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태풍은 두렵다. 사라, 매미를 보듯 무섭고 강력한 위력 때문이다.
1959년 9월에 발생한 제14호 태풍 '사라호'는 2003년 태풍 매미 이전까지 44년간 역대 한반도 역사상 재산 및 인명 피해 측면에서 최악의 태풍으로 기록됐다. 여름철보다 가을에 오는 태풍이 더 두려운 이유다.
태풍이 만든 신종어...영웅, 살신성인
제18호 태풍 차바(Chaba)는 지난 5일 제주 고산에서 최고풍속 56.6m를 기록했다. 초속 60m였던 매미와 56.7m를 기록한 루사에 이어 세 번째 기록이다. 이번 태풍은 제주도와 남부지방 그리고 부산을 휩쓸며 큰 피해를 안겼다.
이례적으로 10월에 우리나라를 덮친 태풍 차바는 한동안 시끄러웠던 정치적 사안들을 블랙홀처럼 빨고 지나갔다. 특히 여수를 강타한 차바는 여객선 '미남크루즈'를 전국에 부각시켰다. 강풍에 떠밀려 오동도 방파제에 좌초된 아찔한 모습이 연출돼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배는 1321톤(길이 66m 너비 13m)에 이르는 대형 여객선이다. 1085명이 승선할 수 있다. 하지만 태풍에 좌초되었다. 이날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해경대원들이 바다에 빠진 선원들을 구하는 모습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이후 몸을 던진 해경의 '살신성인' 보도가 꼬리를 물었다. 특히 이정현 대표의 행보가 부각됐다. 단식을 끝낸 이정현 대표는 지난 7일 여수의 한 병원을 찾아 해경대원을 이렇게 추켜세웠다.
"여기에 계신 영웅들을 보면서 우리 국민들이 든든함을 느꼈을 겁니다. 흐뭇하고 고맙고 대단하고 한없이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구조영상을 보고 우리 영웅들을 찾아보려 결심하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이 같은 내용이 전해지자 똑소리닷컴 한창진 대표는 페이스북에 "선원들은 자신들 스스로 대피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확인이 필요합니다"라고 적었다.
태풍 차바가 남긴 의문점 이번 태풍이 남긴 의문점이 있다. ▲해경의 인명구조 활동이 와전된 것이 맞나 ▲ 태풍이 북상하는데 선사측은 왜 피항조치를 안 했나 등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기자는 태풍을 직접 겪은 선원들을 취재했다. 한 선원은 11일과 12일 두 번에 걸쳐 이정현 대표실로 전화를 걸어 "보도된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며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아니냐"라고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선원들, "퇴선명령 조치로 죽을 뻔 했다"배가 밀린 오동도 현장에 출동한 해경은 선원 6명에게 퇴선명령을 내렸다. 이후 방파제 입구로 대피하는 도중 해경 4명과 선원 2명은 월파된 너울성 파도를 맞아 바다에 빠졌다. 선원 두 명은 병원에서 치료중이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선원은 "태풍 속에서 살았다는 게 끔찍하고 기적 같다"라고 몸서리를 쳤다. 그는 오히려 "해경의 퇴선명령 조치로 죽을 뻔 했다"면서 "당시 배가 떠밀렸지만 침몰된 상황도 아니고 5분만 더 참았으면 태풍이 지나가 이 같은 사고는 충분히 비켜갈 수 있었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해경대원과 바다에 빠진 그는 쓰나미성 파도에 70m를 떠밀렸다. 이후 해경대원의 도움을 받으며 헤엄쳐 나왔다. 이곳은 태풍 매미 때 너울이 덮쳐 10여명이 수장된 지점이었다.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한 젊은 대원들이 고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물에 빠진 상황도 아니다"면서 "다리입구로 건너오다 너울에 휩쓸려 6명이 바다에 빠졌다. 해경은 선원들 대피과정에서 밧줄에 사람을 연결해주는 안전장치인 샤클을 걸지 않아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라고 해경의 안전 조치 미숙에 불만을 터트렸다.
그는 "경험 없는 선장과 선사측의 잘못된 조치가 이 같은 상황을 자초한 것"이라며 "당시 선원들은 이곳에서 앵커투묘(닻을 내리는 것)를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선장은 선사측과 무전기를 주고받으며 두 차례 앵커투묘를 했으나 실패해 배가 떠밀렸다"라고 주장했다.
해경 "선박 옆부분 현창 깨졌고, 엔진 스톱돼 퇴선 지시"취재가 시작되자 해경은 선사측을 상대로 조사에 나선 것으로 파악됐다. 여수해경은 지난 11일 선장과 선사대표에 대해 선박입출항 관련 입건 조사를 했고, 수사가 진행 중이다. 현재 해경대원 2명은 통원 치료중이고 나머지 2명은 입원중인 상태다.
해경의 인명구조가 다소 와전돼 언론에 알려졌다는 기자의 물음에 해경 관계자는 "당시 출동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렸다"면서 "선원 2명과 구조대원 4명이 물에 빠졌는데 선원 한 분은 수영을 할 줄 알아 탈진상태에서 구조대원과 밧줄을 내려 구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영상도 다 나와 있기 때문에 구조를 안 했는데 일부러 구조를 했다고 한 상황은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해경이 안전대피 과정에서 밧줄에 샤클을 걸지 않아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물음에 신아무개 구조대장은 "구조 당시에는 큰 파도가 없어 퇴선해 이동하던 중 예측불가한 해일성 파도가 덮쳤다"면서 "큰 파도에 샤클을 걸면 더 큰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구명조끼만 착용시켰다"라고 답했다.
그는 또 선저(배 밑바닥)가 구멍이 나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퇴선시켰다는 선원들의 주장에 "메뉴얼에 현장 지휘관의 판단이 중요하다"면서 "당시 선저는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선박 옆부분 현창이 깨져 물이 들어오고 있고, 엔진도 스톱되어 퇴선 지시를 내렸다"라고 답했다.
수차례 피항 거부한 선사측...민형사상 책임 불가피 이번 사고의 원인은 선사측이 자초한 것으로 보인다. 선사측은 왜 피항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걸까. 취재결과 미남크루즈호는 태풍 전날 오후 3시까지 영업을 했다. 당시 피항에 불응한 배는 2척이었으나 끝내 미남호만 남았다. 감독기관인 여수지방해양수산청은 여러 차례 피항명령을 내렸으나 선사측은 불응했다.
여수항만청 관계자에 따르면 "선원해사 안전과와 항만물류과에서 4일 오전 9시와 오후 2시에 태풍 피항명령을 내렸지만 요지부동이었다"면서 "오후 5시까지 피항에 응하지 않아 해당선박을 명기해 명령불이행에 따른 모든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라고 공문을 발송했다"라고 밝혔다. 또 여수해경에 확인한 결과 "운항관리실도 수차례 이동지시를 내렸지만 선사측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선사측의 입장은 어떨까? 피항에 불응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선사측 홍아무개 이사는 "해경이나 항만청에 보고 드리는 프로세스는 알고 계시지 않냐고 되물으면서 그것이 팩트고 따로 할 이야기는 별도로 없다"라고 정확한 답변을 피했다.
그는 이어 "(태풍 이후) 배가 조선소에서 수리중이라 경황이 없다"면서 "이미 해수청이나 해경에 보고했다"라고 덧붙였다. 반면 한 선원은 "태풍이 대한해협으로 빠진다고 해서 피항을 안했다"면서 "선원들은 회사결정에 따랐다"라고 전했다.
선사측은 현재 태풍에 부서진 선박 수리로 운항이 중지된 상태다. 특히 항만청에서 선사측의 피항불이행에 따른 행정명령이 어떻게 내려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