무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가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화약 제조법과 화포 제작기술을 책으로 편찬최무선은 자체 개발한 화약 제조법과 화포 제작기술을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으로 편찬했다. 이 책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그가 개발한 화약 제조법과 화포 제작기술은 아들 최해산에게 전수됐다. 최해산은 아버지의 기술을 계승 발전시켜 조선 초기에 각종 화약과 신무기를 개발했다.

승전 (1) 100척으로 500척의 왜구를 무찌른 진포대첩
1380년 8월 왜구는 5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전라도 진포(현 충청남도 서천군)를 거점으로 삼아 내륙에 침입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기를 시험해 볼 만한 기회라며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해 참전토록 했다. 원수 나세를 필두로 심덕부沈德符와 최무선이 지휘하는 고려군의 수군은 왜선에 비해 5분의 1밖에 안 되는 군선 100여 척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왜군은 군선과 군선을 연결하여 거대한 해상기지를 형성하여 위협적인 전세를 펼쳤고, 고려수군은 이 시기 이전에는 왜선의 위세에 눌려 감히 근접할 엄두도 못 냈겠지만 화포로 무장한 덕에 초대형 선단을 향해 대규모 화포공격을 가해 곧 적선 500척을 모두 불살랐다. 왜군은 내륙으로 퇴각하였으나, 이를 추격한 이성계에게 지리산 일대에서 섬멸되었다.
진포대첩은 고려군이 자체 제작한 화기로 거둔 승리였고, 군선에 화포를 정착하여 최초로 함포공격이 감행된 해상전투였으며, 한 차원 높은 함포전술이 가미되어 고려가 해상방어를 적극화하는 새로운 변화를 이뤄냈다.

승전 (2)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관음포대첩
고려 말인 1383년(우왕 9) 5월 정지의 함대가 남해현(경남 남해군) 관음포 앞바다에 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남해 대첩'이라고도 한다.
3년전인 1380년 진포에서 왜선 500척이 격침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왜구는 120척의 군선을 이끌고 침입해 앞서 합포(마산)를 공격하였다. 급보를 받은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는 나주의 목포에서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급히 나아갔고, 왜구는 정예병 군사 140명씩을 배치한 큰 군선 20척을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정지는 앞서서 공격하는 배를 격침시킨 다음 화포를 사용하여 그 가운데 17척을 대파하였다.
당시 고려군의 화포를 운영하는 책임자는 최무선 이었는데, 움직이고 있는 적선에 화포를 정확하게 적중시킨 진정한 해전이었다. 이 싸움은 승리를 거둔 뒤에 정지가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하였으나 오늘같이 통쾌한 적은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왜선을 철저히 격파한 해전이었다. 관음포대첩은 왜구들이 고려 수군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고 세계 해전사 처음으로 함포로 적을 물리친 전투라는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전투는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 등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화상대첩과 함께 왜구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킨 승전이었으며, 관음포대첩으로 자신감을 가진 고려군은 대마도정벌을 추진하였다.

최무선 과학관 내부
1층 (1) 복제 유물 전시 공간 -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토대로 조선 시대로 이어온 천, 지, 현, 황자총통을 복원하여 전시.
가정을묘천자총통(보물 647호) : 1425년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해상전에서 사용되었다. 총길이 1.31m 포구 지름 12.8cm로 우리나라 화포 중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화기이다.
지자총통(보물 862호) : 대형총통 중 두 번째로 큰 우리나라 고유의 화포로, 천자총통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에는 판옥선이나 거북선에서 주포로 사용되었다.
현자총통 : 임진왜란 당시 명량해전에서 133척의 일본 전함을 격파시켰다. 조선 시대 사용된 징거리 화포 중 하나로 화살은 차대전을 사용하였으며, 사정거리가 2,000보(약 2.5km)로 가장 길다.
별황자총통 : 황자총통을 개량한 조선 중기의 총통으로 천·지 ·현 ·자 총통에 비하여 작지만 이동이 편리한 총통이다. 약통 뒤에 손잡이가 붙어 있고 총통의 중심 근처에 포이砲耳가 붙어 있는 것이 황자총통과 다르다.
대장군전 : 조선 시대 무기의 하나로 화살을 개량한 것으로, 천차총통으로 발사하면 900보(약 1.1km)를 날아감
장군전 : 지자총통으로 발사하는 화살로 순 쇠붙이로 만들었으며, 발사 거리는 2,000보(약 2,5km)
차대전 : 현자총통을 이용해 발사한 화살로 나무로 만들었으며 철로 된 깃翎을 달았음. 시대에 따라 길이나 둘레의 수치에 차이가 있음
피령차중전 : 황자총통의 탄환으로 사정거리는 1,100보(약 1.4km)
삼총통 : 조선 전기부터 중기까지 사용하던 화약 병기로 발사물로는 차중전을 사용하였으며 사정거리는 800보(640m)에 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층 (2) 기획전시실 - 최무선장군이 연구하고 개발한 화약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기본적인 지식을 그래픽패널로 간략히 설명하여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공간.
<화약의 역사> 인류의 문명은 불의 발명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불보다 더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한 도전을 거듭해 왔다. 이에, 스스로 타오를 수 있는 물질, 엄청난 속도로 광음을 내며 폭발하는 불, 즉 화약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인류 최초의 화약은 유황이나 석유, 목탄 등의 혼합물을 배합하여 만든 것으로 그저 '강한 불' 정도였고 이것을 인위적으로 억제하거나 조절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사용한 곳은 별로 없었다. 이 강한 불이 오늘날의 흑색화약으로 발전되면서 이를 제어하는 방법을 터득함에 따라 비로소 전쟁용 무기로, 또 산업용으로 발전하여 지금까지 그 역사가 이어져 오고 있다.
<불로불사의 단약과 화약> (3세기, 중국) 서양에 연금술이 있었다면, 중국 도가에는 연단술이 있었다. 불로불사를 위해 단약丹藥 연구에 몰두하던 중국의 연단술사들이 초석에 목탄과 유황을 섞어 강력한 불꽃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한∼위) 위백양이 저술한 서계 최고의 연단술서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에서 초기 연단술을 엿볼 수 있으며, 3세기 무렵 갈홍이 지은 불로장수 비법서 <포박자抱朴子>에는 단약 제조에 초석과 유황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중국의 도가 경전인 <도장경道藏經>에는 '불'로 만든 '약'이라 하여 '화약火藥'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주술적 행사에서 비롯된 불꽃놀이> (7세기 이후, 중국) 불꽃놀이Fireworks는 7세기 초 수나라 양제 시절부터 시작되었는데, 대나무를 태울 대 마디마디가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을 보고 '폭죽爆竹(Firecracker)'이라 하다가 이후 불꽃놀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이후 당나라 때 비로소 '화수은화'라고 하는 아름다운 모양의 불꽃놀이로 발전한다, 잡귀를 쫓으려는 무속신앙에서 비롯된 불꽃놀이는 차츰 화약의 아름다운 불꽃과 소리에 매료되어 점차 기술이 발전되었다. 13세기 무렵 이탈리아에서 전해진 불꽃놀이는 유럽전역으로 퍼지면서 궁정의 축제와 승전 축하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흑색화약의 등장> (13세기, 유럽) 초석, 황, 목탄(숯)의 혼합물을 '흑색화약'이라고 이름 붙인 이는 바로 로저 베이컨이다, 그는 고대 전설 속 '그리스의 불' 재현을 하려는 연구 끝에 흑색화약을 만들어 낸 후, 자신의 연구 기록을 남겼다. 이때, 베이컨은 화약이 사악한 목적에 이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라틴어 철자를 바꿔 수수께끼처럼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14세기 초 독일의 슈바르츠가 베이컨의 기록을 판독함으로써 유럽의 흑색화약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고, 그 후 유럽에서는 각종 화약무기의 제조가 성행하였다. 새롭게 등장한 화약무기는 전쟁의 양상을 변화시켰으며, 봉건제도를 몰락시키고 근대화를 앞당기는 촉매가 되었다.

1층 (3) 시청각실 - 시청각실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최무선장군의 화약개발에 대한 의지와 화통대감을 통한 화약무기를 바탕으로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던 세계 최초의 함전해전인 진포대첩에 대해 다룬 3D 그래픽 애니매이션(5분 상영)이다.

2층 (1) 계단실 - 과학자들의 얼굴 부조와 간략한 소개가 계단 벽에 전시되어 있다. 인물들의 이름을 나열해보면- 최무선, 이천, 장영실, 세종대왕, 이순지, 허준, 홍대용, 서호수, 김정호, 김점동, 이원철, 윤일선, 우장춘, 조백현, 이태규, 안동혁, 김동일,  석주명, 장기려, 현신규, 최형섭, 김순경, 김재근, 이임학, 조순탁, 허문회, 이호왕, 이휘소

2층 (2) 상설전시실 - 최무선의 화약개발의 과정과 과학자로서의 위대함을 설명하고 화약개발로 인해 우리나라의 무기과학역사에 어떠한 발전이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는 공간으로 실물모형의 전시 공간이다. '불꽃에 품은 꿈', '최무선의 생애와 화약연대기', '여말선초 화약병기의 과학성', '신기한 과학 테이블', '최무선의 업적', '고려후기 대외항쟁', '대형화포와 해전술의 과학', '미래를 여는 전통과학' 등의 게시물을 볼 수 있다.




태그:#최무선, #이순신, #임진왜란,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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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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