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했던 지난 여름, 무더위 덕택에 저녁나절마다 열대야를 피해 동네 도서관에 갔다. 책을 읽으며 더위를 피하려 했지만 한낮의 더위에 지친 심신은 책에 집중할 기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는 만화는 그럴 때 좋은 읽을 거리였다. 그렇게 이 책 <오후 네시의 생활력>을 만났다. 무더위가 물러가고 정신을 차린(?) 이후 책을 구입해 다시 한 번 읽었다. 우연히 좋은 사람을 만난 것처럼 자꾸만 떠올라서다.
제목과 그림체가 맘에 들어 읽게 된 이 책은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주인공 영진의 시선으로 자신과 가족, 이 사회에 만연한 불안을 그려낸다. 열심히 살고자 하지만 자꾸만 무언가에 떠밀려 버리는 이들의 불안한 삶을 특유의 감수성과 현실성이 느껴지는 저자의 그림체에 잘 담아냈다.
서체처럼 만화 속 그림체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개성과 매력이 있구나 실감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며 부딪치는 마음과 생각들이 담긴 저자의 독백같은 글도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만화가들은 부럽게 대부분 글도 잘 쓰는데 아마도 만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생각이 정리되고 좋은 글이 떠올라서가 아닐까 싶다
열심히 살고자 하지만 자꾸만 내몰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공무원이 되겠다고 젊은이들이 이렇게 많이 달려드는 것은 분명히 사회적 낭비다. 그 낭비는 사회의 것이지, 완강히 버티는 이 사람들의 낭비는 아니다. - 본문 가운데
'오후 네 시'는 만화작가인 저자가 본격적으로 일을 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마흔 살이 된 주인공 영진의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된다는 불혹의 나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흔들리고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은 마흔 같은 시간이다.
마흔을 맞은 기간제 교사 이영진을 주인공으로 사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어떤 것은 포기할 줄 알고, 어떤 것은 완곡하게 넘길 줄도 알고, 싫은 사람은 반쯤 눈 감고 볼 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불혹이란 말과 달리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 땅에서 불혹을 맞은 많은 이들이 여전히 미혹되는 건 대한민국이 헬조선, 흙수저로 대변되는 불안 사회여서다.
기간제 교사인 영진은 매년 재계약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기독교 계열 사립학교 재단의 눈치에 주말마다 원치 않는 교회 예배에 나가야 하고, 정규직 교사들이 기피하는 자율학습지도며 방학 중 보충수업 담당도 도맡는다. 그래도 재계약이 되지 않는다. 영진은 다시 기간제교사 일자리를 찾아야 할지, 임용고시를 또 봐야 할지 복잡하다. 흔히 학교를 사회와 별도로 존재하는 곳처럼 여기곤 하지만, 경쟁과 경제적 효율성은 이제 기업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영진은 독백한다.
"비정규직은 흔하디흔해 더 이상 불행해질 것도 없다. 아무리 애써도 비정규직. 이것은 사회적 산물이다. 사회적 실패를 개인으로 살아내는 것이 우리 세대의 역할이 될지도 모른 채 꿈꿨다. 다만 우리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불안정한 것은 영진이 일하는 사립학교 뿐만은 아니다. 영진은 혼자, 때로는 친구나 애인과 함께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일상을 보내는 이 땅 곳곳이 무척이나 위태롭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사회와 유리되어 시험공부에만 목메는 학생들과 노량진의 청년들, 정당한 권리도 갖지 못한 채 쉽게 이용당하고 배척당하는 이주 노동자들, 열심히 살고자 하지만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자꾸만 떠밀려 버리는 사람들... 주인공 영진이 느끼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경계에 서있다.
1970년대 전라도에서 서울로 이주해 막노동부터 시장 장사까지 갖가지 일을 섭렵하며 삼남매를 길러낸 아버지,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빌딩 청소를 하며 자력으로 노년의 삶을 유지하는 엄마는 딸에게 조언한다.
"누가 땅 부자가 되든, 비리로 부를 쌓든, 남의 일 상관 말아라. 분노할 시간이 있으면 성실해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골이 나게 들은 이 말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느 날 딸은 그 말의 주인을 닮아가려 종종 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살아남는 사람 쪽에 있고 싶다.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게 하는 힘, 생활력
허우적대는 나를 건져낸 남자친구와 대화하며 깨달았다. 삶의 무게를 버텨내는 건 내 몸이지만, 내 몸에 그걸 버텨낼 힘과 기술이 있음을 믿고 깨우쳐주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것. 사람의 몸은 현재를 살아내기 위해, 노동만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건강은 중요하지만 건강하려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나름대로 겪어 익힌 생활력'으로 각자의 삶을 지탱한다. 그 힘에 사회가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 본문 가운데
책 속 인물들은 저마다 주변과 갈등을 빚으며 자신의 생활을 일궈나간다. 아무리 애써도 오를 수 없게 하는 사회에서도 <오후 네시의 생활력>의 인물들은 미끄러지지 않고 어떻게든 생활을 꾸려간다. 이 내리막 사회의 신산한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작가는 그 원동력을 '생활력'이라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을 버텨내는 힘,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삶에서 배우는 생활의 힘이다. 그 버티는 힘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더불어, 버거운 인생의 무게를 애써 견디고 지키며 살아가는 그 힘에 우리 사회가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불의와 불공정을 참는 게 생활력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새겨볼 만한 말이다.
책 후반부에서 영진은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고 넘어가지 않으려 한다. 그 모습은 단순히 현실을 도피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삶의 모습과 관점을 바꾸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서울 노량진 고시촌과 학원으로 몰리는 청년들에게서 보듯, 불안정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자연히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길을 찾아가게 된다. 제도에 편입되는데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수록 제도에 순응하게 된다. 불의에 저항하고, 내 삶을 바꾸고 싶다는 바람을 마음 속 깊이 꾹꾹 누른 채 자신을 사회에 맞춰간다.
1998년 경제위기 이후 정부는 기업을 살리기 위해 국민들의 비정규직 확대 정책을 계속 추진해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간곡히 부탁드린다'며 추진하는 노동개혁 또한 실은 비정규직을 확산하고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노동법 개악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국민들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장(혹은 대기업)의 경제적 효율성만이 우선이다. 실패한 통치자는 낙수효과라는 철 지난 거짓말을 여전히 신봉한다.
먹고 사는 일을 정치가 아니라 사주팔자에 물어봐야 하는 여전히 많은 것이 불확실한 시대지만, 영진의 생활력은 현실에 순응하는 것에서 더 나은 현실을 모색하는 것으로 바뀌어간다. 그렇다고 섣부른 긍정이나 위로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저자의 담담한 그림체와 나지막한 독백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느라 다른 것은 볼 틈이 없는 내 막막한 생활력에 작은 힘을 건네주었다.
"살아 있는 한 성실하게 일하려고 한다. 이 일하려는 의지를 멈추지 않는 것으로 세상에 대한 낙관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두려움은 또 올 것이고, 그때도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바닥에 닿는 곳에 걸음을 다시 딛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오후 네시의 생활력>(김성희 글·그림 / 창비 펴냄 / 2015년 11월)
제 블로그 (sunnyk21.blog.me)에도 송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