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17일 오전 9시 38분]무덤은 능, 원, 총, 묘 등으로 나눠진다. 능(陵)은 선덕여왕릉, 무열왕릉 등 무덤 속에 묻힌 왕이나 왕후를 알 수 있는 무덤을 말한다. 원(園)은 왕과 왕비가 아닌 왕족의 무덤을 말한다.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지만 왕후는 아니었던 영빈 이씨의 무덤 수경원 등이 그 사례이다. 총(塚)은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물이나 벽화가 두드러지게 발견된 무덤을 말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총은 경주 천마총이고, 나라 밖의 것으로는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측되기도 하는 만주의 장군총이 있다.
보통의 무덤은 묘(墓)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안에서 일반인의 묘 중 가장 거창한 것은 경주에 있는 '김유신 묘'이다. 김유신 묘는 웬만한 왕릉보다 더 웅장하지만 그 본인이 왕도 신라 왕족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묘로 불린다. 물론 왕으로 있다가 쫓겨난 연산군, 광해군 등의 무덤도 그냥 묘로 지칭된다.
무덤은 능,원, 총, 묘 등으로 구분된다
묘를 부르는 특이한 호칭 중에는 고분(古墳)도 있다. 고분은 글자만 그냥 읽으면 옛날(古) 무덤(墳)을 가리키지만, 오래 되었다고 해서 모두 고분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주 금척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 공주 송산리 고분군 등, 대구 불로 고분군, 경북 고령 대가야 고분군 등, 경남 창녕 교동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 등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는 등 역사적 가치를 지닌 옛날 무덤이라야 그런 이름을 얻을 수 있다.
고분보다도 더 특이한 무덤 이름은 의총(義塚)이다. 의총은 의로운 무덤이라는 뜻이다. 물론 무덤 자체가 의로울 수는 없으므로 그 안에 묻힌 주인공이 의사(義士)일 때 그렇게 부른다. 하지만 조헌, 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 의병장들의 묘에는 의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다. 그분들이 의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의총은 개인 의사의 묘에 붙여지는 호칭이 아니라 여러 의사들이 한 무덤에 묻혔을 때에만 사용되는 무덤의 이름이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 당시 금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일본군의 호남 침략을 저지한 조헌 의병장과 영규 승병장의 700명 의사들의 합동 묘소는 '칠백의총'이라 부르지만, 그와 별도로 혼자 묻혀 지내는 조헌 선생의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도농1길 71 소재 산소는 그냥 묘라 부른다.
따라서 모든 의총들에는 칠백의총과 같은 특별한 내력이 있다. 1592년 4월 15일 동래읍성 전투 때 전몰한 이름 없는 의사들을 기려 조성된 동래의총과,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 8월 12일부터 16일까지 벌어진 남원성 전투에서 전몰한 1만여 무명 병사들을 모신 남원 만인의총에도 비장한 역사가 서려 있다. 그래서 의총 앞에는 언제나 슬픔이 흐른다. 나라와 가족과 향토를 위해 목숨을 내졌지만, 후대에 이름조차 남아 있지 못한 분들…….
오늘은 우리나라 의총들 중에서 가장 후세인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곳을 찾아가려 한다. 무덤 속에 묻혀 있는 한 분 한 분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무덤의 이름인 '6백의총'조차 생소하기 짝이 없는 정말 '슬픈' 곳이다.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한 날 한 시에 600명이나 되는 의사들이 순절했건만, 그 역사도 그날의 그 치열했던 정신도 지금은 아는 이 거의 없이 망각되고 말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848번지, 862m 화장산 동쪽을 넘는 노루재와 그 아래 들판을 흐르는 소천(小川) 일대에서 3만 여 일본 대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몰한 6백 의병들을 기려 세워진 충렬사가 바로 그곳이다. 왜 이곳을 찾아보아야 하는가?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이곳 의병들의 치열한 전투와 장렬한 전사는 임진왜란 7년 전쟁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인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봉화 소천 지역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는 노영구의 논문 '임란기 봉화 소천 지역의 전투와 항쟁 활동'에 학술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노영구는 '소천 전투와 이어지는 방어전의 성공으로 경상도 북부 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침공이 좌절되면서 이 지역은 안정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안동별읍항병과 같은 대규모 의병 부대를 조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경상도 지역 조선의 반군의 주요 근거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면서 '결론적으로 소천 전투를 계기로 일본군의 경상도 북구 지역 장악은 불가능해졌고, 이 지역을 발판으로 한 조선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경상도에서 크게 위축되었다.
이는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과 함께 (일본군의) 한성 이북에 대한 보급의 문제를 가져와 일본군의 전반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떨어뜨려 궁극적으로 전쟁의 국면을 이후 조선에 유리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소천 전투에 대한 이같은 긍정적 평가는 2016년에 발표된 '임란기 봉화 소천 지역의 전투와 항쟁 활동'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420여 년이나 전인 임진왜란 발발 초기의 1592년 8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이미 그같은, 아니 그보다도 훨씬 소천 전투에 큰 의미를 부여한 기록이 남아 있다.
수정실록은 '경상좌도 의병장 유종개(柳宗介)가 적을 만나 패하여 전사하였다'로 시작되는 이 날 기사에서 '경상좌도의 산협(山峽, 산골짜기)과 해빈(海濱, 바닷가)의 10여 고을은 적로(賊路, 적의 침입로)와 거리가 조금 멀었으므로 사족(士族, 선비 가문)들은 험한 지역을 의지한 채 군사(의병)를 일으켰다가는 적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전혀 군사를 모으는 자가 없었다(若有兵狀 秪以招賊). 그런데 예안 사람 유종개가 홀로 향병(鄕兵, 의병) 수백 명을 모아 태백산(太白山)에 웅거하여 스스로 지켰다'면서 봉화 일대의 의병 창의에 대해 증언한다.
이어 수정실록은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일지(一枝, 일부) 군대가 영동의 고성·강릉을 따라 평해(경북 영덕)에 이르러 노략질하였다. 유종개가 갑자기 이 적을 만나 패하여 전사하였는데, 왜적도 퇴각하여 경주로 향하였다'라고 기술한다. 유종개가 비록 전사하였지만 왜적은 경주로 물러갔다(!)는 기록이다.
일본군, 싸움 포기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
수정실록이 전해주는 더욱 놀라운 기록은 '왜적은 평소에 죽령 길이 험하여 넘기가 어렵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 길을 경유하지 않았다. 안동에 주둔했던 적은 (중략) 얼마 있다가 철수하여 되돌아갔기 때문에 죽령 아래의 풍기·영천(영주)·예안·봉화와 그 남쪽의 청송·진보 등 여러 고을이 다행히 병화(兵火, 전쟁의 피해)를 당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복지(福地, 복 받은 땅)라 말했다'라는 증언이다.
'복지', 복받은 땅! 놀라운 표현이다.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을 1592년 당시 겪지 않은 지역이니 '복받은 땅'이라 말한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인간 소외 현상을 일으키는 가장 극단적인 것이 바로 전쟁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충렬사 외삼문 아래에 세워져 있는 '봉화 임란의병 전적지' 안내판을 읽어본다.
'봉화임란의병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화장산 일대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산화한 의병장 류종개와 600의병의 넋을 추모하고자 조성된 곳이다.선조 25년(1592) 8월 22일 새벽 왜군의 일부가 소천면 고선리 황평과 잔대미 마을을 거쳐 현동천으로 남하하고, 또 다른 무리는 늦재를 지나 황평에서 중리와 고선천을 건너서 소천면 현동2리 시동마을을 경유해 산의 능선을 타고 화장산으로 향하고 있었다.적의 퇴로를 탐지한 류종개 대장과 참모, 그리고 600의병들은 적의 후미가 당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제히 공격하여 1천여 명의 왜군을 살상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당시 활, 창, 칼, 도끼 등의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의병군은 신예무기인 조총 등으로 무장한 3600여 명의 왜군을 상대로 첫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으며, 이후 전열을 정비한 왜군에 맞서 여러 골짜기와 산봉우리에서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을 전개하였다.그러나 류종개 장군을 비롯한 600의병은 끝내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소천 전투에서 1600여 명의 병력이 손실된 왜군은 봉화, 안동 방면으로 진군을 포기하고 울진, 영덕 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조헌, 영규, 고경명 등의 금산 전투, 김시민 등의 진주성 전투,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의 낙동강 일원 전투, 이순신 등 수군의 해전, 권율과 황진 등의 이치 전투는 모두 일본군의 호남 진입을 저지한 싸움들이었다. 이들 전투들은 하나같이 적의 보급을 끊음으로써 임진왜란 전체의 흐름을 바꾼 승전들이었다. 그래서 그중에서도 특히 대승을 일군 진주성 싸움과 한산도 승전을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기리고 있다.
전쟁사적 의미 가진 임란 전투 중 가장 덜 알려져
그런 뜻에서, 경상도 북부의 일부 지역을 '복받은 땅'으로 만들었고, 일본군이 더 이상 진격을 포기한 채 다른 곳으로 이동하도록 만듦으로써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꾸었다고 수정실록이 평가한 소천 전투 또한 대단한 의의를 지닌 싸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봉화충렬사는 찾아오는 답사자가 별로 없는 것일까? 아니, 소천 전투에 대해 아는 이가 드문 것일까?
봉화 충렬사를 찾아 소천 전투에서 전몰한 600여 의사들을 기리고, 사당 건물 바로 뒤에 늦게나마 조성된 육백의총도 참배할 일이다. 지금까지는 알지 못한 까닭에 답사를 못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이미 2011년 8월 27일에 완공되었으므로 봉화 충렬사 일원의 임진왜란 전적지는 결코 역사가 일천한 현창 시설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육백의총에 절한 후 사방을 둘러보면 왼쪽의 노루재, 정면 아래의 소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해 싸우다 목숨을 버린 420여 년 전 600의병들의 피가 서려있는 곳들이다. 그런데도 충렬사 사방의 자연들이 내게는 그저 가슴이 시원해지는 광활한 전망, 흰 구름과 노랗게 익은 벼이삭들이 돋보이는 평화로운 풍경으로 다가올 뿐이다. 이곳에서 목숨을 버린 600의병들은 결코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 텐데…….
이토록 내가 역사의식이 무뎌진,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매몰된 소시민으로 변하고 말았단 것인가! 혼자 그런 신독(愼獨,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스스로를 채찍질함)에 젖는다. 그제야 화장산에서 동쪽으로 내려뻗은 능선이 중간쯤에서 문득 말안장 자리처럼 폭 내려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전쟁터에 온 답사자다운 감성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마음속을 '저기가 바로 노루재구나. 노루재로 가보자!' 하는 생각이 마구 휘젓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