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실록> 등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한 건물을 사고(史庫)라 불렀다. 따라서 사고는 나라의 '역사'를 넣어두는 창고 역할을 했다. 이는, 사고가 화재를 당해 불타면 나라의 역사가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임진왜란 당시 춘추관의 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가 적들에 의해 방화되었다. 건물은 물론이고 보관하고 있던 실록 등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다만 전주사고의 것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는데, 이는 오희길, 손홍록, 안의, 승려 희묵이 실록 등을 부랴부랴 내장산으로 피란시킨 덕분이었다.
외적 침탈 피해 임진왜란 후 산에 재건되는 사고들임진왜란 이후 외사고(外史庫, 내사고인 춘추관 이외의 사고)들은 모두 산 속에 재건되었다. 다시 인쇄된 전주사고의 책들은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강화도 정족산의 새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적의 침입로에 위치한다는 점이 확인된 묘향산사고는 재차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졌다.
그 이후 외사고 건물들은 일제 강점기, 1950년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다시 무너졌지만, 지금은 전주사고, 오대산사고, 적상산사고, 정족산사고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즉, 임진왜란 이후 재건된 사고들 중에는 태백산사고만 빈 터로 남아 있다.
지금 말하는 태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의 태백산이 아니다. 경상북도 봉화군의 각화산을 말한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태백산사고'가 아니라 '각화산사고'이다. 그런데도 조선 정부와 각종 역사서는 모두 각화산사고가 아니라 태백산사고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당시에는 태백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11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각화산도 뭉뚱그려서 태백산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병장 유종개가 적을 만나 패하여 전사하였다.'로 시작되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자 기사에는 '경상좌도의 산협(山峽, 산골짜기)과 해빈(海濱, 바닷가)의 10여 고을은 적의 침입로와 거리가 조금 멀었으므로 사족(士族, 선비 가문)들은 군사(의병)를 일으켰다가는 적을 불러들이게 될까 걱정하여 전혀 군사를 모으지 않았다. 다만 유종개가 홀로 향병(鄕兵, 의병) 수백 명을 모아 태백산(太白山)에 웅거하여 스스로 지켰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각화산을 태백산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각화산을 그냥 '태백산'이라 불렀다따라서 2016년 10월 12일 봉화군민회관에서 열린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회장 류한성) 주최 '봉화 지역의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김세현의 논문 <구전 김중청 공을 통해 본 임진란과 복구 활동> 중 '류종개는 목욕재개하고 태백산에 들어가 제문을 지어 산신에게 고유(告由, 큰일을 치를 때 그 내용을 말씀드리는 일)하고 적을 섬멸하도록 도와줄 것을 빌고 아홉 가지 계책을 내어 안집사에게 올렸는데 채택되지 않았다'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류종개 의병장이 왜적 섬멸을 기원한 곳은 강원도 태백산이 아니라 봉화 각화산이라는 이야기이다.
즉, 태백산 사고 터를 답사하려면 태백산이 아니라 각화산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각화산에는 사고가 복원되어 있지 않다. 각화산 찾기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다. 태백산사고 관리 임무를 맡았던 각화사가 있고, 각화사 일원은 류종개 의병장이 출병을 앞두고 결의를 다졌던 임진왜란 유적지인데 어찌 사고 건물이 없다는 이유로 홀대할 것인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각화산길 251(춘양면 석현리 559)에 있는 각화사로 가는 도로는 88번 지방도로이다. 춘양면 소재지에서 4km 남짓 북쪽으로 올라가면 각화사로 들어가는 길이 오른쪽에 나타난다. 그 작은 삼거리 직전에 이정표가 있다.
보통의 이정표에는 지명이나 건물 이름, 거리 등이 갈색 바탕에 흰 글자로 표시되어 있지만 이곳의 것은 상당히 색다르다. 두 장의 사진이 함께 게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화사와 태백산사고건물 사진이다. 물론 각화사 사진은 현재의 모습이지만, 태백산사고 사진은 건물이 남아 있던 당시의 면모를 보여준다.
태백산사고는 각화사 뒤로 800미터 가량 더 올라가야삼거리 오른쪽에 있는 성황당 건물이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각화사까지는 1.5km, 태백산사고 터까지는 2.3km이다. 각화사에서 800m를 더 올라가면 사고가 있던 자리에 닿는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태백산사고 터는 각화사 뒤편에서 좌우로 갈라지는 두 등산로 중 각화산 정상으로 치닫는 왼편 길 중간쯤에 있다. 봉화 의병들이 왜적들과 전투를 벌였던 노루재와 소천 일원은 각화산에서 남동쪽으로 직선 8km 정도 거리에 있다.
성황당에서 각화사까지 가는 좁은 길 좌우로는 사과밭들이 많다. 10월 중순쯤이면 붉게 익은 사과들이 푸른 하늘과 맞물려 저절로 절경을 낳는다. 아무리 과속을 일삼는 도시인이라 할지라도 이 길에서는 저절로 천천히 나아갈 듯하다. 역설적이게도 '별유천지비인간'에 와서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과밭보다도 더욱 자극적으로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수종을 가리지 않고 이 나무 저 나무에 매달아 놓은 '입산 금지 : 송이 능이 채취 금지, 무단 입산시 형사 고발 조치함. 각화산 입찰인 백'이라는 안내판들이다. 경고판이라 불러야 더 어울릴 듯한 이 안내판들은 각화사에서 태백산사고 터에 이르는 길이 왜 깔끔하게 가다듬어지지 못하고 있는지를 조금은 가늠하게 해준다.
입산 금지를 종용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본질적 이유는 다른 안내판도 있다. '입산 금지 : 이곳은 수행 정진하는 선원이므로 입산을 금합니다. 각화사 주지' 안내판이 바로 그것이다.
사찰의 성격, 송이버섯 채취 구역 등 각화산은 이래저래 출입 제한
그러고 보면, 각화산은 아무나 들어가서는 안 되는 산인 듯하다. 류종개 선비처럼 왜적과 맞서 싸운 의병이거나, 수도 중인 스님이거나, 아니면 각화산의 송이버섯 채취권을 가진 사람이거나...... 하지만 각화사 자체는 누구나 방문할 수 있으니 지나치게 위축될 것까지는 없다. 솔향이 가득한 맑은 공기를 들이켜며 사찰로 들어가는 숲속길을 걷는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89호인 '각화사 귀부'가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한다. 신라 고찰로 여겨지는 각화사의 것이지만 귀부 자체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귀부 위에는 '각화사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물론 사적비는 고려 시대 것이 아니다.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6-7번지의 청동기 시대 고인돌 위에 송빈 의병장을 기리는 비가 1964년에 세워졌듯이, 이곳 고려 시대 귀부 위에 사적비가 얹힌 것은 1984년의 일이다.
사적비 뒤 산기슭에 여러 기의 승탑들이 보인다. 하지만 귀부 앞 나무에 매달려 있는 송이버섯 관련 입산 금지 경고판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조금 섬뜩한 기분이 들어 승탑들이 있는 곳으로는 발걸음이 내디뎌지지 않는다. 그냥 각화사 가는 길을 걷는다.
'각화산 각화사'이지만 '태백산 각화사'라 부른다범종루이면서 동시에 사찰 경내로 진입하는 통로이기도 한 영월루에 '태백산 각화사' 현판이 걸려 있다. '각화산 각화사'가 아니다. 대웅전 옆 건물도 이름이 '태백선원'이다. 역시 이 지역민들에게 각화산은 곧 태백산의 일부인 모양이다.
각화사는 특히 대웅전과 태백선원 뒤로 우뚝 솟아 있는 태백산 능선이 푸른 하늘, 그리고 흰 구름과 어우러질 때 가장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대웅전 뒤 높은 둔덕에 앉아 사찰을 향해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며 즐기는 사찰 전경 경치도 보기 드문 절경이다. 한참 동안 머물러 앉아 맑은 바람과, 실제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산바람 속에 숨어 내 후각을 건드리고 있을 송이버섯 향내를 맡으며 쉰다. 나는 지금 이렇듯 한가롭지만, 당시에는 태백산사고가 없었으므로 류종개 선비 일행은 이곳 일원에서 왜적 퇴치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렸으리라.
도로를 따라가면 노루재는 각화사에서 남동쪽으로 약 13km 거리에 있다. 봉화 의병군이 울진에서 쳐들어오는 왜군을 격퇴하기 위해 동진했던 출병로를 따라 노루재를 넘기로 한다. 노루재는 화장산의 이 일대 줄기 모양이 노루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각화사와 노루재의 중간쯤에 있는 춘양면 소재지를 지나 동쪽으로 계속 나아간다. 면 소재지부터는 길이 지방도로가 아니라 국도로 바뀌기 때문에 도로폭이 훨씬 넓어진다. 그래서 무심코 주행을 한다. 그러다가 문득 '노루재 터널' 입구를 알려주는 안내판과 만나게 되면서 화들짝 놀란다. 터널 속을 통과해서는 노루재를 넘었다고 할 수 없다.
노루재 옛길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을 해보니안내판이 서 있는 지점 직전에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이 보인다. 무릇 가장 낮은 곳을 골라 산을 넘는 것이 옛길을 만든 선조들의 지혜임을 어찌 잊으랴. 법전면 어지리 29의 노루재터널 관리사무소 앞을 지나 산속으로 들어선다. 400m쯤 가면 법전면 소천로 752-66 등의 주소를 가진 서너 채의 집이 있고, 그중 하나는 작은 사찰이다.
문제는 이곳이 조그마한 삼거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침 할머니 한 분이 개울가에서 산나물을 다듬고 있다. 임도처럼 여겨지는 왼쪽으로 난 오르막길과, 사과밭 안으로 들어서는 오른쪽 포장길 중 어느 쪽이 더 옛길인지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사과밭 안으로 진입한다. 산자락과 산자락 사이의 낮고 평탄한 땅에 조성된 사과밭이고, 그 가운데로 포장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오른쪽이 고개를 넘는 길일 터이다.
그런데 사과밭 끝에서 길이 끝난다. 과수원 주인에게 길을 묻는다. 사과 따는 일에 열중해 있던 주인은 '옛날에는 소장수들이 이리로 다녔다는데 지금은 사람이 맨몸으로도 지나갈 수가 없어요. 잡목이 우거지고 넝쿨이 빽빽해서 말입니다' 하고 말한다. 지도로 확인해볼 때 150m 가량만 더 나아가면 터널 개설 이전의 도로인 소천로와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막히다니!
150m 정도만 더 나아가면 조선 시대 고개를 넘는데길이 자취를 잃어버리는 과수원 끝자락의 사과나무들에는 붉은 열매들이 한창 아름다운 얼굴을 뽐내고 있다. 서양의 어느 철학자는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말했다지만, 그 명언이 없더라도 붉게 익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린 사과나무를 보면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갑자기 나는 사과나무가 싫어진다. 사과나무로서는 애꿎은 원망이겠지만, 나는 사과나무보다 옛길이 그냥 있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조금 전에 할머니를 보았던 작은 삼거리로 돌아나와 왼쪽으로 난 임도에 진입한다.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산흙길을 약 400m 가량 울퉁불퉁 오르니 금세 소천로가 나타나고,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가니 '노루재 해발 630m' 표지판이 거꾸로 박혀 있다. 아무리 터널이 생겨 활용도가 떨어진 도로가 되었기로서니 이렇게 표지판까지 거꾸로 박아 놓다니!
하지만 자세히 보니 거꾸로까지는 아니다. 두 개의 쇠파이프를 다리로 한 채 세워져 있던 안내판이 지금은 두 다리 따로, 얼굴 따로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 글자가 쓰인 얼굴판이 땅에 내려져 있다. 아무튼 이 도로의 현재 위상을 말해주는 것으로는 아주 적격인 증거물이다.
전적기념비와 사당 등 전적지를 찾아가자노루재 정상부를 넘어 아래로 굽이굽이 내려가 소천면 소재지가 턱밑에 보이는 고개 하단부 지점에 닿으면 1985년에 건립된 '임란 의병 전적 기념비'가 있고,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면 소재지와 마주 서 있는 산비탈에는 '봉화 임란 의병 전적지'의 충렬사가 있다. 지금 그 곳을 찾아가는 길이다. (충렬사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중 일본군 침입 없었던 '복받은 땅'> 참조)
노루재를 넘어 봉화 의병들의 1592년 전투지이자 전몰지인 충렬사 일원을 향해 가는 이 발걸음, 당시 의병들은 죽음을 앞두고도 몸과 마음이 뜨거웠겠지만 아득한 세월이 흐른 후 답사차 다니는 나는 그저 무겁기만 하다. 각화사에서 이곳까지 의병들은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의 행군을 했을 터인데, 불과 20여 분만에 닿았으면서도 내 발걸음은 왜 이리 무거울까?