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서민민생대책위원회가 지난 11일 김제동씨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과 협박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김제동씨의 방송 내용이 새누리당 백승주 의원에 의해 불거진 이후, 국정감사 증인출석 논란과 보수단체의 방송퇴출 시위가 열리더니 마침내 검찰에 고발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서민민생대책위원회는 김제동씨의 발언으로 현역·예비역 군인의 명예와 군의 이미지 등이 실추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씨가 공인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정치적 목적과 인기몰이를 의해 말을 만들어 낸 것이라면 심각한 국기 문란행위로 비칠 우려가 있다"며 고발의 이유를 설명했다. 군의 이미지와 명예를 끔찍히 챙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명예의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실추된 군의 이미지 또한 개선될 여지가 높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목표물이 잘못 설정돼 있다는 점이다. 기껏 칼은 꺼내들었는데 칼을 겨누는 대상이 잘못됐다. 군의 명예와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는 당사자는 김제동씨가 아니라 바로 군 당국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방산비리와 군납비리, 군 지휘관과 간부의 성추문, 병영 내 구타 사고 등이야말로 군의 명예와 이미지를 추락시키고 있는 실질적인 주범이다. 그러므로 고발의 대상은 김제동씨가 아니라 군 당국이어야 하는 것이 맞다.
군 명예 갉아먹는 건 다름 아닌 군 자신
군 당국의 '셀프 명예훼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에도 군은 군장성 부인들의 낯뜨거운 일탈이 공개되며 망신살을 샀다. 지난 2013년 촬영된 문제의 동영상에는 해군참모총장 부인 등이 군 휴양소에서 파티를 열면서 참모총장 부인의 이름이 적혀있는 속옷을 보여주는 등 보기에도 민망한 장면들이 담겨있었다. 해당 영상을 공개한 정의당 김종대 의원에 따르면 이 행사는 전액 국방예산으로 지원됐으며, 현역 장병들은 물론 군함까지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 군 간부 부인들의 이동을 위해 군함까지 동원했다면 이는 국가안보를 뒤흔드는 묵과할 수 없는 중죄다.
12일엔 육군 제37사단 공병대대에서 급성맹장염이 발병한 환자에게 소화제를 처방해 해당 장병이 후유증에 시달린 사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 군이 사실을 은폐하는 것은 물론 부대 간부들이 피해 장병을 협박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 모습은 국민에게 아주 낯익은 장면이다. 그동안 군 당국은 내부에서 사건과 사고가 터질 때마다 관련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통제받지 않는 조직에서 일어나는 흔하디 흔한 일상이다. 간섭과 통제를 받지 않는 조직인 군은 조직의 유지를 위해 폐쇄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폐쇄적 조직이 불법과 부정에 노출되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 국가안보의 심장을 갉아먹는 방산비리와 군납비리, 개인의 인권과 존엄을 유린하는 각종 성추문과 구타 사고 등이 끊이질 않는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야말로 군의 이미지를 먹칠하는 원흉 중의 원흉이다.
이처럼 군의 명예와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군 자신이다. 김제동씨가 군 내부의 권위적인 위계문화와 전근대적인 병영문화를 꼬집은 것을 문제삼고 이것을 공론화한 백 의원이나, 국감장에서 공개적으로 사죄를 요구한 김영우 국방위원장이나, 그리고 급기야 검찰에 고발까지 한 시민단체나 '도긴개긴'이다. 비판을 하려면 군을 불신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군 당국에게 해야 하며, 고발을 하려면 군을 이 지경으로 만든 군 책임자들에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
김제동 고발, '정치보복'인가김제동씨를 고발해 화제가 된 서민민생대책위원회는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지난달 초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은 새누리당 노철래 전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던 단체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단체로서의 성격도 불분명하거니와 새누리당과 관계된 인물이 위원장으로 있던 단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김제동씨가 세월호 참사, 국정교과서, 사드 배치와 관련해 정부여당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다는 점에서 일련의 과정들이 정치보복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들어 윤도현, 김장훈, 김미화, 김여진씨 등 정치·사회적 이슈들에 정치적 소신을 밝혀왔던 소셜테이너들이 보수단체로부터 고발을 당하거나 방송출연에 제약을 받는 등의 불이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김제동씨에 대한 새누리당과 보수단체의 집중 공격을 정치적 외압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성과 상식을 망각한 보수세력의 노골적인 '김제동 죽이기'가 도무지 설명이 되질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든 정치적 소신을 밝힐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이 권리는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다. 방송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풍자는 정치권력과 기득권의 부조리한 온상을 비틀며 대중과 교감하고, 그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해 정치 수준을 격상시키는 효과가 있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일수록 정치 풍자가 널리 행해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나 보수정권 9년 만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정권과 척을 졌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에서 하차를 당하고, 정권과 정치인의 무능과 부조리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를 받는 시대다. 방송인이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것도, 정치 풍자와 세태 비평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불관용의 시대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제동씨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진작에 사라졌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들로부터 민주주의의 가치, 보편적 이성과 상식이 공격받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구태와 구습, 낡은 것들의 지배를 받는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리 만무하다. 단호히 거부하고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더 빠른 속도로 쇠락해 갈 것이다. 이번 논란을 좌시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